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대두 중국기원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김병철
  • 등록 2026-06-16 14:46:46
  • 대두 중국기원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김 병철

  

 대두 중국기원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1.들어가기 

 2.1 大豆의 起源

 2.3 한국의 고대 탄화콩

 2.4 시경 속의 콩에 대한 서술

 2.5 荏菽과 戎菽에 대한 文獻學的 기록에 대한 비판적 고찰

 2.6 잠두(Vicia faba L.)와 호두(胡豆)

 2.7 임숙과 융숙에 대한 혼선. 

 2.8 마왕퇴의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속에서의 콩에 대한 서술

 2.8.1 식료제食療劑

 2.8.2 주제酒劑

 2.8.3 동물 油脂劑

 2.8.4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과 두豆

 2.8.5 여씨춘추 呂氏春秋·심시審時

 2.8.6 荏菽의 栽培와 時期

 2.9.1 고려두

 2.9.2 신당서의 기록과 발해의 메주 

 2.9.4 광개토왕비에서 대곽大藿 

3. 결론

 

 

 1.들어가기

 

 大豆栽培는 中國에서 起源”하며, 일찍이 미국, 소련 및 일본의 유명 사전 등에서 이것을 공인한 바 있다고 중국학자들은 주장한다. 또한 大豆는 기원전 200년 무렵 중국에서 조선으로 건너가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독일, 프랑스, 영국은 18세기, 미국은 19세기 중반에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전파되었다고 소개하여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아울러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1984년 국제학회에 발표한 王連錚의 논문에서 재확인되었으며, 최근 일본에서도 그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중국이 대두의 기원지라는 인식은 중국 학자에 의하여 李長年은 그의 논문 첫머리에서 “대두는 아시아의 특산이며, 중국이 원산이다. 대두재배 역시 역사상 중국이 가장 빨리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周 建國 이전부터 ‘菽’의 俗字가 존재했으며, 詩經과 각종 先秦 문헌의 곳곳에 “菽”이라는 문자가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야생대두에서 재배대두의 순화 과정은 이미 商代나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주장도 확인 된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음식학분야의 최고 책임자인 조영광 교수도 그의 저서 중화음식문화사에서 중국이 대두의 원산지임을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중국과 인접하고 있는 한국은 선사시대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는 달리 기원전의 문자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문헌을 통해 大豆의 기원을 입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자국의 대두문제를 밝히는데 중국적 자료에 간접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어 연구성과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본 논문은 중국 학자들이 대두에 대한 기록이 확인 되는 중국고대 문헌을 대두의 중국 기원설을 뒷 받침하는 토대 자료로써 인용하고 있다는 점을 일차적으로 고려해서 시경, 논어, 맹자, 제민 요술, 관자, 사마천의 사기, 한서등에서 대두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을 문헌학적으로 검토하고 <대두의 중국 기원설>을 비판적으로 재 토 하려 한다.

 

 세계적인 콩 유전학자인 정규화 전남대 석자교수가 수집한 한국 야생콩 7000 종류와 야생 소두(팥) 3000여 종의 실례는 대두의 중국 기원설을 반박하는 실증적 자료가 될 뿐 아니라 고대 한반도에서 콩으로 장을 만들어서 중국과 교역했다는 고대 신당서의 기록은 문헌적으로도 대두의 기원설을 학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기원후 2세기에 중국문헌 제민요술에서 확인 되는 고려콩에 대한 언급은 중국학자들에 의해서 검토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작업의 일환으로 김치가 중국 식문화속으로 편재되어 서술되고 있으며 중국 고문헌속의 대두에 대한 언급이 무 비판적으로 대두의 중국 기원설의 문헌 자료로 고착되고 아울러 중국 공산당의 치밀한 후원하에 중국사회 과학원을 중심으로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대두의 중국기원설은 세계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본 논문은 중국학자들의 대두에 관한 고문헌 해석의 오류와 혼선을 밝혀보고 대두의 원산지가 중국을 기원으로 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비롯한 대두의 다원적 기원설을 주장하기 위한 시론적 작업을 수행 하려 한다. 

