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셀 모스의 선물론 강독 5
Tu le sais, si tu as un amien qui tu as confianceet si tu veux obtenir un bon résultat,il faut mêler ton âme à la sienneet échanger les cadeauxet lui rendre souvent visite.너도 알다시피, 네가 신뢰하는 친구가 있고 좋은 결과를 얻고 싶다면, 너의 영혼을 그의 영혼과 하나로 섞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자주 찾아가야 한다.마르셀 모스는 ...

현재 독일어권을 위시해 유럽과 영미권에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한병철 교수의 『존중 없는 사회』(간디서원, 2026)가 최근 정창호 박사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10 여년 전 『피로사회』에서 성과주의 사회의 ‘자기착취’로 독서계를 강타한 후로 저자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꾸준히 책을 내고 있다. 그의 책은 부피가 얇고 흡입력도 좋은 편이라 가독성이 좋은 편이다.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의 핵심적 현상을 ‘존중 없는 사회’라는 개념으로 포착하고 있다. 인간의 가치를 성과에 종속시키는 사회에서는 자기 존중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 함께 손상된다는 것, 존중의 위기는 개인의 인성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계와 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은 총 여덟 장으로 구성된다. 첫 장 「존중 투쟁」은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면서 롤즈의 ‘질서정연한 사회’를 든다. ‘자기 존중’, 다시 말해 인간이 자기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은 평등한 권리와 사회적 인정의 기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성과사회에서는 존중이 직업, 소득, 지위에 매여 버린다. 경쟁에서 패배하는 일이 곧 인간으로서 실패하는 일처럼 경험되는 것이다. 루저(loser)로 낙인 찍인 자들의 굴욕과 고립은 사회를 해체하는 공격성과 파괴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병철은 이 문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엔첸스베르거의 ‘분자적 내전’ 개념을 끌어들인다. '분자적 내전'은 뚜렷한 이유도 명확한 적도 없는 무의미한 파괴의 전쟁이다.
둘째 장 「타자에 대한 주의」는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와 사려 깊은 ‘거리’를 강조한다. ‘주의’(Aufmerksamkeit)는 타자에 대한 경계나 조심이 아니라 ‘관심과 배려, 그리고 연대’를 말한다. 인간관계에서 일정한 형식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아니다. 오히려 즉시 반응하고 평가하면서 무시로 타인의 감정 문제에 개입을 하고 훈계를 하는 것이 갈등을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 주의는 단지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자기 방식으로 나타날 시간을 주는 일이다. 다음 장에서 이어지듯 한병철은 나와 다른 타자와의 관계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다.
셋째 장 「정체성과 타자성」은 나와 같은 사람끼리 결속하는 관계와,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우정을 대비시킨다. 우정은 상대를 자신의 복제물로 만드는 관계가 아니라 ‘차이’를 품는 관계로 제시된다. 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데 있다고 하면서 정체성 정치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진영 간의 정치적 대립을 이해하는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설 땅을 제한한다. 한병철은 이에 대해 ‘우정의 정치학’을 제시하면서 그 단서를 ‘타자성’ 개념에서 찾는다. 타자성은 정체성 정치를 무너뜨리는 힘이다. 그것은 타자를 나의 복제물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넷째 장 「수치심 상실의 시대」는 현대인들에게 일상화된 파렴치하고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의 원인을 분석한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를 따먹자 제일 먼저 깨닫은 것이 수치심이다.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 의지단야 (羞惡之心 義之端也)는 잘못한 행동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과 문명이 발전하는 데는 이러한 수치심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약자를 조리돌리고 수치심을 주는 행동이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병철은 이러한 현상을 ‘수치심 상실’로 규정하고, 그것이 공격성과 폭력성의 증대를 가져와 공동체를 해체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섯째 장 「가치, 이상 그리고 본보기」에서는 삶의 방향을 이끄는 가치와 본보기의 약화가 문제로 등장한다. 이런 현상을 그는 수직적 질서의 긴장이 상실된 것으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대인들은 파편화된 원자들(개인들)의 ‘수평적 질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수평적 질서는 가치와 이상이 무너진 사회일 뿐 평등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민주주의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화폐와 상품으로 물신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른과 본보기가 실종되고, 초월적 이상이 거부된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인플루언서와 아이돌(idol)이 대신한다. 학교 폭력이 일상화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교육 민주화로 위장된 선생의 부재와도 연관이 깊다.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의 소멸이 오히려 생태계의 파괴를 가속화시키듯, 사회와 교육 현장에서 존경받는 어른과 선생의 부재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도 있다.
