막셀 모스의 선물론 강독 5
Tu le sais, si tu as un amien qui tu as confianceet si tu veux obtenir un bon résultat,il faut mêler ton âme à la sienneet échanger les cadeauxet lui rendre souvent visite.너도 알다시피, 네가 신뢰하는 친구가 있고 좋은 결과를 얻고 싶다면, 너의 영혼을 그의 영혼과 하나로 섞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자주 찾아가야 한다.마르셀 모스는 ...

1. 들어 가는 말
1922년에 발표된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는 ‘인도의 시(詩)’라는 부제가 붙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1)의 장편소설이다. 제목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소설 싯다르타는 헤세의 초기 동양적, 몽환적 경향에서 벗어나 불교의 절대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현실의 인간이 어떻게 세속적 쾌락과 마음의 오만을 초극하여 완성 자가 될 수 있는지 그 도(道)의 길을 불교사상철학을 기반으로 심도 있게 탐색한 작품이다.
싯다르타는 1922년에 발간된 이후 헤르만 헤세의 작품 중에서도 불교적인 색체가 가장 농후한 소설로 꼽힌다. 특별히 헤세 자신의 직접적인 구도체험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그 불교적 깊이와 진정성이 매우 심오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헤세는 1919년부터 <싯다르타>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이해와 체험의 부족으로 원하는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자 집필을 멈추고 금욕수행을 떠난다. 그리고 일 년 반 동안 직접 수행을 한 뒤 그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 <싯다르타>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했다.
카스트 제1계급에 속하는 바라문의 아들인 주인공 싯다르타가 실제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난 이후 다양한 인생 경험을 거치면서 마침내 부처님의 법[진리]을 얻게 된다는 책의 내용은 그런 점에서 일반 소설류와는 달리 매우 진지한 자기 구도소설이자, 헤르만 헤세가 도달한 불교핵심사상의 전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인 구도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은 책의 주제나 소재에 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전 이름인 싯다르타란 이름을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과감하게 차용한 것이라든가, 실제 석가모니 부처님이 소설 속에 등장하여 중요한 글의 흐름을 주도한다든가, 무엇보다 결론적으로 주인공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불교에서 제시하는 주요 진리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 등에서 <싯다르타>는 그 사상적 근간을 철저히 불교적 진리에 두고 집필된 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서구유럽에 불교사상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은 20세기 초반에 이 책이 출간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의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2. 헤세의 동양학 습득과 배경
선조와 부모로부터 동양적 요소를 물려받은 헤르만 헤세는 동양정신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동양을 자가 영혼의 본향이라 느끼며 일생동안 동양인들 빚 동양의 정신세계와 결부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작가가 직접 동양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은 아버지 요한네스 헤세와 일본의 외사촌 동생 군데르트 와 유명한 중국어문학자 리하르트 빌헬름에 힘입은 것이다.(리하르트 빌헬름이 독일어로 번역한 논어는 영어로 번역되어 하버드대학에서 교재로 쓰인다, 빌헤름은 중국어 논어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번역된 독일어를 다시 중국어로 이 중 번역해서 교정 과정을 거쳤다. 한국어 논어번역에 우리가 익숙하지만 빌헤름의 논어에 대한 독일어 주석은 독자적인 그의 논어에 대한 관점을 확인 할 수 있다)
헤세는 동양인들, 특히 일본인들과 교제하며, 이를 통해 동양의 고요하고 소극적인 인간생과 명상적 이며 도덕적인 분위기와 접하게 된다. 1911년 헷세는 지리적인 인도여행을 하기 이전부터 고대인도의 정신과 지혜에 심취한다 .기원전의 경전 바가바드가타를 탐독하고서, 작가는 “학습을 통하지 않은 험의 지혜를” 예찬하고, 철학과 문학과 도덕과 종교가 실제로 하나가 된 “인도의 형태로 된 동양의 단일사상”올 발견한다.
