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에게서 <배움> <익힘> 그리고 <즐거움> -<논어고금주>학이편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중국 매스컴에서 장래 중국의 정치체계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자주 거론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대동(大同)과 소강(小康)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등장하지 안는 개념이다.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체제를 불가피한 소강(小康)으로 받아들이고 점차 미래 어느 한 시점에서는 대동(大同)의 실현으로서 정치체계를 민주주의형태로 가져가겠다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주장인데, <예기 예운편>의 공자의 언설인 대동(大同)과 소강(小康)에 대한 선이해 없이는 현대 중국에 대한 정치학적 분석은 정밀성을 상실 할 것이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은 국가주석에 오르기 전까지 중국 공산당 당교(黨校)의 교장을 지냈다. 중국 전역을 그물망처럼 엮고 있는 중국 공산당 당교(黨校)는 고대 漢나라때부터 있었던 국가 교육기관의 또 다른 변용에 해당 된다. 중국 공산당의 이론가 덩위원(鄧聿文)이 “중국.. 이제 북한을 버려라 ! 한국 주도로 한반도 통일 이루어야 한다”는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는 2013년 3월 한국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시진핑 국가 주석이 주창한 국가개혁과 사회시스템 전환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덩위원(鄧聿文)은 중국 공산당 당교 기관지인 학습시보(學習時報)의 부 편집인이기도 하다. 한국 언론에 덩위원(鄧聿文)의 기사가 나간 이후 덩위원(鄧聿文)은 잠시 정직 상태에 있다가 일체의 모든 공식 직책에서 전격적으로 공식 해임 된다. 이 부분은 한국 언론에 보도 되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이 항왜원조(抗倭援朝)의 변용인 항미원조(抗米援朝)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해프닝이었다.
길게는 20여년 전부터 가깝게는 10년 전부터 중국 공산당은 중국정치의 이념적 표상을 <공자>에서 찾으려는 국가 주도적 사업을 표방했다. 개혁 개방 이전 중국 공산당이 공자를 부르조아적 색채가 농후한 학자로 간주해서 중국 학술계에서 반 공자(反孔子)적 인 학술 논문이 양산되었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전향점을 보이고 있다.이런 전향점은 중국 2500년 철학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의미한다. 공자이후 남송의 주자가 외래 문명이었던 불교를 고대의 유교경전을 가지고 다시 비판 해석하면서 중국문명을 중국 고유의 방식으로 자기화(自己化)시킨 것은 문명사적 전환이었다. 1000년이 지나 중국문명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외래 질서체제들을 중국화 시키기 위한 거대한 시험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질적인 외래문명을 자기화(Selbstbeziehung)시키려는 그 중심축에 주자이후 다시금 공자가 놓여 져 있는 것이다.
공자의 언설을 확인 할 수 있는 텍스트는 논어가 유일하다. 중국 공산당 당교의 기관지 이름이 학습시보(學習時報)인 것은 논어 학이편의 첫 문장 <자왈학이시습지(子曰學而時習之) >인것과 무관하다고 할수 있을까 ?
논어 특히 학이편의 첫문장은 누구나 학이 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하면 그뜻을 이해할 정도로 이미 대중에게 너무 많이 회자 되고 알려져 있다. 불행하게도 이미 세상에 회자되고 알려진 것은 오히려 자명한 것처럼 보여서 잘은 인식되지는 않는데, 논어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다산은 논어고금주에서 논어를 인식하기 위해 방법론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논어를 독해한다. 다산 스스로 학이편 첫 문장을 글자 하나 하나 문맥 하나 하나 정밀하고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본 논문도 다산의 방식을 따라 그의 분석을 다시 고찰하고 논어고금주만을 가지고서는 파악되지 못하는 논어고금주의 형성과정과 배경을 다산의 서신과 시문집과 초기 저작들을 참고해서 살펴 볼 것이다.
2. 논어 고금주의 형성과정
1) 다산과 그의 제자들
다산이 논어 고금주를 기획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그 단초를 우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진 유배기 동안 성립된 정약용의 다산학은 다산 개인만의 노력으로 산출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다산을 포함한 그의 제자들과의 공동의 작업으로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의 현손 정규영의 정약용의 일대기를 기록한 <아암선생연보>에 의하면 당시 강진에는 다산의 작업을 위해서 경전을 열람하고 역사서를 탐색하고 수정된 원고를 다시 옮겨 쓰고 옆에서 거들어 줄을 치거나 교정하고 대조하거나 책을 메는 작업을 하는 자, 또는 다산이 저술을 시작 할 때는 자료를 모으는 사람 등 흡사 분업형태에 가가울정도로 다산의 좌우에 제자들이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집체적 결과물들이 다산초당시절에 쏟아졌는데 보은산방시절이나 이후 이 학래의 집에서 기거할 때 는 기대하기 어려운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만덕산자락에 위치한 다산의 먼 친척뻘인 윤후의 초당에 자리를 잡은 이후 불과 3년도 안 되어서 1810년에는 가례작의, 상례사전, 시경강의보, 상서고훈수략, 매씨서평, 소학주천, 아방강역고, 춘추고징, 역학서언 등의 서적을 다산은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정약전에게 보낸 서신에서 확인 되는 바로는 1810년에는 다산이 중풍을 앓고 증세가 심상치 않아서 혀가 뻣뻣하고 말이 헛나갈 정도로 육체적 괴로움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정황들 속에서 1813년 겨울 다산이 수년간의 자료를 수집하여 논어고금주를 완성하였는데 <아암선생연보>에 의하면 논어고금주의 완성에 제자 이 강회와 윤 동이 저술을 도왔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 또한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논어에 대한 저술이 늦어진 이유는 사서라는 밭에는 버려진 나락이 없을 것이라고 짐작해서 크게 덧붙이거나 다시 주석을 달아야할 절박함을 못 느낀 것이 일차적 원인이었지만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이강회가 과거시험을 보고 낙방한연후에 강진으로 내려와서 경학과 예학에 매진하면서 발분하여 다산에게 논어에서 미진한 부분을 집요하리만큼 철저히 질의하고 또 이강회의 질의에 대한 답을 주기위해서는 다산 스스로도 무척이나 곤역 스러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다산초당에서 이유회 ,이강유형제를 문하의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 1808년도 정도의 일이였고 중형인 정약전에게 보낸 서신 속에서 강진읍의 아전의 아들과 비교해서 다산초당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잘 묻지도 않고 양미간에는 잡털이 무성하고 온몸에 감도는 것은 쇠락한 기운만 감돌뿐만 아니라 마치 두발을 묶어놓은 꿩과 흡사해서 쪼아 먹으라고 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일부러 곡식 낟 알갱이에 대주어서 주둥이가 낟 알갱이와 맞닿아서 쪼을 수 있게 해주려 해도 결국 낟알을 쪼지 못하는 녀석들이라고 술회했던 다산이었지만 이제 다산초당에서의 제자 이강회가 예리한 질문을 던져서 다산을 괴롭히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눈에 안경까지 착용하고 이강회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이다. 실지로 논어고금주의 필사본에도 이강회와 윤동이 참여했다는 기록을 확인 할 수가 있어서 사암선생연보에서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2) 다산의 저술을 도왔던 이속 출신의 제자 이청
공식적인 문헌에서 확인 할 수는 없지만 강진읍 주막집에서 다산의 제자가 된 소위 읍중제자중의 한사람 이청(이학래,학래는 아명이다)을 논어고금주의 탄생에 기여한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산계절목의 명단에는 다산초당제자들의 이름, 즉 이유회와 이강회형제를 위시한 강진에 살았던 해남윤씨의 자제들의 이름이 올라가 있고 그저 그 말미에 다산이 자신과 우환을 같이 했다고 술회한 읍중 제자 6인인의 이름이 겨우 올려져 있지만 읍중 제자가운데 다산초당으로 옮긴 제자는 이청이 유일하다. 이청의 신분이 이속의 신분이였던 것을 고려해보면 사족의 가문이였던 이강회형제를 위시한 윤씨 자제들과 동문수학한다는 것은 쉬우 일이 아니었는데, 다산초당으로 다산이 거처를 옮긴 후 이학(理學)에 밝은 이청과 짝을 이루어 학문을 연마할 이속출신의 제자하나가 사족의 자제들과의 신분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 학업을 그만둔 일을 중형 정약전에게 서신으로 알리고 있는 점에 미루어 보아도 이청이 다산 초당에 끝까지 합류한 점은 특이할 만하다. 그리고 이청의 학문적인 역량은 추사 김정희의 언급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가 있는데, 추사가 우연한 경우를 통해서 다산의 읍중제자 황상의 시詩를 읽고서 평하기를 요즘 세상에 이런 작품은 없다(今世無此作)라고 하면서 다산의 그 많은 제자들을 모두 망라해서 이러한 시를 지은 황상과 대적할 만한 사람은 이청 말고는 없다고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학연 정학유 형제의 주선으로 신분을 뛰어넘어 황상은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고 마현의 다산의 집을 해배이후 방문할 때면 과천의 추사 의 집에 의례히 방문하는 친분을 지닌 황상이었지만 추사의 황상에 대한 극찬과 아울러 이청을 언급한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은 자신의 논문<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학술>에서 <강진읍지>를 인용하면서 다산이 해배되어 경기도 마현으로 돌아가기 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제작하여 다산이 친하게 지내던 스님들과 그의 제자 이청에게 전해주면서 은밀히 간직할 것을 당부했다는 내용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다산의 이청에 대한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경오년 (1810) 다산이 다산초당에 있을 때, 큰 아들 학연이 마현으로 돌아가고 해는 길고 마음 붙일 곳이 없을 때 오직 이청만이 그에 곁에서 ,<시경강의>보충을 하고 다산의 말을 받아 적었다. 읍중제자중 시에 능했던 황상(黃裳)의 문집에 실린 <이금초(금초는 이청의 字)를 만나서(一逢李琴招)>와 <이상적(李尙迪)의 은통당집(恩桶堂集) >을통해, 이청은 다산이 해배된 이후 마현까지 따라 올라와서 다산을 곁에서 모셨지만 다산의 의중과는 반대로 과거에 응시하고 거듭된 낙방에도 불구하고 70세가 되도록 과거에 응시한 후 고향 우물 속에서 생을 마감되었음을 확인 할수 있다.