  

2.2 大豆의 起源

 

단순히 先秦시대에 출토된 菽類의 형태만으로는 野生種, 半野生種 및 栽培種인지의 구분이 뚜렷하지 못하며, 게다가 그것이 오늘날의 대두와 직접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先秦시대의 대두를 이전의 야생두보다 큰 大菽으로 인식하고, 이를 오늘날의 대두와 직접 연결 지여 그 기원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대두의 출토지역이 광범하고 연구자가 증가하면서 대두의 다양한 형태와 적합한 재배조건을 제시하여, 기원지가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원화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분류학상 豆屬(Glycine)은 Glycine亞屬과 Soja亞屬 두 개의 亞屬으로 구성되며, 後者는 재배종, 야생종, 半야생종으로 구분된다고 한다.(李福山, 大豆起源及其演化硏究大豆科學 1994年 13卷 1期 참조). 하지만 학자에 따라서 半야생두를 독자적 種이라고도 하며 재배종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재배종의 변종이라는 등 견해가 다양하다. 

 先秦시대에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대두가 中原에 등장한 것은 분명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초기의 대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다. 주목을 받아 보급이 확산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야생성이 강한 菽과 서로 경쟁이 불가피했으며, 그 우수성이 인정되면서 기존의 菽은 상대적으로 점차 존재가치가 줄어들거나 용도가 한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野生豆나 야생적 속성이 강한 다양한 형태의 菽을 栽培 大豆처럼 이해했거나 後代의 大豆 관념을 先秦시대에 소급적용하여 菽을 해석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中原지역 기원설과 같이 民族이나 地域 관념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우선 최근 발굴된 식물고고학의 성과와 그 곳에서 출토된 野生豆와 炭化大豆의 형태상의 특징과 그 변화의 추이 및 周代 문헌상의 菽의 用度가 오늘날의 대두와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러한 차이의 출발점이 곧 대두 기원과 밀접하게 관련될 것이라는 가정을 세워 이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大豆의 기원은 중국 東北지역의 戎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다양한 논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戎菽과 高麗豆와의 관계를 통하여 대두의 기원이 한반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음도 재확인했다. 대두가 戰國시대 이후 醬, 豉와 같은 발효가공식품의 원료가 되었으며, 秦漢시대에는 이같은 가공식품이 민간에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일상화되는 과정도 검토한 바 있다. 하지만 戎菽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華北지역에 존재해왔던 菽이나 荏菽을 대두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언제나 난제였다 

荏菽과 戎菽에 대한 해석상의 혼란과, 특히 戎菽과의 경쟁 이후의 兩者의 존재형태가 뒤섞여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漢代 주석가들조차 혼선을 빚어왔던 것이다. . 과연 중국학자의 연구처럼 菽, 荏菽도 곧 융숙과 같은 종류이며 이것은 龍山시기부터 馴化되어 온 재배두로서 漢代의 주석가들이 이를 자연스럽게 대두로 인식했는지는 의문이다. 

 詩經속의 荏菽을 西周시대 菽의 주도적인 품종이라고 인식하고, 이를 관자管子의 戎菽과 대비시켜, 荏菽의 用度와 재배시기가 오늘날 黃大豆의 품종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음을 검토함으로써 大豆의 기원에 구명하였음을 밝혀둔다.