그러나 헤세는 인도정신에서가 아니라 중국정신의 원천에서 “자가 예감의 확증”과 영혼의 고향과 내면의 해방감을 발견한다. 중국정신의 이상을 목표로 인생을 영위하며 동양지혜의 책들을 즐겨 읽는다 . 그는 동양의 철학과 문학, 예술과 종교와 문화에 관한 책을 독서하고 서평을 쓰기도 하는데, 공자 • 노자 • 역경 • 시경 • 선불교 • 여씨춘추 • 맹자 • 열자(列子) . 이대 백 • 두보(삼南) . 양주(陽周) . 중국의 시 와 소설 • 동화등을 접하게 된다.
리카르트 빌헤름의 사서 삼경 독일어 본을 통해 주역의 세계에도 접하게 되고(빌헤름의 독일어 번역 주역의 서문을 융이 썼는데, 이 독일어본 주역을 통해 융은 초인과성Akausalität이라는 용어를 창안하게 된다) 노장 사상을 최종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소설 싯다르타속에서 처음에 구현되었던 기독교적 경건주의와 신비주의를 벗어나면서 헤세는 인도철학의 열반의 종교적 해석에 치우치던 입장에서 중국의 선불교를 통섭한 노장의 자연주의적 입장으로 자신의 믿음을 확립하게 된다.
헤세자신이 쓴 요약된 이력서< Kurzgefaßter Lebenslauf>에서는 <역경 易經 >의 괘를 이용해 풍경화를 그리고 그 풍경화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차를 묘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가 직접 쓴 저서의 영향을 통해 노자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 책 제목이 <그리스도 이전의 진리의 증인 노자(老子) >였다.
<주석>
헤세는 1932년에 쓴『나의 신앙 Mein Glaube』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라는 것을 두 가지 형태, 즉 기독교와 불교로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불타의 계시를 따르는 "인도적 형상 속에서 내 자신의 종교성에 대한 첫 번째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그 다음 중국의 지혜에 몰두하고 난 후에는 중국적 불교정신의 물결이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인도의 정신세계보다는 뒤늦게 나는 중국의 정신세계를 알게 되었고, 여러 가지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졌다. 중국의 고전적 도덕개념은 나로 하여금 공부자[공자]와 소크라테스를 형제지간으로 간주하도록 했으며, 신비적 역동성을 간직한 노자(老子)의 은밀한 지혜는 나를 여기에 깊이 몰두토록 하였다. 한국에서 헤세의 연구는 소설 싯다르타를 인도철학과 연관지어 연구되기도 하지만 중국 불교인 선종과 노장철학이 헤세의 후기에 끼친 영향사를 고려해서 다시 연구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한다.
논어의 원문을 비록 빌헤름 리카르트의 독일어 번역을 통해서 읽었지만 논어를 읽은 이후 헤세는 공자는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비교하기도 하고 논어원전의 탁월함에 경탄을 보내기도 하면서 『나의 신앙 Mein Glaube』속에서 논어와 주역을 읽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정립하기위한 긴 여정이 완성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헤세는 서간문에서 또한 자가 영혼의 전생, 즉 이 상에 태어나가 이전의 본 향(本 )이 유럽이 아니라 저 먼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히말라야 산중(山여)"이라는 예감을 끊임없이 지니고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듯 지리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그는 항상 동양세계와 결부되어 있다고 느꼈다.
〈싱가포르에서의 꿈 Singarrre-Traum>에서 서술하듯이 헤세는 자가 영혼의 원천에 대한 그리움에서 언젠가 싱가포르를 여행했을 때 “머리를 길게 땅아 내린 무수한 중국인들 틈에서 영혼의 고향을 회상시켜주는 이상한꿈을 꾸기도 했고 그는 동양을 자가 영혼의 본향으로,또한 모든 존재의 태초(太初)로 서술하기도 한다.
헤세의 외사촌이자 벽암록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함부르크대학의 인도학 교수를 지냈던 빌헬름 군데르트는 헤세가 프랑스 벽지를 여행했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연히 헤세를 전혀 알 아 볼수 없는 산간 벽지의 프랑스 산간의 점술가가 헤세를 만나 전생을 이야기 한다.
<" 당선은 유럽에서는 이방인입니다 전생에서의 당선은 히말라야 산중에 사는 은둔자였습니다 뾰족뾰족한 암벽들사이에서 고독한 삶을 영위하며 예쁜 꽃들이 피어 있는 푸른 목장을 좋아했습니다 ">
물론 헤세에 관한 일화는 여러차례 실화였음을 1971년에 말년의 빌헬름 군데르트교수는 밝히고 있다.