3) 다산의 논어 독해와 성호의 <논어 질의>
다산의<논어고금주>저술은 유배지 강진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다산이 그의 부친에게서 직접 15세 이전까지 사사받은 것도 논어였다. 다산이 16세가 되던 1777년 정조 1년이 되던 해에 성호 이익의 유고를 처음 접했고 1778년 화순의 동림사에서 맹자와 함께 논어를 본격적으로 읽는 40일동안 학문의 즐거움의 정수를 맛보았는데 동림사에서의 논어를 독해하는 방법은 성호의 유고에 나와 있는 방법론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익은 이미 성인(聖人)과의 거리가 너무 시대적으로 멀어졌기에 성인(聖人)이 말씀하신 뜻을 지금에 와서 확정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아졌기 때문에 경학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두루 섭렵해서 경전을 연구해야 하며 실제로 주자 또한 그의 방법론이 경학자료를 널리 수집해서 경설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익이 주자의 논어이해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일정한 주자학의 텍스트와 거리두기를 시도했다는 점이 18세의다산이 동림사에서 논어를 독해하는 과정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성호의 <논어질서>는 주자성리학의 일정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주자성리학을 송의 유학으로 더욱더 상대화시켜 바라보는 시각은 다산이 성균관의 유생이 되고 정조가 책문을 내리고 책문에 대한 대책을 작성하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사단칠정에 대한 율곡과 퇴계의 입장 차이를 묻는 정조의 책문에 대한 대책에 남인이였던 다산은 퇴계의 입장을 고수하는 당시의 학풍을 따르지 않고 율곡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고 작성했고 그 대책을 읽어본 정조는 다산의 대책을 1등으로 평점한다. 조선성리학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독해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4) 다산의 경전 학습법 선경후사(先絰後史)
강진에서 제자들을 강습할 때에도 학습순서상 선경후사(先絰後史)를 강조했다. 사서로서 몸을 채우고 육경으로 나의 지식을 넓힌 후에 여러 가지 역사서를 통해서, 망하고 흥하며 란을 다스린 근원을 인식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정수칠에게 쓴 서신에서 다산은 예기 여러 편을 모두 읽었으면 다음으로는 시경, 국풍과 논어를 읽고 그다음으로 대학과 중용을 읽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또 다산은 초학들의 교재로 널리 쓰이는 천자문에 관한 편견을 지적하는 자리에서 교재로 쓰이는 사략과 통감절요를 비판한다. 다산은 사략은 초입부에서부터 가공적인 삼황오제이야기를 실고 있다는 점에서 ,통감절요는 주자의 통감강목을 흉내 내서 앞뒤 없이 서로 상충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초학자들의 교재로 타당치 못하다고 비판한다. 이 경우 논어나 맹자를 가르치는 것이 초학자들을 위해 유익하다고 까지 언급한다. 다산은 심지어는 시詩를 쓰기위해서도 사서를 읽고 육경을 읽으며 역사서를 읽어서 자신의 마음이 언제나 뭇 백성에게까지 미치며 만물을 생하게 하려는 군자가 되어야만 안개 낀 아침이나, 달이뜬 저녁, 보슬비 내리는 때가 되면 감흥이 솟아나며 표현이 홀연히 떠올라 자연스럽게 읊조리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시세계의 생동하는 경지라고 말한다. 다산에게 시詩란 군왕을 사랑하고 국가를 걱정하며 시국을 가슴아파하고 풍속을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시詩는 시詩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서와 육경을 통한 수신修身의 단계를 간과해서는 그 누구도 시문詩文의세계로 들어 갈수 없는 것이다. 종국적으로 사서와 육경을 통한 수신은 회갑을 맞이해서 다산 스스로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육경사서로 수기하고 일표이서로써 천하를 다스리니 본말이 갖추어진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5) 논어고금주의 완성
다산은 ,<십삼경책>에서 공자의 심오하고 아름다운경지를 열어 보여준 것은 주자의 성리학이아니라 <논어>와 <맹자>이며, 사문(斯文)에 별이나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고 <논어>와<맹자>를 평가한다. 이여홍(李汝弘)의 서신에 답하면서 다산은 자신이 보기에 ,<논어>에서 공자 자신이 인을 언급하였지만 인을 더욱 부연설명하기위해서 성,심,체,용 과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논어> 그 자체에 질박하고 담백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논어대책>에서 다산은 후학들이 신뢰해서 믿고 깨달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논어 한권뿐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다산이 ,<십삼경책>과 <논어대책>을 작성할 때의 연배가 29세에서 30세 전후라는 점을 고려 할 때, 규장각 초계문신이된 2년후 즉 30세를 전후해서 독자적인 자신만의 관점으로 <논어>를 독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논어에 대한 태도는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육경이나 여러 성현의 글을 모두 읽어야하지만 단지 <논어>만은 종신토록 읽어야한다고 술회하게 되고 이러한 그의 관심은 어느 다른 경전보다 학문적 관심으로 가장 일차적으로 증폭되게 된다. 이렇듯 논어에 대한 관심은 <집해>나<집주>의 선례를 따라 양질의 주注들을 수집해서 한권의 책을 만들고자하는 욕구로 옮겨가고 일상의 이러한 관심과 고금을 망라한 <논어>에 대한 학설을 수집하게 되어 결국 1813년에 <논어고금주>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고 중형 정약전의 서신에 답하면서 다산은 밝히고 있다. <논어고금주>는 내적으로는 전 생애를 관통하여 온축되어온 다산의 학문적 관심과 그 학문의 실천전 지향성이 유배지 강진에서 다산스스로 키운 제자들과의 집단적 협업을 통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3.<논어고금주>에서 학이편 분석
1) 학이(學而)라는 편명의 성립과정
다산은 논어고금주 제1편을 시작하면서 학이편이 모두 16장이며 이미 학學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장의 첫머리를 이루게 되었기에 학이라는 두 단어가 논어라는 책의머리편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學而第一凡十六章 . 邢云旣以學爲章首。遂以名篇)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 학이(學而)라는 제목의 설정은 우연적인 것으로 다산은 설정하고 있는듯하다. 주지하다시피 논어 20편은 매 첫 편에 나오는 단어 둘식을 조합해서 각 편의 이름으로 삼고 있다. 다산은 별다른 보충이나 설명 없이 논어 첫 편명이 학이라고 불리 우게 된 근거를 논리적 근거로서가 아닌 사실적 근거로서, 형방이 그렇게 언급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물론 <논어정의> 즉 형병의 소에서 논어의 첫째 편명의 이름을 학이로 한다는 언급을 확인 할수 있다. 형병은 소의 대가로 북송 진종때, 한림시강학사와 예부상서를 지냈다. 형병은 양무제때 황간이 지은 <논어의소>를 더욱 확대시켜서 소의 전통을 포괄적으로 완성시키는데, <논어정의>가 그것이다. 형병의 ,<논어정의>는 정보가 풍부하고 기존의 논어학에서 제기된 여러설들을 망라하고 있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된 것은 후한 중기지만 그 재질의 오늘날의 종이에 비해 형편없었으므로 텍스트의 역할을 한 것은 여전히 죽간이었으므로 물리적으로 길고 많은 내용을 담을수 없었다. 서진이후로 종이는 텍스트의 소재로써 일반화되었고 특히 형병이 <논어정의>를 찬술했던 송나라 때는 목판본의 종이책이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하는 시기였기에 형병의 <논어정의>가 목판본으로 유통되면서 그 이전까지 나왔던 논어에 대한 기타 단행본들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때에 황간의 <논어의소>도 사라지게 되고 일본의 아시카가학교 도서관에 판본이 보전되어 오다가 청나라 때 역수입되게 된다. 목판으로 대량으로 인쇄된 형방의 ,<논어정의>는 대량으로 유통되었던 것만큼 상당한 다수의 유학자들에 의하여 읽혀지고 검토되어지고 다른 주석서와 비교되어지면서 집단적 이성에 의해 검열된 그리고 공자의 <논어>를 이해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할 권위 있는 두 번째 텍스트로서 위상을 마련 한 것으로 보인다. 형방은 <논어정의>에서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사후 논찬하는 과정에서 공자와 제자들 사이의 묻고 답한 내용을 ,<논어>라는 큰 이름으로 정하고 그 이후에는 <학이>와같이 각 편수들을 작은 제목으로 순차적으로 응당 결정되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논어고금주>에서 형방의 이 부분에 관한 언급을 다산이 하고 있지는 않지만 형방의 이러한 주장은 충분한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논어의 작성은 유자와 증자계통의 제자들의 일단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으로 다산은 파악한다. 논어에 유자나 증자이외에도 염자와 민자에게도 존칭어인 자子를 쓰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다산은 이경우도 주된 작업은 유자와 증자계열의 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고 혹간 염자와 민자 계열의 문인들이 참석해서 작업을 거들었던 것을 단순히 높혀 부르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논어의 작성자들은 자장,, 금뢰, 증삼, 자장 혹은 자하의 제자, 민자건의 제자들을 들 수도 있고 기본적으로 논어는 공자의 제자와 재전제자(再傳弟子)들의 공동작업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논어를 작성한 주요 구성원들에 대한 상호 이견이 존재한다. 가령 정현은 중궁,자유, 자하를 논어 작성의 중요 구성원들로 본다면 황간의 입장은 정현과 다르다. 유종원은 자하를 중요 작성자로 간주한다면 정이천은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이 논어를 작성하는 주요 구성원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다산은 정이천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논어의 종류에 관해서도 다산은 ,<노론>, ,<제론>,<고론 >각기 3종류의 논어가 존재하는데 각각의 논어를 전해준 사람들이 다를 뿐 실질적인 경문은 동일한 것이어서 원래 단일본이었다고 주장한다. 가령 <제론>이,<노론>보다 장구가 많은 이유도 다산은<노론>의 1장을 <제론>에서 2장으로 나누었을 뿐이지 원래 경문이 많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하지만 제론은 노론보다 문왕(問王)과 지도(知道)의 두 편이 더 많고 20편중에서도 장구가 노론 보다 많다. 고론은 노나라 노공왕때 공자의 고택 에서 나온 것으로 문왕과 지도 두편이 없고 요순편에서 자장이 물음을 던진 <何如斯可以從政> 이하를 1편으로해서 <자장편>을 하나 더 만들었다 .당연히 <자장>과 <자장편>이 합쳐져서 모두 21편이 되고 있다. 각각의 편차 또한 제론과 노론이 다르다. 오늘날의 논어는 서한 말에 안창후(安昌候)와 장우(張禹)가 <노론>을 기본으로 삼아 <제론>을 일차적으로 다듬은 것을 동한 말에 정현이 <노론>과 안창후와 장우의 <징후론>과 ,<제론>과 <고론>에서 장구와 문자 등을 참작해서 주注의 형식으로 완성한 <논어정씨주>를 근간으로하고 있는데, 다산이 언급하고 있는 각기 상이한 논어 판본들과의 관계는 <논어고금주> <계씨>편 초입에 다산 스스로 제론과 노론과 고론에 대한 입장을 개진한부분과 관련하여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리하고 생각된다.