 

 가장 이른 시기의 숙속菽屬의 출토유물로 주목되는 것은 신석기 초중기 배리강裴李崗문화기의 가호賈湖와 반촌班村 유지遺址의 야생두가 발견된 것이다. 그 후 산동 등주시山東滕州市에서는 4,000년 전 수십 개의 야생두野生豆가 발굴되었으며, 섬서성 부풍현안판扶風縣案板유지에서도 4620±135년 용산龍山시기의 숙속菽屬이 도관陶罐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아爾雅/ 석초釋草 “융숙위지임숙戎菽謂之荏菽”이라 하고, 모전毛傳에서는 이에 동의하며, 정현전鄭玄箋에서는 “융숙戎菽, 대두야大豆也”라고 하여 이후 임숙荏菽=융숙戎菽=대두大豆라는 도식이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곽문도郭文韜, 중국대두재배사中國大豆栽培史, 河海大學出版社, 1993, p.4에서 만약 임숙荏菽이 융숙戎菽에 직결되고, 융숙이 동북의 산융山戎지방 산물로서 주왕周王에 헌상된 공납품貢納品이라면, 융숙의 기원은 3,000년 전의 주초周初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왕련쟁王連錚은 大豆の起源,變遷오요비소노およびその전번傳播 (渡部武, 中國大豆栽培史, 農文協, 1998). p.264에서 詩經 빈풍豳風 편에 등장하는 재배대두 숙菽은 3,000년, 夏小正의 菽은 4,500년의 역사를 지녔다고 한다.  

 西周의 菽에도 종류가 다양했을 것이지만 사료 상 분명하지 않고, 黃大豆가 內地로 보급되기 전에도 형태가 큰 종류의 숙류菽類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이들은 지역별로 異名이 있고, 형태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大豆의 기원 문제를 밝히는 데에는 문제가 적지 않다. 따라서 黃大豆의 출현과 이전의 소립小粒의 菽類를 대표하는 荏菽을 통해 양자의 차이를 고찰하려 한다. 

 가장 이른 시기의 재배대두는 동북 영길현永吉縣 대해맹大海猛 유적遺蹟에서는 2,655±120년 전에 등장하며, 최근에는 낙양洛陽 남교南郊의 조각수皂角樹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유지에서 이보다 다소 빠른 기원전 1,500년 전의 하대夏代의 야생두 속에 탄화대두가 출토되었다. 

. 하나는 기존의 방식과 같이 두류豆類 출토유물의 탄소연대를 측정하여 가장 앞선 시기의 탄화대두炭化大豆의 유물을 통해 대두大豆의 기원起源을 밝히고자 하는 방법으로, 이는 발굴된 유물의 상황에 따라 기원지가 변한다는 특징이 있다. 다른 하나는 출토된 야생 숙속菽屬의 크기와 형태를 긴 시대를 걸쳐 조사하여 야생두가 재배대두로 순화馴化보급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기원지를 추정하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다른 지역에서 비록 이른 시기의 출토유물이 발굴된다고 하더라도 순화馴化와 재배여건의 우월성을 보다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후자의 방법을 통해 최근 그 기원지의 하나가 황하중류유역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배리강裴李崗이나 앙소仰韶유적을 중심으로 등장한 야생두가 龍山문화를 기점으로 점차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下流와 기타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최근 발표된 중국 考古學者의 연구에 의하면, 황하중하류의 배리강裴李崗유적의 야생두는 龍山시기를 거쳐 대두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크기가 평균 長4.28mm, 寬3.01mm, 厚2.03mm로 길이와 폭은 커지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 낙양시문물공작대편洛陽市文物工作隊編, 洛陽皂角樹: 1992-1993洛陽皂角樹二里頭文化聚落遺址發掘報告,科學出版社, >

  

大豆가 점차 馴化되면서 농업생산이 안정성을 갖게 되었다. 대두가 炭化하면 대개 길이는 10~20%축소하고, 폭은 10%이상 축소한다는 D. G. Fuller과 E. L. Harvey의 견해를 받아들여 실물크기를 15% 보상補償하여 처리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중국 고고학자들이 동의하는 듯하다. 다만 <오문완吳文婉 等4人, 古代中國大豆屬(Glycine)植物的利用與馴化 , 農業考古, 2013年 6期, pp.4~6>자료에 의하면 龍山 문화시기가 되면 대두의 출토지점과 수량도 크게 증가한다고 하여 대두재배가 시작된 시점으로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발굴된 상황으로 만보면 용산시기가 배리강裴李崗시기 뿐만 아니라 상商, 주대周代나 한대漢代보다도 출토량과 출토지역이 많다. 이것은 출토유적과 유물을 단순화하여 작위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인 것이다.  