2.1 헤세와 인도의 정신세계
어린 시절부터 동방으로 여행할 때까지 늘 동양분위기에 젖어았던 헤세는 인도의 정신세계에 열중한다 그는 신지학(神知學)적’ 논문을 알게 되고소박한 신앙과 비판적 무신론’ 간의 균열을 노래한 바가바드가타 와 그 외의 인도문화와 문학과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다. 헤세는 고대인도의 지혜와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신의 인생과 사상형성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어릴적 부터 태동했던 전생의 고향으로 가고자 하는 헤세의 내면적 충동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당시 유럽의 무미건조하고 불안하며 거친 향락에 사로잡힌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또한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의 시초가 되며 모든 현상의 영원한 단일성 을 의미하는 생명의 원천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헤세는 동방으로의 여행길을 떠난다.
헤세는 실론과 니코바르 섬들, 싱가포르와 팔렘방, 수마트라와 캔디, 콜롬보섬과 말레이지아 군도 둥에서 유럽과 는 완전히 다른 삶을 보게 된다 낯선 움막집들과 울창한 원시림, 그 속을 흐르는 강물과 울부짖는 짐승들, 형형색색의 나비들과 우굴거리는 개미떼, 헤치고 들어갈 수도 없는 가시텀불과 깊은 늪지대, 천진스럽게 보이는 각종 토착민들과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는 식민지 사람들 둥 수많은 이국적 풍경과 생활환경에 가이한 호기심과 경탄의 마음을 느끼며 낭만적 꿈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
인도에서의 체험에 관해 헤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미 천국을 잃은 지 오래이 다 우리가 소유하고 이룩하고자 하는 새로운 것은 적도에서도 동방의 따스한 바닷가에 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정말 아름답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인도에 대한 실망에다가 오늘도 또 다른 새로운 실망을 느끼게 될까봐 못내 두렵다. 인도에서 동경하고 찾고자 했던 것을 현대화한 인도는 더 이상 충족시켜줄 수 가 없다.
한가로운 팽화와 고대의 지혜를 찾아볼 수가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애타게 그리워하던 고요한 인도의 진정한 정신과 접촉할 수가 없다 지치고 실망에 가득 차서 헤세는 약 개윌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돌아온다. 로망 롤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헤세는 정신적 자유를 안겨주지 못한 이 여행에 관해 설명 한다.
‘이 여행 자제는 사실상 하나의 큰 실망이었습니다 . 그러나 내가 유럽에 지쳐 서 인도로 도망쳤던 순간은 그 당시에 나는 저편의 세계에서도 이국풍의 매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답니다 . 이 물질적 이국풍은 그 당시 내가 이미 알고 또 찾고 있 었던 인도의 정신세계로 가까이 인도해 주기 보다는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더욱 멀리 떨어지게 했답니다 " 헤르만 헤세는 지리적인 인도여행을 하기 이전부터 고대인도의 정신과 지혜에 심취해 이었다.
기원전 2세기경에 쓰여진 우주의 원리를 해설한 힌두교의 경전, < 신의 노래>라는 뜻을 지 닌 바가바드가타 를 탐독하고서, 헤세는 <학습을 통하지 않은 지혜>를” 극찬하고 <아름다운 계시와 삶의 지혜와 종교로 꽃피어나는 이 철학은 바로 우리가 찾고 또 필요로 하는 철학이라고 까지 술회한다. 이 힌두경전에는 철학과 문학과 종교와 도덕이 실제로 하나가 되어있으며 이를 통해 헤세는 <인도의 정신이 하나로 응축된 사유>를 발견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고대인도의 철학사를 독서하면서 헤세는 “이 노래들 속에 깃들인 베다문학의 경건한 철학과 삼키아철학, 그리고 소박한 믿음과 비판적 무신론 사이에 벌어지는 균열을 헤세는 인식하게 되고 . 이세상의 삶과 세계를 부정 하는 인도정신에는 언제나 불만족과 실망 의 잔재가 깃들어 있다는 점을 느낀다. 이러한 인도 정신에 대한 불만족은 헤세가 중국의 정신세계를 접하고 거기에 침잠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결의 단초를 모색하게 된다.