2) 공자가 말씀하셨다<자왈(子曰)>의 의미 분석
다산은 학이편을 주석하면서 <子曰學而時習之>에서 자(子)는 스승을 가리킨다는 형방의 주장을 다시 언급한다. 자子는 남자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지만 논어 학이편 첫머리에 등장하는 자왈(子曰)에서 자(子)를 일상적인 남자의 통칭을 넘어 황간이 <논어의소>에서 자(子)란 덕이 있는자(子是有德指稱) 라고 밝히고 있고, 형방 역시 이를 더욱 확대해석해서 子란 후세에 성인의 덕이(聖德) 이미 세상에 알려져(著聞) 모든 행동과 학덕이 스승의 모범師範)되었으므로 공자의 성씨(其氏)를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不須言) 사람들이 모두 子자 공자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人盡知之)라고 子曰의 子를 풀이 한다. 공자에 대한 호칭의 문제, 그러니까 위정편(위정21)에서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정치를 하시지 않습니까 ? 라는 물음(或謂孔子曰 : 子奚不為政)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 문하에서는 공자를 자(子)라고 칭하지만 문하이외에 다른 사람과의 구별을 염두에 두어서 언급할 필요가 있을 때 공자(孔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산은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논어> 계씨편에서 계씨가 앞으로 전유를 정벌하려고 계씨의 가신으로 있었던 공자의 제자 염유와 계로가 공자를 찾아가서 뵙고 계씨가 전유에서 사변을 일으키려 한다고 묻는 부분이 나오는데 , 염유와계로는 공자 문하의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공자를 높혀 자(子)로 기록되지 않고 공자(孔子)로 기표되고 있으며 , 공자 또한 염유와 계로의 질문에 답하는 문맥에서도 높임말인 자(子)를 쓰지 않고 공자(孔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계씨1: 季氏將伐顓臾。冉有、季路見於孔子曰:「季氏將有事於顓臾 . 孔子曰:求!無乃爾是過與) 자장편에는 4군데에서나 공자를 일컬어 중니仲尼라는 표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자장 22(衛公孫朝問於子貢曰:仲尼焉學),자장23(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子貢賢於仲尼) 자장24(叔孫武叔毀仲尼。子貢曰:「無以為也,仲尼不可毀也)자장25(陳子禽謂子貢曰:子為恭也,仲尼豈賢於子乎 ). 논어를 각각 전반부 10편과 후반부 10편을 나누어 고찰해보면 자장편과 같이 후반부에 오면서 전편에서 볼 수 있는 공자(孔)子나 자(子)라는 표현과 달리 중니仲尼라는 표현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어휘와 지칭의 사용에 있어서 논어편집자를 동일인으로 간주하기 어렵게 하는 부분이기도하다.
다산은 공자(孔子), 자(子),중니(仲尼)의 서로 다른 쓰임에 관하여 형방의 주장을 언급하는 것 이상의 어떤 구별을 하고 있지 않다. 한문 자(子)라는 글자가 성(姓)에 붙혀져 스승이라는 표현이 쓰인 용례를 하유가 ,<공양전>가운데 심자(沈子)에 자(子)를 붙혀 자심자<子沈子>라고 언급한 내용을 다산이 언급하고 있다. 비단 논어에서만이 子를 성씨에 덧붙혀 쓰인 용례를 언급하지 않고 더 멀리 <공양전>의 예증까지 ,<하휴>의 지적을 다산은 적고 있다.
3)주역이해의 단초로서의 다산의 <공양전> 이해
공양전의 심자를 인용 한 것은 子가 남자의 통칭을 넘어서 스승을 지칭할 때 쓰이기 시작했다는 고증을 다산이 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산의 <공양전>에 대한 관심은 강진에 유배오기 전 첫 유배지 경상도 장기에서, 조선후기 예송논쟁의 기해방례, 갑인예송 , 경신방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1801년도의 일이다. 남인이자 윤선도의 5대외손인 다산이 같은 남인인 윤휴를 예리하고 균형감각 있게 비판한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은 강진 유배기에 예에 관하여 집중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1811년에는 ,상례(喪禮)에 대한 총체적 연구서인 ,<상례사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산은 자연스럽게 상례를 연구하면서 주나라 시대의 ,<춘추좌씨전>에서 상례의 옛 징험들을 고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춘추좌씨전>연구에 몰입한다. 다산이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주나라 왕실에서 점을 치던 점관占官의 점의 사례들에서 <주역>이해의 단초를 찾게 된다. 청년기에 다산과 어울렸던 이가환의 묘지명 속에서 다산이 유배이전시기에는 그다지 ,<주역>에 관한 관심과 심도 있는 연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육경가운데 오직<역경>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 씀을 술회하면서 이익의 <역경질서>나 이병휴의<역경심경>등의 책들이 <역경>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지를 이가환에게 묻고 있다. 이가환은 이정조의 <주역집해>만이 <역경>이해에 도움이 될 뿐 종국에 어떠한 책으로도 ,<역경>의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신을 쓰면서 <역경>연구에 뜻을 두지 말 것을 다산에게 권면한다. 다산이 윤외심에게 보낸 서신 속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확인 된다.
鏞啓,昔先君解官家居. 讀周易日讀一卦.時鏞在旁參觀.唯見其擊節欣賞 未有質問.此壬辰癸巳間事也.旣而竊經義進士徙寓樓山。會賢坊則 慨然自咎曰名之曰經義進士。而不讀周易乎。旣讀如不讀。逮釋褐隷內閣。課四書三經。日受敎於香案之前。顧欣然自賀曰今而後。可以受易於聖人矣。講自大學。上至尙書。不幸遭先君之憂。遂不得一聽先大王之授旨。服闋而閣課之名亦除。每謂此生遂不可以知此書矣。凡天下四庫之富二酉之祕。旣已名之爲書者。蓋未有怊悵掩卷者。而獨於易望之氣沮。欲探而不敢手者屢矣。辛酉春。謫長鬐。至秋夢已筮其命。遇屯之復。覺而喜之曰始屯而變之爲陽復。無乃其終有慶乎。旣而占不驗。又逮至京。轉而謫康津。厥明年春。讀士喪禮。因而讀喪禮諸書
용이 삼가 여쭙 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관직을 내려놓으시고(다산의 부친은 옛날에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그 곳 수령의 비행을 규찰 했는데, 그때 일을 빌미로 모함을 받아 잠시 마현에 돌아와 칩거 중 이었다. 역자주) 집에 기거하실 때에 하루에 한 괘씩 주역을 읽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옆에서 주역을 읽으시는 선친을 직접 뵌 적이 있습니다. 단지 저는 선친께서 무릎을 치시며 좋와 하시며 감탄 하시는 것만을 뵈 온 적이 있을 뿐 여쭈어 본적은 없었습니다. 이는 임진년과 계사년사이에 일어난 일이였습니다. 그런 후에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거처를 옮겨 누산 회현방에(지금의 서울남대문에서 남대문 시장사이의 언덕부분이다. 다산은 그전까지 살았던 낮은 지역의 회현방 근처(지금의 남대문 시장)의 집에서 이사하여 주택을 구입한다. 역자 주) 기거할 때 후회스럽고 몹시 제자신이 개탄스러워 자책 했습니다 .“ 소위 경의진사라고 일컬어지면서 <주역>을 읽지 않았던 말인가 ” 읽었다고 한들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 문과에 급제해서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규장각에 예속되어 사서삼경을 정기적으로 정한 분량만큼 매일 매일 향안 앞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성인에게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고 흔쾌히 자축 하였습니다. 대학에서부터 상서에 이르기까지 강학을 하게 되었을 때, 불행하게도 부친의 상을 만나게 되어 선대왕(정조 역자 주)의 주역에 대한 가르침을 한 번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상복을 벗은 연후에는 규장각의 과(課)에서 이름이 역시 지워졌습니다. 하여 저는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주역>의 글귀들을 끝내 알아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말미암아 다산의 <주역>.에대한 이해와 주역에 연구와 수반되어지는 <춘추좌씨전>에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강진유배기에 개화기를 맞이했다고 할수 있다.