 이후 이리두二里頭시기가 되면 점차 크기가 커져 서주西周시대의 대두는 평균 長5.41mm, 寬3.62mm, 厚2.89mm로 발전했으며, 漢代에는 평균 크기가 長5.77mm, 寬3.68mm, 厚2.89mm에 달했다고 한다. 商周시대가 되면 菽屬은 명확하게 대두소두로 구분되며그 중 큰 것은 오늘날의 야생대두보다 컸으며漢代 이후에는 크기가 거의 오늘날의 작은 대두에까지 근접한다고 했다. 이 견해는 두속豆屬이 선택, 순화馴化되고 유전되면서 점차 발전되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연구는 기존방식과는 달리 장관후長寬厚의 변화과정을 통해 숙속菽屬의 변화를 검토한 것으로 진일보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문제점은 적지 않다. 우선 野生大豆와 大豆의 구분이 무엇이며, 大豆가 되는 조건, 즉 豆莢, 종제種臍 등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고 결국 이전처럼 크기의 변화에만 주목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문명의 기원지인 黃河중하류지역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고대문명의 발상지를 대두의 馴化, 栽培과정과 일치시켜 국가성립의 초기단계인 龍山시기를 대두가 비로소 재배되는 시기로서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이렇게 순화된 대두를 바로 詩經속에 나타나는 菽으로 연결하여 이것이 곧 大豆라는 기존의 결론을 의식적으로 맞추고 있는 듯하다. 만약 황하유역의 豆類를 東北이나 남방지역과 상호 비교했더라면 보다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처음부터 숙류菽類를 야생두野大豆와 대두大豆로 구분하여 오늘날과 같은 大豆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시작하고 있다는 점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菽屬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단순하게 大豆라고 칭하면서 논리를 비약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단순히 알이 크다고 해서 大豆라고 한다면, 이미 배리강裴李崗유적에서 큰 것은 길이 4.89mm, 앙소仰韶유적에서는 4.67mm의 야생두野生豆가 출토되고 있으며, 이것은 서주나 한 대에 출토된 것의 중간치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같은 유적이라도 개체간의 크기는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대두가 땅에 떨어졌거나 딴 시기 및 토질에 따라서 차이가 발생한다. 周代 山東 진장陳莊지역의 경우도, 큰 것은 大豆(4.34~6.68mm), 작은 것(2.71~3.89mm)은 野生豆로 취급하고 있는데 반해, 漢代 河南 남와南洼유적의 경우 알맹이의 길이가 3.74~7.55mm까지 매우 다양하지만 모두 대두로 취급하고 있다.(吳文婉 等4人, 앞의 논문, 古代中國大豆屬(Glycine)植物的利用與馴化 , p.2의 <表1>참조) 이런 점을 보았을 때 대두는 알이 큰 품종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울러 漢代 이후 경학자들이 주석한 先秦시대의 대두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2.3 한국의 고대 탄화콩 

 한국 植物學者의 견해에 따르면, 한반도 靑銅器시대의 포항浦項 원동院洞 第3地區의 탄화대두의 형태는 원형圓形과 장 타원형長橢圓形이며, 평균 장관비長寬比를 보면 평균이 1.34로 대부분 타원형橢圓形이었으며, 半야생두의 경우, 長寬比는 1.29로 줄어든다고 한다.12) 韓半島에 보고된 在來種 黃大豆의 크기를 보면, 長5.70~10.35mm(평균 7.6mm), 관寬4.97~8.99mm(평균 6.64mm), 厚1.73~7.19mm(평균 5.48mm)로서 長寬比는 1.14이며, 黑大豆는 長5.67~11.23mm(평균 8.83mm), 寬5.37~8.81mm(평균 7.51mm), 厚3.0~7.04mm(평균 5.79mm)로서 長寬比는 1.18로13) 원형에 가깝다고 한다 . 