여섯째 장 「존경」은 칸트적 인간 존엄의 문제를 다룬다. 앞서 지적했듯, 상품물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단순한 상품의 처지로 전락한다. 하지만 칸트가 주장했듯, 인간은 그 자체 목적이며 존엄한 존재이다. 저자는 여기서 존중과 존경을 구분하고 있다. 앞서 말한 ‘존중’이 ‘타자성’에 대한 인정과 배려라고 한다면, 칸트적 의미의 존경(Achtung)은 ‘타자의 존엄성’의 인정을 의미한다. 한병철은 이러한 구분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성조차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앞 장의 수직적 가치 질서와 이 장의 보편적 존엄은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롤즈가 말한 ‘질서정연한 사회’가 되려면 탁월한 성취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의 존엄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째 장 「공론장의 퇴락」은 무시로 분출되는 사적인 감정과 자기표현이 공적 관계를 압도하는 현상을 다룬다. 예의와 형식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 필요한 거리를 만드는 장치가 된다. 한병철은 이것을 ‘친밀성’의 문화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문화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거리’가 멋대로 무시되곤 한다. 자신의 감정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상대에게 강요하는 태도는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상처를 준다. 루소의 『고백록』은 이런 친밀성의 문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루소는 귀족 사회의 전통과 의례, 그리고 예절을 인위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인간들 사이의 거리가 부재하고 솔직한 감정만 난무하는 것이 반드시 미덕은 아니다. 온갖 사적인 의견의 전시장, 분노, 증오, 경멸, 원한 같은 원색적 감정의 배설소로 전락한 현대의 디지탈 공론장을 감안한다면, 한병철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여덟째 장 「권위의 위기」는 지금까지 말한 문제들에 대한 한병철 나름의 대안 제시로 볼 수도 있다. 타자와의 차이와 거리를 무시하는 사회, 수치심 상실의 시대, 가치와 이상이 부재하고 초월적 이상과 수직적 질서를 평면화한 사회에서는 그것을 잡아줄 수 있는 권위가 요청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외부로부터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억압과 강제의 의미는 아니다. 그가 말하는 권위는 전통적 의미의 신성이나 지도자들의 카리스마와 같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유지되는 법과 제도의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권위의 회복은 그 정당성을 검증하는 절차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전문가를 신뢰하는 사회에는 전문성뿐 아니라 설명 책임, 이해충돌의 공개, 오류를 정정하는 제도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한병철의 『존중 없는 사회』의 각 장을 따라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 책에 드러난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전에 출간된 그의 다른 책들과 긴밀하게 이어진다. 개념 주조의 마법사라고 할 만큼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자기 착취를 『피로사회』에서 다뤄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 『타자의 추방』에서는 타자와의 모든 것을 자기와 같은 것으로 흡수함으로써 타자와 만날 가능성을 상실한 나르시스트적 주체를 다루었다. 비슷한 문제의식으로『리추얼의 종말』에서는 공동체의 형식과 결속의 약화가 예의와 거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기술했다.
일련의 이러한 작품들 간의 연속성에는 상품화가 전면화된 자본주의 사회와 신자유사회에 대한 그의 비판이 개념을 달리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처럼 거대한 문제와의 대결이 그의 대안적 해법의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도 해볼 수 있다. 저자의 책들을 늘 대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 있다. 비판은 날카롭고 급진적인데, 그 해법에 대한 전망은 늘 비관주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성과와 경쟁이 인간을 파괴한다고 비판하는 급진적 목소리와 예의와 본보기, 권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감수성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아울러 ‘존중의 상실’이라는 관점으로 신자유사회의 여러 병리를 묶을수록, 서로 다른 현상의 원인까지 하나로 설명할 단순화의 위험도 커진다. 경제적 불평등, 인터넷의 모욕, 정치적 적대, 권위의 추락은 상호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들을 싸잡아 동일한 현상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우정과 경청은 중요한 방향이지만, 그것만으로 경쟁의 압력을 낮추거나 존중의 사회적 기반을 만들기는 어렵다. 이 책의 논지를 더 밀고 나간다면 실패해도 생활과 시민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제도, 감정노동자를 보호하는 조직, 모욕의 확산에 책임지는 플랫폼을 만드는 논의가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하고 싶다. AI 번역의 품질이 상당 수준에 올랐다고 하지만 역시 전문 번역가의 잘 다듬어진 문장과 주석을 대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가독성이 높은 데는 저자의 문체와 깊이 있는 시대 진단, 그리고 글쓰기 기법도 있지만 역자의 빼어난 번역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