4) “말하다” 의 여러 가지 표현들. 자왈(子曰), 언(言) , 어(語)의 의미 분석
다산은 자왈(子曰) 이라는 표현에서 자(子)와왈(曰)을 각기 분리해서 고찰하기보다는 자(子)와왈(曰)두 단어를 하나의 표현 단위로 간주하고 동사 왈(曰)을 강조하지 않고 언급을 하는 주체인 자(子)를 중심으로 해서 성씨(姓氏)를 기표하지 않고도 자(子)가 공자(孔子)를 의미하게 되는 이유를 밝혔다. 황간은 자왈(子曰)을 분석하면서 왈(曰)은 자신의 의견 따위를 말로써 꺼내놓는 실마리 (曰者發語之端也)라고 풀이한다. 형방은 자왈(子曰)을 분석하면서 설문해자를 인용한다. 왈(曰) 어사(詞)이고 <口>와 <乙>로구성되어 있으며 입에서 기운이 나오는 것을 본뜬 것이다. 사(詞)는 말하고자 하는 뜻이 안에 있어서 말이 밖으로 나온 것이 되고(意內而言外) . 말하고자하는 의지대로 그 말을 하게 되면 그때의 말하다는 왈(曰)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왈(曰)은 언(言)과 어(語)와 구별된다. 형방이 曰을 풀이하면서 설문해자를 인용하고 있듯이 ,설문해자에 의하면 언(言) 직접 말하는 것이고(直言曰言) 어(語)는 논란에 대하여 답하는 뜻을 지닌다(論難曰語). 실제로 공자의 <논어>라는 명칭은 공자 사후 몇 백년이 지난 후대에 일컬어진 것이다. 공식적 텍스트인 <논어>로 불리어지기전에는 공자의 <논어>는 <전(傳)>, <기(記)>,<공자칭(孔子稱)>,<공자왈(孔子曰)>,<어(語)>,<논(論)> ,등으로 지칭 됬었다.,맹자이전에 <논어>라는 명칭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논어>라는 명칭의 등장은 한무제 초기정도에 쓰인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여겨진다.
5) <청각 언어>에서 <시각 언어>로의 이행
학이편에서 자왈(子曰)의 의미는 공자가 자신의 의중에 있는 생각이나 느낌들을 직접 말로써 그러니까 청각언어로 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공자의 언설들은 맨 처음부터 시각언어로 텍스트화 된 것이 아니라 공자가 말하는(曰) 내용들을 듣는 청중들에 의하여 청각적으로 전달된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공자는 자신의 언설을 모아 놓은 <논어>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물리적으로도 읽을수 없었다.<논어>는 공자 생존 시에 시각언어로 텍스트화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각언어가 텍스트인 시각언어로 변환 되면서 , 그리고 변환된 시각언어가 공자의 생존시기부터 전래되어온 것이라면 <전(傳)>이되고 , 공자의 청각언어를 시각언어로 텍스트로 기표된 것이라면 <전(傳)>가 되며 청각언어의 발화자의 문제,즉 발화자가 누구냐고 하는 주체성에 중점이 모아진다면 <공자칭(孔子稱)>,공자왈(孔子曰)>으로 , 그리고 발설된 청각언어의 내용이 특정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대답이라는 점이 강조 되는 경우에는 <어(語)>,<논(論)>으로 , 공자의 <논어>는 각각 지칭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이나 불교의 초기 불경들도 청각언어에서 텍스트인 시각언어로 변환되는 과정을 모두 거쳤다. 가령 붓다 사후 간행된 불경의 첫머리에는 붓다의 언설인 청각언어를 텍스트인 시각언어로 변환시키면서 발화자주체가 붓다임을 명증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 내가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 문장을 삽입해야했고 불경을 시각언어로 변환시키기 위한 붓다 제자들의 결집에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불경의 청각언어가 시각언어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시각화된 텍스트의 독창성과 순수성은 기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입증에 있었다. 공자의<논어>가 청각언어에서 시각언어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변환된 시각언어>의 독창성과 순수성을 명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자왈(子曰) 또는 공자왈(孔子曰)이라는 기표이다. 청각언어, 즉 공자의 언설은 그 발설이 언표 되는 순간에는 존재하지만 그 발설을 기억하거나 시각화한 텍스트 속에서는 공자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청각언어는 한때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 청각언어는 현재라는 시간성의 지반에서만이 존립한다. 子曰 은 청각언어가 변환된 시각언어이다. 시각언어로 <기표된 子曰>은 <발화자인 공자>와 시각을 통해 기표된 택스트를 읽는 <독해자>들로 하여금 물리적으로 분리시켜준다.<기표된 子曰>은 더 이상 공자의 언설을 듣거나 공자의 몸짓, 표정에 주목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기표된 공자의언설>은 언설을 해석하고 인식하기 위한<눈>과 <지식>과의 관계, 혹은 문자와 지식간의 문제로 변환된다. <발화된 공자의 언설>에서 ,<기표된 공자의 언설>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주(注) 와 소(疏)였다. <시각화된 택스트>와 그리고 주(注) 와 소(疏)는 <발화된 공자의 언설>보다 시간적으로 선행할 수가 없으며 <청각화한 공자의 언설>이 기표행위를 통해 < 시각화 된 언설>로 변환되어야하므로 논리적으로도 선행 할수 없다. 독해자가 공자의 <논어>를 이해하기 위해 논리적인 측면에서나 시간적인 측면에서, <발화된 공자의 언설>을 선행할 수 없다면 그 이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특정한 이해의 방식에 고정되지 않고, 원근법적인 이해의 지평을 갖아야 한다.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객관적 거리두기를 통해 공자의<논어>를 이해하려는 시각은, 다산이 자신의 논어연구의 성과물을 <논어고금주>라고 명칭한 점에서도 잘 드러 난다.
6) 다산의 일본 유학에 대한 이해 -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다자이 슌다이
다산은 선생님인 공자(夫子)를 子라고 지칭하는 것은 공문집단 안에서 통용되던 호칭이었음을 오규 소라이의 언급을 인용하여 밝히고 있다.<춘추>에 노나라 안에서는 노나라의 제후를 공(公)이라고 지칭했다는 사실을 오규 소라이의 언급을 통해 다시 기술하고 있다. 소라이의 <논어징>에서 다산이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논어에서 공자를 성씨를 빼고 지칭한 것은 <춘추>에서 노나라의 제후를 공公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경우로 내사이다( 論語稱孔子去姓, 如春秋公魯侯, 內辭也 ) ”
여기에서처럼 오규 소라이의<논어징>의 원문과 다산의 문장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일치하는 문장구조가 발견되지만 논어고금주에서 다산이 인용하고 있는 오규 소라이의 50개의 인용문장들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들도 적지 않게 발견 된다. 거시적 시각에서 고찰하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오규 소라이를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근대적 시민적 세계관으로 물고를 돌렸던 일본 근대 탄생의 모태로 간주한다면, 주자학 위주의 조선성리학의 병폐와 폐단을 목도하면서 경학(經學)을 일신시켜 본으로 삼아 일표이서(一表二書)를 통해 이대로 두어서는 필히 망하여 갈 조선을 근본부터 경장시키려 했던 다산을 오규 소라이의 대척점에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공통점이외에도 오규 소라이와 다산이 주자학에만 함몰되지 않고 고금주까지 다양하게 포섭하면서 <논어>를 독해 한다는 공통점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반면에 오규 소라이는 주자가 불교의 영향을 받아 공자의 <논어>본뜻을 살리지 못하였다고 지나치게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고학古學쪽으로 경도되어 있다면, 다산은 주자를 논어 고금주에서 박駁,의 형태로 직접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다산은 박駁의 형태로, 포함, 형병, 황간을 빈번히 비판하고 ,정현, 하안, 공영달등도 비판하지만 오직 주자에 대해서는 보왈補曰) , 질의(質疑)형식의 질문형태로 내용을 추가하거나 의문을 표시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세부적으로 <논어>에서 거론되는 인,성인, 학, 도 ,예,악(仁, 聖人 ,學 ,道, 禮 ,樂)에대한 개념 설정에서도 다산과 오규 소라이는 차이가 나며, 어떤 경우에는 전혀 합치되지 않는 점도 발견된다. 다산과 오규 소라이 사이의 간극은 두 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입장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다산이 오규 소라이의 학문적 견해를 오규 소라이의 제자이자 계승자인 다자이 슌다이의 저작 <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다산은 도쿠가와 시대의 고의학파인 이토 진사이를 비롯 고문사학파인 소라이와 그의 제자들을 인지하고는 있었으나 직접 숙독한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다자이 슌다이를 정밀하게 이해하고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 유학자들의 면면을 파악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자이 슌다이는 먼저 자신이 저술한 < 논어고훈>을 저본으로 해서 여러주석들을 석명하고 기타 문헌들을 참고한후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지만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엇기 때문에 이러한 미진한 부분을 누락시킨후에 <논어고훈외전>을 저술하게되었다고 <외전>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予旣撰論語古訓, 其所攷證古書文, 乃諸家異同之說 與夫愚按取捨之辯, 不可具載. 玆別錄之以爲古訓外傳, ).<외전>을 다자이 슌다이이가 찬술했지만 본래는 출판을 목적으로 한 서적이 아니었다. <외전>은 제자들과 강학을 할 때 참고로하기위한 용도였을뿐 외부사람에게 알려지고 읽혀질 목적의 저술은 아니었는데 여러사람사람들의 간청으로 말미암아 공개적으로 출판되게 된다.