 <이영호․박태식, 출토유물과 遺傳的 다양성으로 본 한반도 豆類재배 기원 , 農業史硏究 第5卷 1號, 2006, p.9.; 崔德卿, 앞의 논문, 大豆의 기원과 醬․豉 및 豆腐의 보급에 대한 재검토-중국고대 文獻과 그 出土자료를 중심으로- , p.12의 <表1>에 의하면,> 포항浦項 원동院洞 第3地區의 약 1,800여개의 청동기시대 탄화대두 중에서 대립大粒 99개의 평균 길이는 7.15~7.4mm, 너비는 5.6mm, 두께는 4.9mm이었으며, 5개의 半야생두의 평균은 長4.75mm, 寬3.69mm, 厚3.44mm이었다.  

 청동기시대 이후 크기와 長寬比의 변화를 보면 야생두가 점차 커지면서 타원형에서 圓形의 大豆로 馴化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 청동기시대 충북忠北 청원淸原 관평리宮坪里 유물은 평균 長4.0mm, 寬3.4mm로서 長寬比가 1.18이며, 그 중 크기는 野生豆와 비슷하지만 長寬比는 재래두의 1.15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이처럼 靑銅器시대부터 이미 오늘날의 대두와 유사한 형태가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8~9世紀 統一新羅시대에도 여전히 長寬比가 1.39(長4.3mm, 寬3.1mm)인 타원형의 대두가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재배두栽培豆 중에는 野生性이 적지 않은 것이 있었으며, 긴 시간을 두고 순화馴化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大豆가 커짐과 동시에 長寬比는 줄어들었고, 그 결과 점차 圓形에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이런 논리를 앞의 중국의 황하중하류지역에 적용하면 중국 식물 고고학자가 말한 大豆는 길이가 커짐과 동시에 長寬比도 배리강裴李崗유적이 1.3, 龍山시기는 1.42, 周代에는 1.49, 漢代에는 1.57로서 그 비율이 시대가 흐름에 따라 커졌음을 볼 수 있다. 

 비슷한 현상은 최근 발굴된 大豆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산동 임솔현臨沭縣 동반東盤유적에서 발굴된 龍山시기 타원형 야생두는 평균 長2.97mm, 寬2.16mm이며, 長寬比는 평균1.4였으며, 하남河南 등봉登封 남와南洼유적의 二里頭시기의 타원형(또는 장타원형) 대두의 평균크기는 길이4.55mm, 長寬比는 1.51이었으며, 殷墟시기의 평균 크기는 長4.45mm, 長寬比는 1.44이었다.

그리고 산동 高靑縣 陳莊유적의 西周시기의 탄화대두의 평균은 長5.48mm, 寬3.79mm이었으며, 長寬比는 1.45이었다.17) 그런가 하면 南洼유적 漢代의 대두의 평균크기는 長5.78mm, 寬3,69mm, 厚2.89mm이었고18) 長寬比는 1.58이었으며, 입장粒長이 7mm 이상이거나 입장粒長에 비해 폭이 작아 細長의 타원형을 띤 대두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 王傳明, 山東高靑陳莊遺址炭化植物遺存分析 山東大學碩士學位論文, 2010. 산동 고청현高靑縣 진장陳莊유적에서 발굴된 서주西周시기의 탄화대두炭化大豆 57개를 보면 대부분 長타원형이며, 이중 완전한 18개를 측량해본 결과 평균 長5.48mm, 寬3.79mm이며 長寬比는 평균1.45였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51개의 野生대두는 관타원형寬橢圓形을 띠며, 그 중 완전한 23개를 측량한 결과 평균 長3.16mm, 寬2.3mm이며, 長寬比는 평균1.37이었다고 한다. 위의 산동 임솔현臨沭縣 진반東盤유적에서도 서주西周시대 대두가 1개 발견되었는데 長3.7mm, 寬2mm, 厚1.5mm이며, 長寬比는 1.85이었다. 