2.2 헤세의 중국정신에 대한 이해
1929년 헤세는 〈세계문학 총서〉에서 인도와 중국의 지혜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서술한다 “저 인도인들에게는 없었던 것, 즉 인생과의 밀접함, 최고의 도덕적 요구로 결정된 고귀한 정신성과 육감적이며 일상적인 인생의 유희 맞 매력과의 조화 드높은 정 신화와 소박한 인생의 쾌락 사이의 드넓은 왕래 이 모든 것이 여기<중국의 서적>에는 충만하게 존재하고 있다.
인도인들이 금욕과 승려적인 세계관념 속에서 고귀하고 감동적인 것을 성취했다면, 고대 중국은 자연과 정 신, 종교와 일상생활이 적대 적 대 립이 아니라 조화적인 대립을 의미하고, 이 두 가지가 모두 정당하다는 정선을 도야함으로써 똑같이 경이로운 것을 이룩하였다 . 인도의 금욕적 지혜가 그 요구의 과격함에 있어서 젊은이다운 청교도적 지혜였다면, 중국의 지혜는 경험이 많아서 영려하게 되고 유머에도 정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련함으로 인해 실망하지도 않고 현명함 때문에 경솔해지지도 않는 어른스런 남자의 지혜이다라고 중국에 대한 그의 독해를 술회한다.
헤세는 중국 고전을 독해 감으로써 인도의 정신세계에서가 아니라 중국정신의 원천에서 “점점 더해 가는 기쁨”과 “정신적인 도피처 “자가 예감의 확증" 과 영혼의 고향 그리고 내면적 해방감을 발견하고 있다. 헤세는 인도의 정신세계에 관해서 보다는 늦게이긴하지만, 이미 인도여행을 하기 이 전부터 중국의 정신세계에 관한 독서에 몰두한다.
동방으로 여행하는 동안에도 그는 인도인들로부터는 거듭 실망하고 있는 반면에, 도처에서 만난 중국인들로부터는 지속적으로 강한 인상을 받는다. 1912년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점점 더 강렬하게 중국정신에 심취하고 결국에는 동아시아의 지혜에 몰입하게 된다. 헤세는 공자의 논어 관해서,그리고 1910년에는 노자의 도덕경 에 관해 서평을 쓴다 .
그뿐만 아니라 1911년 동방으로의 여행 동안에 집필한 〈팔렘방〉에 관한 기록에는 중국인들의 청결한 생활을 묘사하기 위해 중국의 도가(道家)인 열자(列子)의 책 충허진경(沖虛眞經)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고, 같은 해에 제목을 달지 않고 중국의 유명한 철언(哲人) 공자와 노자를 다룬 글을 쓰기도 한다. 동양의 지혜에 관한 독서는꾸준히 이어지고, 헤세 자신이 중국의 현인들을 높이 팽가한 내용을 담은 1931 년의 〈책들의 먼지 털기〉에서 25여 년 전부터”라고 말한 것을 보면 중국고전에 대한 헤세의 독해는 오랜 과정과 노정을 거쳐 이루어 진 것임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헤 세는 과거 인도철학을 다루고 있는 있는 책들이 놓인 서가의 위치에 여불위의 여씨춘추,역경(易經), 공자, 장자등의 독일어 책자들을 언제나 손에 잡을수있도록내 가까이에 배치하기도 햇다.
헤세는 노자(헤세는 노자를 서양과 대별되는 관점에서 중국인 노자라고 별칭한다) 철학을 , 본능에 내맡겨진 수많은 서양인들 보다 기본적 가치를 더 잘 인식하고 인류의 발전을 위해 보다 더 위대하고 합목적적인 철학 정신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도덕경 의 제 81장은 노자사상을 언급 하는 경우 헤세가 언제나 즐겨 언급하는 구절이기도 했다.

3 소설 싯다르타
3.1 배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는 제사나 리그베다, 老바라문들의 가르침에서 정신과 영혼의 만족을 얻지 못하였다. 물론 우파니샤드에는 훌륭한 시구들이 많이 있다. 그 시구들에는 놀라운 지혜가 씌어 있으며, 현인들이 모아놓은 온갖 지식이 마법의 언어로 적혀 있다. 지식을 단지 지식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생활화하기라도 하였던 바라문이나 사제들, 현인들이나 참회자(Büßer)들이 과연 있었을까?