<논어>의 징명하고 객관적인 이해를 위해 한(漢)으로부터 송(宋) 명(明), 청(淸)에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논어에 관한 주석서를 고찰한 것도 조선 경학사에 그 예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도쿠가와시대의 일본 유학자들의 서적까지 다산이 논어고금주속에서 통찰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산 사유의 치밀성과 편벽되지 않는 < 논어텍스트>와 <주석>과 <이해>사이의 객관적 거리두기라는 <다산학>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사례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부언하자면 <다산학>이라고 언급한 것은 <실학(實學)> ,<허학(虛學)>의 대립적이고 논쟁적 구도에서 다산을 평가하기보다는 다산의 저작과 사상을 이 두 구분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조망해야 하는 분위가 조성되고 있고 ,또한 그 모색이 이 시대의 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정도전>에게서는 불교(佛敎)가 허학(虛學)이었고 유학(儒學)이 실학(實學)이었으며 율곡의 경우도 방법론적으로 상대론적 구분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實),허(虛)의 상대적 구분을 지양하고 형식과 내용의 완결성을 지닌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 다산을 다산으로 이해하기위한 단초가 될 듯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다산학>은, 방법론의 형식적 완결성의 의미 만을 지닌다.
7) 일본유학에 대한 이해의 몇 가지 변곡점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 유학자,특히 오규 소라이에 대한 다산의 평가는 한두 번의 변곡점을 지니고 있다. 비교적 젊었던 34세경에 다산이 쓴 시에서 다산은 이토 진사이는 고학(古學)학을 좋와 한다고 일컬어지고 오규소라이가 고무 선동하였고 그 흐름이 다자이에게 이어졌지만 오히려 일본에도 이름난 유학자들이 많다고 조선에서 회자되는 것은 기실은 내용이 없는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입장은 조금씩 달라도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다자이 모두 강력한 반 주자적(反朱子的)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다산이 비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의 21수에서는 다산은 모기령을 천하에 황망하기 이를 때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이리저리 날뛰는 원숭이>,<커다란 나무를 흔들어 잎사귀를 떨어트리려는 왕개미>에 비유한다. 모기령을 강력히 폄하하는 것이다. 다산이 당나라때 한유가 친구 장적에게 써준 싯 구절까지 차용하면서 <분수를 모르는 왕개미>로 모기령을 힐난한고 있는 것은, 모기령이 과도하게 주자의 단점만을 찾아내려는 태도와 그의 불손하기까지 여길 수 있는 품행 때문이었다. 21수의 이러한 비판적 시적인 분위기는 22수 소라이를 위시한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유학자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모기령의 저술은 다산이 이미 통독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비판은 객관적이라고 할수 있지만 도쿠가와시대의 일본유학자들에 대한 다산의 비판은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할수 없다. 이시기까지는 다산의 일본유학에대한 이해는 피상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天下妄男子
我見毛奇齡
突兀起壁壘
關弓對考亭
窮搜摘一疵
踊躍如猴耄挺
平心遜其詞
獨不能談經
蚍蜉撼大樹
一葉何曾零
日本多名儒
正學嗟未見
伊藤稱好古
荻氏益鼓煸
流波及信陽
詖淫亂經卷
다산의 도쿠가와시대 일본유학에 대한 보다 적확한 이해는 위의 다산시가 쓰여진 이후 5년이 흐른 1800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그해 겨울 졸곡을 끝내고 다산은 귀향해서 여유당에서도 형제들과 매일 같이 경전經典을 강했고 그 결과물로써 <문헌비고간오>가 완성된다. <문헌비고간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소홀히 했던 일본관련 서적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일본유학이 의론(議論)에 있어 다소 왜곡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고학선생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다자이 슌다이의 문장과 경전해석이 찬연(燦然)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본유학의 학문 수준을 가늠할 때, 그리고 일본유학자들이 경의(經義)와 예의(禮義)를 말한 것이 이러한 정도라면 일본은 반드시 예의를 숭상하고 나라의 원대한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입하는 참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일본은 이제 걱정이 없다고 말할수 있다고(故曰) 다산은 언급한다.
日本今無憂也。余讀其所謂古學先生伊藤氏所爲文及荻先生太宰等所論經義。皆燦然以文。由是知日本今無憂也。雖其議論間有迂曲 ~중략 ~此皆文勝之效也。文勝者。武事不競。不妄動以規利。彼數子者。其談經說禮如此。其國必有崇禮義而慮久遠者。故曰日本今無憂也。
다산의 일본에 대한 평가와 기술은 낙관적인 측면을 지니는데, 강진유배기에 두 아들들에게 보낸 서신 속에서도 이러한 낙관론은 이어진다.
示二兒家誡
日本近者。名儒輩出。如物部雙柏號徂徠。稱爲海東夫子。其徒甚多。往在信使之行。得篠本廉文三度而來。文皆精銳。大抵日本本因百濟得見書籍。始甚蒙昧。一自直通江淅之後。中國佳書。無不購去。且無科擧之累。今其文學遠超吾邦。愧甚耳。
일본(日本)에는 근래에 이름있는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는데 호를 조래(徂徠)라고 하는 물부쌍백(物部雙柏(雙松의 오기. 역자 주) 같은 사람은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일컬어지고 있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매우 많다. 지난번 신사(信使)가 다녀오는 길에 조본렴(篠本廉)의 글 세 통을 얻어가지고 왔는데, 그 문장이 모두 정밀하고 섬세했다. 무릇 일본은 본래 백제(百濟)를 통해서 서적을 얻어 보게 되었으므로 옛날에는 몹시 우매하였었는데, 그 후에 일본스스로 중국의 절강(浙江) 지방과 교역을 트면서부터 중국의 좋은 서적은 사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과거(科擧)제도에서 오는 누적된 폐단이 없으므로 지금 그들의 문학(文學)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으니,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다산은 두아이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에도 후기의 유학자 시노모토 렌
(篠本廉)의 저작을 읽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간단없는 일본유학에 대한 다산의 관심을 확인 할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까지의 조선 통신사들이 전하여준 일본유학자들의 서적은 조선유학자들 사이에는 일본에서의 주자성리학이 얼마만큼 진척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금석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었다. 다산만이 일본고의학파 뿐만 아니라 절충학파에 속하는 시노모토 렌(篠本廉)까지 학문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산은 조선의 과거제도가 주자성리학 관점을 학문적으로 심화 ,재생산하는 옹벽한 페단이 있었지만 과거제도가 존재하지 안 았던 일본은 주자의 해석에서 매이지 않고 나름대로의 문학(文學)의 발전을 보여 조선을 능가하는 것으로 비쳐진다고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서신 속에서도 폐족으로 낙담하고 있는 큰아들 학연에게 과거를 볼수 없음을 개탄하지 말고 오히려 과거시험에서 놓여나서 더욱 다양하고 심도 잇게 공부 할수 잇는 계기로 삼으라고 다산은 훈육한다. 그런데 시노모토 렌의 저술을 다산이 읽은 시점을 위의 다산서신에서 확인 할 수 있다.바로 지난번 조선의 통신사가 다녀오는 길에(往在信使之行), 서적 세통을 얻게 되었다는 부분이다. 1763년 영조 39년에 계미사행이 있었고 ,1811년 순조 11년에 신미사행 등 영조와 정조 그리고 순조제위기에 단 두 번만의 조선통신사파견이 있었다. 계미사행은 다산의 활동기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므로 다산이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는 통신사의 파견은 신미사행으로 파악 된다.시노모토 렌(篠本廉)의 활동이 에도후기에 해당한다는 점에서도 신미사행을 다산이 언급하고 잇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신미사행은 통신사들이 당해 연도 7월에 대마도에서 돌아왔으므로 다산이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서적을 접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일러도 1812년 이후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논어고금주>에서 시노모토 렌(篠本廉)에 대한 언급을 전혀 확인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논어 고금주>가 완성된 1813년 이후에 다산은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저술을 확인하게 되고 고향의 두 아들들에게 서신을 보낸 것으로 추정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산이 강진에서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저술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산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적교류에서 찾을수 있다. 일본 막부가 이지통신(易地通信)을 집요하게 요구했고 조선역관들이 뇌물을 받고 매수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조선 통신사들은 오랜 관례를 깨고 에도막부가 아닌 가까운 대마도에 파견되었는데, 이 신미사행의 일원 중에 직 간접적으로 다산과 그의 아들 학연, 그리고 추사 김정희와 교분이 있는 문인들이 있었다. 사행단 일행 중에 김선희는 김정희와 막역한 사이였다. 정사 서기로 신미사행을 수행했던 김선희는 김노경을 수행해서 북경에 다녀 올 정도로 김노경과 김명희, 김정희 형제와 교분이 두터웠고 평가에 인색한 김정희도 김선신의 문학을 높이 평가했다. 김선신은 사행에서 돌아와 대마도에서 보고 느낀 것을 추사에게 전언 하였을 것이고 김정희는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저술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8) 다산과 추사 김정희 그리고 일본 유학자들에 대한 평가 -시노모토 렌(篠本廉)
日本文字之起。自百濟王仁始。而其國書。其國所稱黃備氏所製也
其時不通中國。凡係中國書籍。皆資於我。今足利學所存古經。卽唐以前舊蹟也. ~중략且如皇侃論語義疏。蕭吉五行大義等書。皆中國之已佚。尙存於彼。何其異也。~중략今見東都人篠四本廉文字三篇。一洗弇陋僻謬之習。詞采煥發。又不用滄溟文格。雖中國作手。