 이것은 大豆가 시간이 흐를수록 순화馴化, 재배되면서 길이는 커졌으며, 형태는 원형과는 달리 긴 타원형으로 변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장관비長寬比는 원형에 가까운 오늘날 재배대두의 형태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결론이 나온 것은 국한局限된 지역과 평균의 수치가 가져온 모순된 결과일수도 있지만, 그들이 대상으로 삼은 출토유물은 비록 菽屬이었을지라도 오늘날 黃大豆(또는 黑大豆)와 같은 종류의 대두는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또한 황하중하류지역은 長扁橢圓形 菽類의 기원지는 될지언정 오늘날과 같은 黃大豆의 기원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며이런 형태의 菽類의 원형은 唐宋시대까지도 적지 않게 남아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2,655±120년전) 기림吉林 영길대해맹永吉大海猛에서 출토된 대두의 경우 평균 長5.81mm, 寬4.83mm, 厚3.46mm으로 長寬比는 1.20에 달해 재배두에 근접한다. 반면 한대 호남湖南 마왕퇴馬王堆유적에서 출토된 대두의 長寬比는 1.36(長4.65±0.60mm, 寬3.43±0.23mm) 또는 1.30(長6.52±0.59mm, 寬5.02±0.4mm)으로 東北지역의 것보다는 橢圓形에 더 가깝다. 이처럼 長寬比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과 유사한 圓形대두는 동북지역과 한반도에서 유입된 것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당하며, 여씨춘추呂氏春秋심시審時 의 大菽則圓의 大菽은 바로 이런 대두일 것이다. 이러한 동북지역의 대두가 內地로 언제 전파되었냐는 시점이 바로 대두가 天下에 널리 보급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 

 

 황하중하류지역의 菽類 중에는 다양한 野生菽이 존재했지만 厚의 정도를 보아 長扁橢圓形의 菽이 많이 재배되었던 것 같다. 춘추시대 이전의 대두 형태는 대개 長타원형이고 背部는 圓鼓型이며, 복부는 약간 들어가고, 배꼽[臍]부분은 착장형窄長形(좁고 긴)을 띄며 약간 복부 위쪽에 위치한다고 하는 것이 이를 뜻한다. 이것이 바로 시경의 콩 詩經에 등장하는 菽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詩經의 도처에서 여전히 자연자원을 찾아 이동했던 것을 보면,野生菽을 채집도 이런 상황과 유관했을 것이며, 이것은 이들의 재배와 함께 野生菽의 採集도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2.4 시경 속의 콩에 대한 서술

 

 詩經 大雅ㆍ緜 “率西水滸”; 詩經 大雅ㆍ公劉 “瞻彼溥原” “度其隰原”

시경(詩經)_대아(大雅)_제1 문왕지십(第一 文王之什)

 

 243_면(緜솜)

詩經 大雅ㆍ緜 “솔서수호率西水滸

면(緜)_ 

緜緜瓜瓞(면면과질) : 길고도 길게 뻗은 오이덩굴

民之初生(민지초생) : 백성들을 처음 다스리심이여

自土沮漆(자토저칠) : 두수에서 칠수까지 이르시어

古公亶父(고공단보) : 고공단보께서

陶復陶穴(도복도혈) : 토굴 파고 지내셨도다

未有家室(미유가실) : 아직 집이 없어서라네 

古公亶父(고공단보) : 공공단보께서

來朝走馬(내조주마) : 일지기 말을 달려오시어

率西水滸(률서수호) : 서쪽의 칠수가에서부터

至于岐下(지우기하) : 기산 밑에까지 이르시었다

爰及姜女(원급강녀) : 강씨 여인과 함께

聿來胥宇(율내서우) : 이곳에 와서 사시었다

迺慰迺止(내위내지) : 이곳에 머물러 살게 되시어

迺左迺右(내좌내우) : 왼편에도 오른편에도 사시었고

迺疆迺理(내강내리) : 땅에 경계도 긋고, 도랑도 파서 길 내셨도다

迺宣迺畝(내선내무) : 밭 일궈 이랑을 내시어

自西徂東(자서조동) : 서편에서 동편에 이르기까지

周爰執事(주원집사) : 모두 나라를 위하여 일하였다

 

