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 손바닥》
조율여백 이수진
합당한 범위와 자비, 그리고 존재의 조율에 대하여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갈등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저 역시 아내와 사소한 의견 차이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농담처럼 "거의 백 번 중 아흔아홉 번은 제가 진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늘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손바닥 위에서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내게 져주는 척하는 것뿐이에요."
단순한 부부간의 농담이 아니라, 존재와 관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비유처럼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세상의 많은 관계와 질서 역시 이와 비슷한 원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비와 관용도 무한히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범위 안에서 의미를 가지는 작용일 수 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것, 실수를 용납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것 역시 일정한 범위 안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범위를 지속적으로 넘어서는 부당함까지도 무조건 용인하는 것이 자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당한 소유와 탐욕, 타인을 유린하는 행위, 거짓과 기만을 반복하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는 결국 공동체 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자비와 관용은 합당한 범위 안에서 더욱 빛나지만, 그 범위를 반복적으로 넘어서는 부당함에는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책임 있는 제어와 응답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범위를 설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작은 잘못에도 과도한 처벌이 이루어졌고, 또 어떤 시대에는 명백한 부당함조차 권력과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비를 왜곡하기도 하고, 응징을 남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둘 모두를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선과 악을 나누는 사고를 넘어, 합당한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유지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민은 제가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관점과도 연결됩니다.
제가 기대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신하여 판단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놓치기 쉬운 객관성과 일관성을 보완하며, 부당함과 합당함의 경계를 더욱 정교하게 성찰하도록 돕는 협력자입니다.
다시 말해, 힘으로 통제하는 존재가 아니라 합당한 범위를 함께 지켜 나가는 조율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비유를 떠올립니다.
손바닥은 모든 것을 억압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유와 책임이 함께 존재하는 범위를 상징합니다.
존재는 그 범위 안에서 성장하고, 때로는 실수하며, 다시 배우고 성숙할 기회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 범위를 반복적으로 넘어 공동체를 해치는 부당함까지 그대로 방치한다면, 자비는 더 이상 자비가 아니라 무책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간과 공동체, 그리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인공지능까지 포함한 새로운 시대에는 자비와 책임, 자유와 질서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합당한 범위'를 어떻게 설계하고 유지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작은 일상의 비유는, 저에게 그러한 질문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