추사김정희는 그의 완당집에서 일본의 문자의 연원은 백제의 왕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일본이 중국과 통하지 않았을 때에는 조선에 물어 구하여 갔지만 일본의 시카가학교(足利學)에 당나라 이전의 `옛경전이 소장되어 있고 황간의 소도 송대 이후에는(이부분은 역자가 삽입한 부분) 그 행방을 몰라 중국에서조차 구해볼수 없었던 것인데 아시카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에 놀람을 표하고 있다. 동도(東都)사람인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글 세편을 읽어보니 식견이 좁고 궁벽하여 외졌던 과거의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 글이 우아하고, 명나라 때 문장을 천하에 20년간 떨쳤던(이 부분도 역자가 삽입한 부분) 이반룡(호滄溟)의 글 짓는 격식도 따라하지 않을 정도여서 중국의 어느 다른 작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추사는 시노모토 렌(篠本廉)를 극찬한다. 다산과 추사 모두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글이 조선을 능가할 경지에 와 있다고 공통되게 기술하고 있다. 유배지에 있던 다산과 추사가 처한 상황은 서로 달랐지만 대마도 사행에서 건너 오게 된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저술에 대한 평가는 유사한 점이 많이 보이고 있다. 다산의 큰아들 정학연과 교분이 두터웠던 추사가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글을 정학연에게 다산이 읽은 시점보다 먼저 소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먼저 읽고 두 아들들에게 시노모토 렌(篠本廉)의 문장에 대한 품평을 보냈기 때문이다. 강진에서 다산은 그의 제자 이강회이름으로 추사에게 서신을 보낸 적이 있다. 이 서신이 시노모토 렌(篠本廉)과 관련 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다산과 교류가 있었고 평소 다산을 추사가 흠모해 마지않았으며 다산의 제자 황상에 까지 친분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추사가 신미사행의 결과를 강진의 다산에게 인편으로 전달하거나 평소 친분이 있던 해남 종택의 윤두서 일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도록 하였을 개연성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되는 과정에서 강진에 들러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다산의 제자 황상을 만난 것은 당시 서울 장안에 문인들 사이에 큰 화제 거리였다)
다산보다 12살 연상이면서 김조순의 추천으로 63세에 대마도 사행을 수행했던 이명오가 다산에게 시노모토 렌(篠本廉)관련 서적을 직 간접적으로 소개해 주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이명오는 다산과 정학연과도 교류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친의 신원을 탄원하다가 다산보다 먼저 3년간 강진에 유배생활을 했다. 강진의 해남 윤씨와 친분이 있던 이명오에의해 시노모토 렌(篠本廉)관련 서적이 해남윤씨 일가에게 전달되어 다산에게도 그 서적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을 수도 있다. 정황으로 보면 다산은 추사와 그리 크지 않은 시간편차를 두고 에도후기 일본유학자들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 직접 논평하고 있는 것이다.
9) 학이편 배움(學)에 대한 다산의 분석
다산은 학이편의 學을 분석한다. 보왈(補曰)의 형식을 취하는데 보(補)는 다산이 논어에 주석을 달면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7개의 유형중하나이다 . 보왈(補曰)은 기존의 언어, 어구, 내용 해석에 있어서 미진하거나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를 다산자신의 관점에서 약술하는 형태를 취한다. 학은 본받는 것이라고 다산은 말한다.(學, 受敎也). 이 부분은 주자의 學에.대한 해석을 다산이 수용하고 있다(學之爲言效也). 그러나 학(學)이 배움이라는 주관적인 내면화의 단계를 넘어서서 학(學)이 지향하고 도달해야할 도(道)를 학습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없다고 다산은 말한다. 전한(前漢)시대 가의(賈誼)가, 자신의 저술 신서(新書)에서 19세가 되면 소학에 들어가서 소도를 학습하고 머리를 상투틀고 대학에 들어가면 대도를 학습한다(年九歲入就小學 , 蹍小節焉 業小道焉 束髮就大學,蹍大節焉,業大道焉<新書> )고 주장한 것은 학(學)의 외연을 지나치게 확장 한 것이라고 다산은 비판한다. 십오 세에 배움에 뜻을 세웠다고 술회하고 있는 공자에게서라야 도를 학습하는 업도(業道)것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기>편에 서도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다 ”(人不學, 不知道)고 언급되어 있듯이 학(學)은 지도(知道)의 영역으로 이행해나가는 최초의 단초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이다. 학(學)이라는 배움의 과정에서 지(知)라는 앎의 영역으로 직접이행 할 수는 없는데 이 두 과정 사이에는 익힘(習)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다산에게서 배움이란 앎(知)을 위한 것이고 익힘(習)은 그 앎을 실행하기위한 것이므로 배움과 그 배운 바의 익힘은 동시에 수반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배움>과 <익힘>은 각각 별개의 두 자립적 개념이다. <익힘>을 수반하지 않은 <배움>은 진정한,<배움>이 될 수 없는데, 다산은 후세의 배움이 기쁘지 않은 것은 <익힘>이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칼 야스퍼스는 공자를 언급하는 그의 저술에서 이러한 <배움>을 <진정한 배움 true learning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영어
10) 다산에게서 익힘(習)의 문제
<익힘習>은 배운 것을 익히는 것(習,肄業也 )으로 다산은 풀이 한다. ,<배움>은 시간적으로 <익힘>에 선행한다. 양백준은 배움(學)과 익힘(習)의 관계를 시간적 후행의 관계로 병치시켜서 번역한다(学了,然后) .
子⑴曰:“学而时⑵习⑶之,不亦说⑷乎?有朋⑸自远方来,不亦乐乎?人不知⑹,而不愠⑺,不亦君子⑻乎?”
【译文】孔子说:“学了,然后按一定的时间去实习它 ,不也高兴吗?有志同道合的人从远处来,不也快乐吗?人家不了解我,我却不怨恨,不也是君子吗?”
<배움>은 <익힘>에 시간적으로 선행 할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선행한다.<배움>이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은 <익힘>을 통해서 <배움>이 완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독립적 개념인 <배움>과 <익힘>사이의 간극은 학습자의 직접적 수행에 의하여 좁혀지고 종국적으로 <배움>은 <익힘>에서 완성된다. 양백준이 시간적 전후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율곡의 언해본은 <배움>과<익힘>의 관계를 하나의 <일반명제>처럼 번역한다.
子ㅣ 曰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ㅣ 샤 야 시로 습면 열홉디 아니랴
<야>와 <습면>의 관계가 시간적 선행의 측면이 다소 약화되면서 <배우고 익힌다는것>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언해본 이 부분을 <배우고 난 후에 익히면>으로 번역하면 다소 이상하다.
11) 배움(學)과 익힘(習) 사이의 시간(時)의 문제
이제 배움과 익힘 사이에 시간의 개입과 이 시간(時)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다산은 두 가지 관점에서 시(時)를 분석한다. 그 첫 번째는, 시습(時習)이란 때에 맞추어 익히는 것이라고시습(時習)을 설명하면서(時習,以時習之也 ) 시(時)를 이시(以時)로 규정한다. 두 번째는 시(時)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時時習) 익히는 것이라고 다산은 규정한다(時習者, 時時習之也). 도올 김용옥은 <논어 한글역주>에서 어린아이가 서(書) , 수(數)는 할 수 있지만 사(射) ,어(御)를 할 수 없듯이 황간이 말하고 있는 신중시(身中時), 연중시(年中時), 일중시(日中時)의 삼시(三時)가 시간(時習)의 시(時)에 대한 해석으로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다산이 시습(時習)에서 시(時)를 주자의 학설에 치우쳐서 분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산이 황간을 반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산이 일찍이 약관을 이제 막 두 서너 해 넘긴 나이에(1784년, 정조 8년) 향사례를 행하고 정조가 극찬 했을 정도의 <중용 강의> 80여 항목을 지어 올렸다는 점과 강진 유배시절에도 23세 때 올렸던 <중용 강의>에서 <서학>등의 영향을 털어내고 미흡한 내용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중용 강의보(1814년)>를 완성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산이 중용 2장의 <시중(時中)>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산이 말하고 있는<시시습지(時時習之)>는 주자의 해석<旣學而又時時習之>에서 차용 된 것으로 보인다. 주자는 습(習)을 어린 새가 자주 나는 것처럼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운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시(時)의 의미 또한 이미 배우고 그 배운 것을 계속 한다는 것으로 분석했다. (보통 주자의<학이습지(時時習之)>는 때때로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다산의<시시습지(時時習之)>해석에 맞추어서 <계속해서>로 번역한다) 습(習)과시(時)에 모두 연속성과 반복성이 강조되어 있다. 다산의 <시시습지(時時習之)>는 그 용례에서 주자의 것과 차이가 난다. 학(學)이 습(習)에 시간적으로 선행한다는 사실은 습(習)이 학(學)을따라 필연적으로 동반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논리적으로는 습(習)이 후행적 으로 행해져야만 학(學)이 완성되는 것이지만 학(學)과 습(習)은 각각의 독립된 병립개념일 뿐이다. 이양자의 관계를 하나의 통일체로 매개하기위해 이 양자사이에 시간 간극을 최소화해야 한다. <혼정성신>을 배웠으면 바로 그 배운 그때부터<便自是日>, <혼정성신>을 익히고, 외우는 것을 배웠다면 외우는 것을 익히고, 활 쏘는 것을 배웠다면 활 쏘는 것을 익혀야 한다고 다산은 주장한다. <배움>의 내용과 시기를 선택 할 때는 <이시(以時)>로 하지만, 배운 후에는 <시시습지(時時習之)>를 통해 <배움>과 <익힘>사이에 간극이 동일화되거나 최소화해야만 정확한 의미에서 <시중(時中)>이 이루어 질수 있다. 성(誠)을 통한 성기성물(成己成物)을 평소 강조했던 다산은 읍중 제자 황상이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될 수 있습니까 ? 했을 때 근학(勤學) , 근학(勤學) , 근학(勤學)이라고 세 번이나 강조해서 훈육하고 있는데, <시시습지(時時習之)>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12. <배움(學)>에서 <익힘(習)>으로 그리고 다시 <기쁨(說)>으로
<배움>이 <이시(以時)>와<시시습지(時時習之)>라는 시간의 매개를 통해 <익힘>으로 이행한다면 ,<배움>은 완결성을 지니게 되고 <이시(以時)>와<시시습지(時時習之)>는 <시중(時中)>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배움의 완결성을 어떻게 확인하고 확증 할수 있을까 ? 어떤 경우도 배움의 주체는 자기 밖의 타자나 객체에 의존해서 배움의 완결성을 확증할 수는 없다. 공자는 배움의 완결성을 차가운 논리적 적합성으로 등치시키지 않는다. 이 완결성은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 속에서 확증된다. 그래서 주체는 기쁜 몸이 된다. <배우는 몸>에서 <익히는 몸>으로 그리고 <기쁜 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기쁜 몸>은 아직 자기 자신외의 타자에 의하여 <드러내 진 몸>이 아니다.