이러한 회의 혹은 불신은 싯다르타의 내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의 목마름은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간 적이 있는 사문(Samanas)들을 생각해 낸다. 그 때 고행자들의 순례 행각 속에 서 감지했던 ‘자기부정(Entselbstung)’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기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향을 떠난다.
그들은 숲속의 사문들 곁으로 가서 단식, 호흡 멈춤 등의 고행을 통한 자아의 초극을 체험하려 한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된다면, 궁극적인 것, 존재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 그 위대한 비밀에 눈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문의 고행도 그들의 정신세계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그것은 자아로부터의 도주(Flucht vor dem Ich)이고, 자아상태의 고통(Qual des Ichseins)으로부터 잠시 동안 빠져나오는 것이며,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완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그 끝은 언제나 자아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순간적인 도취와 자아 도피일 뿐이었다. 싯다르타는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앎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2 진리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완성자라고 일컬어지는 고타마 붓다에게로 인도된다. 싯다르타는 설법하는 고타마의 모습에서 그가 성인임을 알아본다. 그에게는 고타마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진리를 말해 주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만큼 존경한 적이 없었다. 사성제에 대한 고타마의 설법은 거침이 없었다.
이 세상은 오로지 번뇌이며, 이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길이 발견되었고,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해탈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팔정도를 가르쳤다. 고빈다는 붓다에게 귀의하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하나의 결함을 찾아냈다. 그것은 그의 해탈이 깨달음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른바 전달성을 넘어선 영혼의 체험 가능성인 것이다.<세존이시여, 당신은, 당신이 깨달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무에 게도 ‘말로 그리고 가르침을 통하여(in Worten und durch Lehre)’ 전달하여 주실 수도 말하여 주실 수도 없습니다>. 깨달음에 관한 비밀이 결코 가르침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이른바 언어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했던 것이다. 그는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즉 해탈의 지혜는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뿐임을 확인하고 고타마를 떠난다.
3.3 세속은 윤회의 유희이다.
싯다르타는 이제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밑바닥의 자아를 알기로 결심한다. 진리는 삶을 통해 체험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바라문, 고행자, 승려가 아니었다. 그 어떤 가르침도 받지 말아야지.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을, ‘싯다르타라는 비밀(Geheimnis Siddhartha)’을 알아내야지. 싯다르타의 눈은 차안의 세계에 머물렀다.
사유의 세계 역시 차안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며, 감각과 사유 두 가지 다 좋은 것이었다. 그는 그 두 가지로부터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였다. 그는 속세의 삶에 몸을 맡긴다. 창부 카말라(Kamala)에게서 성애를 배우고, 상인 카마스와미(Kamaswami)에게서 사업과 부를 배운다.하지만 싯다르타에게는 오랜 세월 그의 몸에 체화된 사문 정신이 뿌리 깊이 내재하고 있었다. 그가 세속의 삶에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사문 시절 억눌렸던 관능이 잠시 되살아난 것뿐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 들었던 것과 똑같은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떠나거라(weiter)! 떠나! 너는 소명을 받은 몸이니라. 싯다르타는 세속을 치기어린 소인들의 유희로 보았고, 이런 유희야말 로 윤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도시를 떠났으며, 그 후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절망은 제대로 난 길 싯다르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이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끝내 버리겠다는 절망의 고통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원했던 위대한 구토 행위이며, 죽음이며, 자기가 증오하던 형식의 파괴였다. 그때, 그의 영혼의 후미진 곳에서, 지친 삶의 과거로부터 어떤 소리가 울려왔다. 그것은 ‘완전한 것’이나 ‘완성’을 뜻하는 성스러운 ‘옴’이었다. 그러자 그는 梵과 生의 불멸성을 알게 되었고 잊고 있었던 신성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옴’을 입에 올리면서 그는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옴’을 통하여 잠이라는 상징적 죽음을 경험한 후, 싯다르타는 현실 세계를 뛰어넘어 다시 태어나게 된다.< 나는 단지 또다시 어린애가 되고 또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짓, 얼마나 많은 악덕, 얼마나 많은 오류, 얼마나 많은 구토증과 환멸과 비참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p>
<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난 길(es war richtig so)’이었어, 나의 마음은 그 점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하고 있으며, 나의 두 눈은 그 점에 대하여 웃음을 짓고 있어. 내가 절망(Verzweiflung)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즉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은총(Gnade)을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 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내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아트만(Atman)을 발견해내기 위해서였어.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
너무 많은 지식과 노력이 그를 방해하였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만심으로 가득 찬 사제 또는 현인이었다. 이런 정신적 성향 속으로 자아가 파고 들어와 자라나고 있었고, 단식과 참회로써 그 자아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스승도 자기를 구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라던 그 내밀한 음성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난 길이 었다. 절망은 희망적인 고뇌였으며 은총과 구원의 길이었다.
