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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늘이나 2
  • 정대현
  • 등록 2026-08-02 07:43:20
  • 수정 2026-08-02 07:51:50


"아마 오늘이나"— 이 여섯 글자는 우리 집 횃댓보에 수놓여 있던, 내 기억 속 가장 오래된 문자다. 예수의 재림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다는 어머니의 믿음을 담은 문구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문구 에 또 다른 해석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 어머니의 삶을 한층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는 창이 되어주 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한 여인, 문인순의 삶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실마리를 이 여섯 글자에서 발견하는 듯하다.


어머니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월정리에서 문재구 할아버지와 마일례 할머니의 첫딸로 태어났다

(1920). 시골 보통학교를 마친 뒤 열여섯에 큰 도시 전주의 성경여학교로 유학했고, 그곳의 한 부흥회에서 "아마 오늘이나"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고 했다. 이후 멀리 평양여자신학원에 진학했으나, 공부를 시작한 지 한 학기 만인 스무 살에 일본국 금융조합 서기 정규오와 결혼했다. 나는 그 첫아들로 태어났지만(1941), 공부를 그토록 좋아했던 어머니가 어째서 학업을 중도에 접었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정작 물어본 적은 없었다. 해방(1945) 이후 아버지는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고, 어머니는 목사 사모로 한평생을 살았다(2011).


내가 철학과의 젊은 전임강사가 되었을 무렵(1978), 영문과의 윤정옥(1925~2025) 교수는 이미 대학의 원로였다. 윤 교수는 이화여전에 입학한 것이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강점국 일본이 조선의 남학생을 군대 징집에서 예외로 두었듯, 조선의 여학생 또한 정신대 징집에서 예외가 될 것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여자학교 체제는 오히려 정신대 동원의 핵심 통로(channel)였다. 윤 교수는 주변의 강요로 정신대 자원서를 쓴 직후 학교를 자퇴했다. 훗날 다시 공부하여 영문과에서 가르치게 되었을 때(1953), '처녀공출'로 끌려갔던 여성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부채의식을 느꼈고,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1980)와 공론화로 이어졌다. 이렇게 표상화된 "평화의 소녀상"은 마침내 인류사 속 국가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은 나라의 광복을 찾았고 어머니는 개인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나라를 되찾은 기쁨보다, '아마 오늘이나'라는 이름으로 다가올지 모를 '젊은 여자 공출'의 공포로부터풀려난 해방감이 더 컸던 것 같다. 어머니는 곧바로 <애국부인회 구례지부> 활동에 뛰어들었고, 지부대표단의 일원으로 해방둥이 동생 명현을 등에 업은 채 서울 경교장의 김구 선생을 면담했다. 그리고 친필 서명이 담긴 사진 한 장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그것은 어쩌면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준 이'에게 바치는 감사의 표현이었을까?



공포가 걷힌 경험은 국가의 서사보다 훨씬 오래, 훨씬 깊은 개인의 자리에서 이어졌을 것이다. 공포의 근원은 해방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 공포가 새겨 놓은 존재론적 습관—"오늘일지도 모른다"는 긴장된 기다림의 자세—은 신앙의 언어 안에 스며들어 평생 어머니의 내면을 이루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표현은 강점국 일본의 <정신대>뿐 아니라, 강점국 청나라 시절의 <환향녀>,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미투>에도 두루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오늘이나"는 대한민국을, 나아가 세계의 모든 여성이 마주해 온 보편적 여성 조건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세 경우 모두 여성의 신체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힘—청의 병력, 일제의 전시 동원, 오늘의 권력 위계—에 노출되어 있고, 그 노출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실존적 상시성(常時性)의 공포가 자리한다. "아마 오늘이나"가 가리키는 것은 저마다 다른 권력 구조가 여성의 신체와 시간 위에 되풀이해 새겨 놓은 문법이다.


어머니의 삶은 이 문법이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좌표 위에서 어떻게 새겨졌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이면서, 동시에 그 문법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증언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2026.7.22


윤정옥 (1925~2025) 평화의 소녀상 (2011.12.14) 문인순 (1920~2011) 김구 (1876~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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