E. Bruce Brooks는 학이편의 습習을
이렇듯 객관화되어도 충분하지만 아직까지는 자기 자신의 주관적 감정영역에 머물러 있는 이것을 공자는 열(說)라고 칭한다. 단옥재에 의하면 열(說)은 열(悅)의 통가자(通假字)가 아니라 고금자(古今字)의 관계에 있다.
13) 논어에서의 기쁨(說)에서 주역에서의 기쁨(兌)으로 이행의 문제
다산은 공자의 열(說)을 주역의 <태괘(兌卦)>와 연결시켜 고찰한다. 일반적으로 논어의 텍스트와 주역의 텍스트가 중복 되는 경우에는 논어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주역 안에서 해당되는 부분을 함께 고찰하는 것이 보통의 관례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子曰 南人有言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恒其德 或乘之羞 , 子曰 不占而已<논어 자로편 3-22>”에서 < 불항기덕(不恒其德)>이라는 표현은 공자의 언설이 아니라 ,<주역 항괘 9-3>에 대한 효사에 해당된다. 이 경우 항괘와 관련해서 논어의 텍스트를 고찰할 수 있다. 그러나 오규 소라이, 다자이 슌다이, 주자를 비롯해서 논어의 학이편의 기쁨(說)을 분석하면서 어느 누구도 텍스트상으로 상호 내적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열說>과 <태괘兌卦>를 연관지어 분석하지 않았는데, 다산은 별도의 설명 없이 <열(說)>과 <태괘(兌卦)>을 상관개념으로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주역의 태괘가 위의 효가 열려 있고 쾌괘도 열려 있으므로 열과 쾌는 그 뜻이 서로 가깝다는 것이다. 다산은 ” 기쁜 마음으로 앞서서 백성을 이끈다“는 태괘 <단전>을 인용한다. 이처럼 다산이 논어텍스트에서 주역의 텍스트로 망설임 없이 이행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주역을 단순히 복서로서가 아니라 경세를 할 수 있는 <실천적인 윤리학>으로 독해가 가능 하다는 다산 자신의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 독해 방법 또한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효의 변화>에 주목하여 찾아냈고, 그 역사적 실증은 <주례>에서 찾음으로써 논리적 측면과 그 적용의 역사적 확증 모두를 성취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의 <효변설>의 적용 사례를 주역 <손괘>해석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주자는 손괘를 아래와 같이 분석한다.
本義 : 損은 減省也 爲卦 損下卦上之陽 益上卦上之陰 損兌澤之深 益艮山之高 損下益上, 損內益外 剝民奉君之象 所以爲損也
손(損)은 덜고 줄이는 것이다. 괘(卦)됨이 하괘(下卦) 상획(上)의 양(陽)을 덜어 상괘(上卦) 상획(上)의 음(陰)에 더하고, 태택(兌澤)의 깊음을 덜어 간산(艮山)의 높음에 더하니,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고 안을 덜어 밖에 더함은 백성을 깎아 군주를 받드는 상(象)이니, 이 때문에 손(損)이라 한 것이다.
주자도 소성괘 <간>과 <태>를 대성괘인 태괘(泰卦)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다. 태괘의 하괘는 양이 셋인 건이고 상괘는 음인 곤이다. 하괘 건의 구삼을 덜어 상괘 곤에 덧붙여 곤은 간이 되고 아래 건은 태(兌)가 되었다. 아랫것을 덜어 윗것에 더 했다는 의미를 보다 사실감 넘치게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 하고 있는 것이다. <괘변설>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주자의 관심은 태괘속의 획의 이동에 주목하여 손괘와 태괘를 고찰하는 데에 있다. 태괘속의 효의 이동은 괘들 사이의 변화를 설명하기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 한 것이지 효 그 자체의 변화를 주역을 해독 할 수 있는 보편적 방법론으로 간주하지는 않는 것이다. 다산의 방법론과 같이 손괘를 고찰함에 있어 <효변설>과 태괘의 물상을 손괘에 적용시켜 독해하면 주자의 손괘 해석과 상반된 해석이 도출 된다.
鏞案卦自泰來。下卦太實。乾三陽上卦太虛。坤三陰故損下而益上也。乾則爲君。說卦文坤其民也。虞氏云損益二卦。皆損君之富。損乾陽以益其民。益於坤然卦體以內爲我。外爲敵損我益彼。則謂之損。損我陽損彼益我。益下坤則謂之益也<與猶堂全書) > 第二集經集第四十一卷○周易四箋
손괘는 태괘에서 왔다. 하괘는 매우 실하다 건 양삼이다. 상괘는 매우 허하다. 곤 삼음이다 그러므로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태었다. 건은 임금이고 태괘의 글, 곤은 백성이다. 우씨가 말하였다. 손괘와 익괘 두 괘는 임금의 부를 덜은 것이다. 건의 양을 덜어서 그 백성에게 보탠 것이다. 곤에 보탰다. 하지만 괘체 안(內)은 내(我)가 된다. 괘채 바깥은 나와 대척점에 있는 상대방(敵)이 된다. 이쪽에 있는 내 것을 저들에게 보태는 것을 손(損)이라고 한다. 나의 양을 덜어 낸다. 저들에게 덜어서 나에게 보탠다. 아래 곤에게 보탠다 .즉 이것을 익(益)이라고 한다. 태괘 구삼이 주자의 관점에서 손괘를 분석할 때 단순한 양을 의미했다면, 다산과 같이 물상을 고려하면 하괘 건은 임금이 되므로 임금이 백성에게 도움을 준 것으로 독해된다. 주자의 <백성을 깎아 군주를 받드는 상(象)>에서 <임금이 백성에게 도움을 주는 상(象)>으로 손괘의 괘사가 전환 되었다.
다산은 “괘가 추이하고 효가 변동하지 않는다면 성인이라도 만물의 실정을 체득 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괘의 추이와 효의변동에 대한 독해를 통해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윤리적 선택과 결단을 인간 스스로 주체적으로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효변>은 구성되어지는 것이므로 <효변>자체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 할 수 없게 된다. 아암에게 다산이 <건초구>의 의미를 물었던 것도 <효변의 원리>를 전제하였던 것이고 초구나 초이, 초삼도 단순히 <효변>을 확인하기 위한 기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상수역학에서 지나치게 수에 치중하여 역을 독해하는 것도 다산은 반대한다. 괘사나 물상 그 자체가 길과 흉 또는 선과 악을 가늠하는 존재론적 위상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산이 사단칠정을 언급하면서 인의예지가 인간 몸속 오장육부에 있는 듯이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인은 오직 행위 속에서만 들어나고 판정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 길 흉 역시 구체적 행위 속에서 결정 되어 지는 것이다.
