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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흑해바다의 대도시 삼순(Samsun)이 가진 터키 근대사의 의미 - 터키독립전쟁의 성지(聖地)
글쓴이 : 알렉세이정
작성일 : 26-04-14 14:58
조회수 : 79

1919년 5월 19일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삼순 상륙을 재현한 미니어처,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이자, 제1차 세계대전 내내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웅으로 부상하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한 임무를 띄고 1919년 5월 16일 이스탄불을 떠나 4일 뒤 흑해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터키 역사교과서에는 이날 아타튀르크가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 반드르마호가 항구를 벗어나자 공해상에서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아타튀르크는 혁명을 선언한다. 그러나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전부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는 아타튀르크의 배신을 파악하고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때린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때가 1919년 9월 4일의 일이다. 이후 보다 많은 독립 군벌들을 규합한 의회는 1920년 4월 23일에 앙카라에서 대국민회의(Büyük Millet Meclisi)로 개칭하면서 오늘날 터키국회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대국민의회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터키 대국민의회로 명명된 독립군은 사방이 적에 둘러싸인 채 고립된 무척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장 동부에서 아르메니아가 고토수복을 명분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있었으며, 남부에서는 프랑스군이 약속받은 땅을 받기 위해 북진하고 있었으며 서부에서는 그리스군과 터키군의 치열한 대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대국민의회의 병력으로는 사방의 적을 상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가장 세력이 크고, 아나톨리아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그리스군을 상대로 병력을 집중시킨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빈 자리는 결국 민병대가 맡게 되었다.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에펜디 중장은 오스만 술탄의 명령으로 삼순(Samsun)항으로 오게 된다. 아타튀르크가 맡은 임무는 술탄에게 거역하며 소규모적인 저항을 벌이던 군대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 해산이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아타튀르크는 되려 휘하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려던 민족주의 단체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 와중에 아타튀르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는 이스메트 이뇌뉘 대령(İsmet İnönü, 1884~1973)을 만나게 되면서 이뇌뉘도 합류하게 되면서 술탄에 저항하게 된다. 그러나 술탄은 아타튀르크를 질책하며 그가 삼순을 비워 그리스와 싸우러 간틈을 이용해 삼순을 다시 장악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삼순 시민들은 아타튀르크가 다시 삼순 항구에 도착하자 술탄파를 밀어내고 자유를 쟁취한다.



이어 그리스에 대해 선전포고하고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치고 내려오니 이곳은 이즈미르와 더불어 터키 독립전쟁의 상징이 되었다. 이래서인지 삼순 시는 아예 도시 상징물이 말을 탄 아타튀르크 모습이며 연고지 축구팀인 삼순스포르 상징도 이걸 따르고 있다. 삼순은 아타튀르크 지지자에겐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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