3.4.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은 종교적 정화와 치유의 상징이다. 싯다르타는 흐르는 강 물의 비밀을 통하여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강에 숨어 있는 ‘시간성을 초월한 영원한 현존’이64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이 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찰나마다(jeden Augenblick)’ 새롭다! .
그는 나루터에서 뱃사공 바주데바(Vasudeva)와 운명적인 해후를 하고, 제자가 되기를 자청한다. 자연의 상징적 화신인 바주데바는, 그 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학식이 있는 사람(Gelehrter)’도 아니고, 말할 줄도 생각할 줄도 몰라요. 나는 단지 남의 말을 경청하는 법과 경건해지는 법만을 배웠을 뿐, 그 밖에 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어요> . 싯다르타는 강물은 아래로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과 경청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자유’의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다.
강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중략)‧‧‧그리고 강에게는 현재 (Gegenwart)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Schatten Vergangenheit)’도, ‘미래라는 그림자(Schatten Zukunft)’도 없다.강은 흘러서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그 역사는 무시간의 역사이다. 시간은 흘러가는 현재일 뿐이다. 그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변치 않는 본질과 현재만을 지니고 있었다.
<오! 일체가 ‘시간 속에 있는 번뇌(Leiden Zeit)’, ‘시간 속에 있는 자기 고뇌와 자기 공포(Sichquälen und Sichfürchten Zeit)’가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 >강의 소리 속에는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 들어 있었다. 강물 소리는 생명의 소리요, 현존하는 것의 소리이자 영원히 생성하는 것의 소리였다.
3. 5. 세계는 완전한 것이다.
카말라의 죽음과 아들의 가출은 싯다르타로 하여금 사랑이 번뇌이자 인간의 본질이며, 다만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였다. 그는 충동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세속의 생활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모든 욕정들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생명과 불멸의 梵을 보았다. 자기가 세상 사람들보다 앞선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는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서는, 도대체 지혜란 무엇이며,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추구해 온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이 무르익어 갔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삶의 한 가운데서 단일성의 사상을 느끼고 흡입할 수 있는 영혼의 준비 상태, 그리고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비밀스런 능력에 다름아니었다. 조화, 세계의 영원한 완전성에 대한 깨달음, 미소, 단일성이 그의 내면에서 피어났다.
수많은 소리가 어우러진 강물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중략)‧‧‧강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하늘로부터 다시 아래로 떨어져서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었다.‧‧‧(중략)‧‧‧그러나 다른 소리들, 기쁨의 소리, 고뇌의 소리, 선한 소리와 악한 소리, 웃는 소리와 슬퍼하는 소리, 백 가지, 천가지의 소리들이 끼어들어 강물 소리와 한 동아리를 이루었다.‧‧‧(중략)‧‧‧싯다르타는 더 이상 그 수많은 소리들을 구분할 수가 없었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 가 되어 있었다.‧‧‧(중략)‧‧‧그는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그 어떤 특정한 소리에 몰입하지 않고 모든 소리들을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 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이 바로 ‘완성, 즉 옴(Om: die Vollendung)’이라는 말이었다.