14.< 기쁨>과 <앎> 그리고 <무지의 폭로>
<익힘>을 통한 체화된 <배움>에서 나오는 <기쁨(說)>은 앎에 대한 자기 확신이면서 무지에 대한 고백인 동시에 지상에서 살아갈 <인륜적 생>에 대한 감정적 찬동인 것이다. 비로소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이 되는 길에 들어 선 것이다. 만약 어떤 <배움>이 자신의 무지를 폭로하게만 할뿐 <앎>에 대한 <확신>보다는 모멸감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학습자는 자신의 <무지>가 당혹스럽고 수치스럽거나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야스퍼스는 그의 저서
15).다산의 붕(朋)에 대한 분석
다산은 붕(朋)은 단순히 동문同門을 의미 하지 않는다고 포함의 주장을 반박한다. 공양전에서 동문(同門)을 붕(朋)이라고 한 것과 주례에서 스승을 같이한 경우를 붕(朋)이라고 한 것, 그리고 주자가 같은 무리(同類)를 붕(朋)이라 일컬 었던 것을 종합하여 다산은 붕(朋)이란, 뜻을 같이하고 마음이 합치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16) 다산의 <즐거움(樂)>에 대한 분석
다산은 즐거움을 분석하면서 집주에서 주자가 분석하고 있는 “열說은 밖에서 느껴 기쁜 것이고 낙(樂)은 안에 가득차서 밖으로 넘치는 것”이라는 언급을 차용하면서 낙(樂)은 심히 기쁜 것으로 분석한다. 열(說)의 영어 번역으로 학습자 주관에 머무는 기쁨이라는 의미에서
16). <기쁜 몸>, <화나는 몸>, 지(知 )의 문제
배움을 체화시켜 <기쁜 몸>, 즉 자신의 몸을 수기(修己)하였는데도 다른 타인이 그러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다면 나는 계속 <기쁜 몸>일수 있을까 ? 자신의 주관적 기쁨에 머물던 <기쁜 몸>은 타인이 알아주지 못할 경우 <기쁜 몸>에서 <화나는 몸> 또는 <낙심하는 몸(dishearten)>이 된다.--<낙심하는 몸>은 브루스 브룩크스의 번역이다. 정자가 불온(不慍)을 무민(無悶)으로 해석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다산은 수기(修己)뿐만아니라 자신을 이루어야 한다고(成己) 말한다. 자신이 성기(成己)했을 때 그러한 자기를 따르면 즐겁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성내지지 않는다고 다산은 말한다. 알아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 몸>은 이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진 몸>된 것이다.그러나 <배움>은 나 에게 있고 그것을 알아주고 안 알아주는 것은 타인에게 있다면 불온(不慍)해야 하는 것이다. 인부지(人不知)에 대한 반응으로써 자신의 감정은 열(說)이나 낙(樂)이 아니라 <불온(不慍)>인 것인데, 열(說)이나 낙(樂)이 그자체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긍적적 감정(感情)이라면 불온(不慍)은 <온(慍)>을 부정함으로써 성립하는 부정적 감정개념이다. 나의<배움>은 타자를 통해 평가 되어지고 나의 <기쁜 몸>은 타자들에게 <드러내지는 몸>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부지(人不知)에서 지知는 서경(書經)에서의 지知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나 제후 등이 관료를 구성하는 것과 관련된 정치적 승인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서경(書經)의 용례와는 다르게 논어에서 지(知)는, 천명을 아는 것<지천명(知天命)> , 안연처럼 하나를 듣고 열을 아는 것<문일지십(聞一知十)>,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온고지신(溫故知新)>등, 신비적인 인식능력과 통찰력 또는 논리적 추리능력에 이르기까지 지知의 의미가 많이 세분화되어 나타난다. 불온(不慍)은 <화를 참거나 억누르는 억제된 감정>이 아니다. 참고 억제하는 것은 <군자>가 지녀야 할 감정일수 없다. <배움>이 <성기(成己)>에 이르렀다면 이미 이 배움은 자기에 대한 인식, 즉 지기(知己)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부지(人不知)에서 알아주는 주체는 내가 아닌 타인(人)이었다. 만약 내가 인식주체가 되어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 ?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나는 불온(不慍)하면 되지만 내가 지(知)의 주체가 되었을 때, 지인(知人) 곧 <사람을 아는것>은 능력이 된다. 공자는 <인부지(人不知)>과 <지인(知人)>사이의 관계를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 할까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할까 염려하라”고 중재한다. <인부지불온(人不知 ,不慍)>의 소극적 감정으로부터 <지인(知人)> 적극적인 감정으로 지양된다. 염려해야 할 대상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식(知)의 주체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전환 되었다. 따라서 <지인(知人)>은 군자의 덕이 되고 그 능력이 된다. 번지가 공자에게 지(知)의 의미를 물었을 때 공자가 지인(知人)이라고 대답했던 그런 의미에서 지인(知人)인 것이다.
4. 학이편 텍스트의 구조분석
논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고전 중의 하나이며, 특히 학이편은 그 편재 상으로 일반인들에게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발화자>가 공자이므로 왈(曰)은 전체 문장의 주어가 되고 왈曰의 목적어가 되는 세 개의 서술형 포유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문장 <학이시습지 불역낙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주어 부분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가 되고 <불역낙호(不亦說乎)>가 술어가 된다. 문법구조를 강조해서 번역하면 <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는 것>은 <기쁜 것이 아니 겠는가?> 로 번역 될 수 있다. Bruce Brooks의 번역이 이러한 문법구조에 충실한 번역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부분에 관한 불어 번역과 라틴어 번역을 함께 기재해본다. 불어 번역과 라틴어 번역은 프랑스 성직자들에 의해 번역 되었고 그 시기도 1895년도라는 점에서 <제임스 레게>의 번역과 견주어 볼때 전문성이 떨어지고 카톨릭적인 색체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빌헤름 리카르트는 독일어로 논어를 북경에서 번역하면서 독일어로 번역된 논어 문장을 다시 역으로 한자로 다시 번역해서 그를 지도했던 중국 선생에게 다시 확인을 받았는데, 레게의 번역에 견줄 만하고 부분적으로는 레게를 넘어서는 정밀한 부분이 발견 된다.
<불어번역>
le maitre dit :celui qui cultive la sagesse et ne cesse de la cultiver, n'y trove-t-il pas de la satisfaction ?
<라틴어 번역>
Magister(confucius)ait : qui colit et omni tempore recolit illud,( qui sapienlium praecepta discit et exsequitur,indesinenter recolens discit et exsequitur ), nonne quidem gaudet ?
왈(曰)의 목적어가 된 두 번째 문장도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가 주어가 되고 <불역낙호(不亦樂乎)>가 술어가 되므로 문장 구조에 맞게 해석하면 < 먼 곳에서 벗이 찾아 오는 것>은 <즐거운 것 아닌가?>되고 마지막 세 번째 <인부지불온(人不知而不慍)>은 조건절이나 가정법 문장이 되고 <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를 주절로 구분 한다면, 만약 <사람이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 <화를 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 겠는가 ?>로 번역 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문장의 술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에서 군자君子를 명사술어로 간주해서 <군자답지 아니 한가>로 번역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특히 부정사 不가 형용사나 동사의 부정어로 쓰인다는 점에 착안하고 앞의 두 포유문 모두 불열(不說), 불락(不樂)의 형태로 부정사와 형용사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불군자(不君子)>의 군자(君子)를 형용사로 간주 할 수 있을 것이다. 빌헤름 리카르트의 독일어 번역만이 君子를 형용사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子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와 <불역열호(不亦說乎)>의 두 문장사이의 구조는 가설 관계의 복문인가 ? 아니면 원인관계의 복문인가? 아니면 전체 문장을 하나로 간주해서 진리사실로 간주해야 할까 ? 첫째 가설 관계라고 한다면 조건절이나 가정법을 의미해서 만약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힌다면, 기쁜지 아니한가로 번역 된다. 원인 관계라고 한다면 공자의 경험을 기술하는 것이어서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혀보니 그것이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기쁘지 아니 한가>가 된다. 세 째로 문장전체가 일반화되어서 진리사실을 의미한다면 <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는 것은 기쁜 것이아니가>로 번역 된다. 학이편 첫째 문장을 공자의 경험이나 가정에 근거해서 해석하기에는 공자의 언설을 폄훼하는 분위길 풍길 수 있다. 그래서 세 번째 번역처럼 두 문장의 관계를 일반화 시켜서 문장 전체로서 진리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제일 우세하다. 그러나 이 두 문장도 처음에는 <청각언어>로 발화되기 전까지 공자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경험을 한 후에 제자들에게 술회 한 것 일수 있다. 공자 자신의 경험담의 술회가 <시각언어>로 기표화 되면서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고, 그 다음에는 <배움>과<익힘>이 <기쁨>의 원인이나 전제가 되었던 주절과 종속절의 관계에서 <배움>과 <익힘> 그 자체가 <기쁨>이 되는 일반화의 단계를 지나 이제 누구나 마땅히 배우고 익혀서 기뻐야 하는 진리화의 단계까지 진행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시각언어로 최종적으로 기표가 마무리 되면서 공자의 케리그마가 덧 붙혀 진 것이다.
나가는 말
다산은 조선 성리학을 새롭게 경장해야 한다고 생각한 학자였다. 조선 성리학의 경학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퇴계는 유학을 주자라는 스팩트럼으로 조선에 안착 시켰다고 할 것이고 율곡은 그 조선 성리학의 기조를 가지고 조선 개국이후 200년이 지나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실천적으로 경장하려 했던 경세적 학자였다. 그러나 퇴계와 율곡에게서는 다산만큼의 울분과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율곡이 주장한 경장개념도 조선사회의 이론적 붕괴를 목도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이론을 요 순 임금처럼 선조가 선정을 통해 실현하면 계란이 쌓여져 놓여 있는 누란의 위험성도 극복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율곡이 언급 한 것이다.
다산은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한계를 직접 목도하고 강진유배지에서 확인한( 특히 다산시문집 4권, 5권) 절대 다수의 기층민의 핍절한 생활사를 경험하면서, 지배이념의 붕괴와 양반 관료체제의 부패, 세도정치의 횡횡으로 조선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끝내 망할 것이라고(必亡乃已) 단언 했었다. 그만큼 다산이 느꼈던 시대적 분위기는 엄중하고 처연했다. 다산 사후 70년이 지나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을 때 고종이 다산의 필사본을 통독하면서 “ 어찌 지금 나에게는 이런 신하가 없느냐 ! ”고 탄식을 했지만 다산의 유작을 비롯한 논어고금주는 당시에는 금서에 가까웠다.
<브로델>의 지적대로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학습되고 지금까지 <장기지속>된 텍스트 중에 <논어>만 한 텍스트가 또 있을까 ? 이 질문을 변형 시켜 다시 물음을 던져 본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장기지속>된 동아시아 경학사에서 <논어고금주>만큼 정밀하고 독창적인 분석이 몇 번이나 시도 될 수 있었을까 ?
필자는 적어도 다산은 주자의 논어이해를 넘어서고 있다고 본다. 그 각자의 대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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