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는 본래 한족이 아니다. 그의 집안 자체는 색목인(色目人) 출신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지역에 살다가 몽골제국에 의해 정복된 후, 중국으로 들어와 원(元)나라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쿠빌라이 칸(元世朝)가 운남 지역을 정벌한 후, 정화의 증조부를 운남 지방의 다루가치로 임명하여 통치를 맡겼는데 그는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마(馬)씨의 성을 하사받는다. 마(馬)는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원나라가 특별히 성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비단 정화의 집안에만 마(馬)씨의 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즈베키스탄 동부 지역 대도시 안디잔으로 가는 길,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보통 원나라에 귀순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보편적으로 하사한 성씨가 바로 마(馬)씨인 것이다. 마(馬)는 이슬람교의 선지자인 무함마드를 한역한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이와 같은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이 한국의 정수일 박사이다. 정화의 본래 이름은 마삼보(馬三寶)인데 그의 이름이 이러한 이유는 운남성에서의 그의 관직이 삼보태감(三寶太監)이었기 때문이다. 마삼보는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탄생할 때부터 그는 무슬림이었다. 1382년 원나라의 멸망 이후, 운남성이 명나라에게 정복되자 마삼보는 명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棣)는 곤명성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학살하고, 어린 남자아이는 거세했다고 한다.
당시 삼보는 붙잡혀 강제로 거세되었고 주체가 즉위해서 영락제가 되었을 때 그의 환관으로 궁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영락제는 원나라를 밀어내고 중원 뿐 아니라 몽골이 지배했던 서쪽 지역을 바다를 통해 그 영광을 재현하고 동남아시아, 인도, 아랍 이슬람 국가들 등의 조공무역국을 늘리기 위해 고심을 한 결과 중앙아시아와 아랍, 인도, 동남아시아 각 지역의 사정에 밝고 중화 중심 사상을 전파할 능력이 있는 정화가 적임자로 생각하고 그에게 대원정을 명령하게 된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0년까지 무려 7차례에 걸친 대원정을 떠나게 되는데 항해 거리만 185,000km에 이를 정도로 장대한 거리를 왕래했다.
정화의 항해는 명나라 정부로부터 직접적으로 진행된 범국가적 사업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보고서가 작성되었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 어느 지역을 항해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대신에 정화의 원정에 따라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나, 원정에 참여한 사람들 무덤의 묘비와 같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이 모가디슈의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바닷길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존재하는 유럽의 대항해시대와 같이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세계사적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화의 대원정이 끝나고 명나라는 더 이상 해상 진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북원 및 몽골-타타르와의 잦은 전쟁으로인해 엄청난 전비의 소모가 있었으며, 원정대를 보내는 것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 더 이상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지 못해 오히려 중국의 해상 활동은 퇴보하고 말았다. 반면 이러한 정화의 해외 원정은 최근 중국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