이제 싯다르타의 얼굴에도 바주데바와 동일한 미소가 생겨났다. 그의 자아가 강물과 합일되어 단일성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운명과 싸우는 일과 고민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의 얼굴 위에 깨달음의 즐거움이 드러났다. 어떤 의지도 더 이상 그것에 대립하지 않는, 완성을 알고 있는 깨달음이었다. 그 깨달음은 동고동락의 마음으로 가득 찬 채, 강물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 채, 그 단일성의 일부를 이루면서 생명의 흐름에 동의하고 있었다.
바주데바를 길 삼아 강의 비밀을 통해 싯다르타 자신도 겸허한 완성자에 이른 것이다. 마음속에 여전히 불안과 구도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는 고령의 계율수지자 고빈다가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를 찾아와 그가 완성자가 되었음을 확인한다.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는 고빈다가 아직도 진행형의 구도자임 에 비해, 싯다르타는 완성자라는 점이다.
고빈다가 그때까지도 어떤 교리와 믿음, 지식을 신조로 삼고 있다면, 싯다르타는 삶의 한 가운데서, 심지어 속세의 기생과 상인까지도 그의 스승으로 삼아가면서 마침내 강으로부터 완성의 길을 배웠던 것이다. 긍정의 우회로싯다르타에는 ‘인간성숙의 단계’에서 ‘신앙의 단계’에 도달한 세 사람 의 완성자가 등장한다. 고타마, 바주데바, 그리고 주인공 싯다르타이다.
그들의 길은 각각 다르지만 그 근원에 있어서는 하나가 된다. 그리고 도달한 마지막 단계는 단일성의 체험이다. 체험의 순간 신비하게도 모든 대립이 사라지고, 시간과 공간이 극복이 되며, 언어도 초월하게 된다. 이미 득도한 자는 모든 가르침을, 모든 길을, 모든 목표를 다 인정할 줄 아는 법이며, 그런 경지에 도달한 자를 영원 속에 살며 신성(das Göttliche)을 호흡하는 수천의 다른 성자들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바주데바는 모든 사유와 언어 이전에 직접 자연에 접하여 그 소리에 귀 기울인 선험적인 각자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강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싯다르타는 그를 길71 이신구, 앞의 책, p. 16. 헤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헤세가 언급한 인간 형성 3단계 위에서 양극을 합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정신적 인간이다.
싯다르타는 이제 바주데바가 신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이 사람이 더 이상 바주데바가 아니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중략)‧‧‧이 사람이 바로 신 그 자체라는 것을, 이 사람이 바로 영원 그 자체라는 것을, 싯다르타는 점점 더 강렬하게 느꼈다. ‧‧‧(중략)‧‧‧바주데바는 벌써 오래전부터 언제나 그런 존재였는데, 자신만이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을것을 싯다르타다는 자각하게 된다.이런 깨달음은 주었지만, 바주데바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싯다르타의 각성을 촉구해 주는 방편으로서, 자연의 한 상징일 뿐이다.
한편 고타마는 금욕과 고행의 시행착오를 거쳐 깨달음에 이른 유일자이다. 싯다르타도 첫 대면부터 고타마의 威儀에서 그가 완성자라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나는 아직까지 그 분처럼 바라보고 미소 짓고 앉아있고 걷는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어‧‧‧(중략)‧‧‧자기 자신의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뚫고 들어간 사람만이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걷는 거야>.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위의와 말씀보다는 그의 삶의 체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중생 구제에 온 힘을 쏟은 그의 삶이 바로 진정한 스승이었다. 반면에 싯다르타는 모든 금욕과 본능, 질서와 혼돈, 선과 악을 알몸으로 체험함으로써 단일성의 깨달음을 완성한 각자이다. 작가는 바로 그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마침내 그에게 긍정의 방점을 찍은 것이다. 헤세는 어디까지나 싯다르타의 ‘구도의 우회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깨달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 이르는 도정과 그 비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강물과 관련해서 실제로 헤세가 ,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원천인 ‘강물의 비밀을 도덕경 제8장과 연관지어 서술하고 있을 개연성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주석>
헤세 자신의 굴절 많은 인생 역정과도 강물을 대비해보면 , 즉. 실제로 헤세 자신은 신학교를 나와 자살을 기도하였으며, 한 동안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정신분석치료를 받기도하엿으며, 또한 두 번의 이혼도 결코 평탄치 않았을 그의 삶의 괘적이 강물과 비유적으로 상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