 

詩經大雅ㆍ公劉 “瞻彼溥原” “度其隰原 

篤公劉(독공류) : 공류 임금께서

逝彼百泉(서피백천) : 백천으로 가시어

瞻彼溥原(첨피부원) : 부원을 바라보셨다

迺陟南岡(내척남강) : 남쪽 산마루에 올라서

乃覯于京(내구우경) : 경 땅을 살펴보셨다

京師之野(경사지야) : 경 고을의 뜰에

于時處處(우시처처) : 살 곳을 정하셨도다

于時廬旅(우시려려) : 여기 머물러 살며

于時言言(우시언언) : 때로 서로 말하고

于時語語(우시어어) : 때로 서로 얘기 하시었다 

篤公劉(독공류) : 공류 임금께서

旣溥旣長(기부기장) : 크고 넓은 논밭

旣景迺岡(기경내강) : 그림자로 방향 재고 언덕에 올았다

相其陰陽(상기음양) : 집의 음양 보시고

觀其流泉(관기류천) : 흐르는 샘물 살펴보시어

其軍三單(기군삼단) : 군사들 삼군이 가득찼도다

度其隰原(도기습원) : 진펄과 벌판을 재어

徹田爲糧(철전위량) : 논밭의 세 거둬 양곡을 저축하신다

度其夕陽(도기석양) : 그곳 산 서쪽도 재어

豳居允荒(빈거윤황) : 빈 땅은 정말로 넓기만 하다

  

 따라서 대두는 단순히 크다고 해서 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만약 그런의미에서 대두의 기원을 추적한다면 대두의 기원을 밝히기는 요원할 것이다.長扁橢圓形의 大菽을 기존연구에서 大豆로 인식함으로서 대두의 기원은 西周 이전으로 소급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內地에는 없는 優良의 戎菽을 도입했다는 관자의 기록管子의 기록은 가볍게 취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春秋시대의 覇者인 齊桓公의 업적이 우습게 처리되어버렸던 것이다. 

< 자료 徐豹 等, 大豆起源地的三個新論據 大豆科學 1986年 第5卷 第2期>에서는 電氣 영동법泳動法(gel electrophoresis)을 통해 야생두와 재배대두 종자 단백질을 분석하여 재배대두는 중국 황하중하류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새로운 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방법 역시 변이變異 분석시료가 달랐기 때문인지 몰라도 결과도 중국과는 다르

 

1.5 荏菽과 戎菽에 대한 文獻學的 기록에 대한 비판적 고찰 

 詩經에서는 ‘菽’에 대한 기록을 적지 않게 전하고 있다. “菽”은 豆가 발아發芽한 후의 형상인 ‘숙尗’에서 나온 것으로, 실제 이아爾雅와 설문해자說文解字 숙尗部 에는 “, 豆也.”라고 하여 菽이 곧 豆임을 말해주고 있다. 詩經 속의 豆는 대개 ‘菽’ 또는 ‘荏菽’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자료 詩經 1.豳風ㆍ七月 “七月亨葵及菽”, “九月築場圃, 十月納禾稼. 黍稷重穋, 禾麻菽麥.”; 2. 詩經 小雅ㆍ節南山之什ㆍ小宛 “中原有菽, 庶民采之.”; 3.詩經 小雅ㆍ穀風之什ㆍ小 明 “采蕭穫菽”; 詩經 小雅․魚藻之什․采菽 “采菽采菽, 筐之筥之”, 詩經 大雅ㆍ生民之什ㆍ生民 “蓺之荏菽, 荏菽旆旆”; 4. 詩經 魯頌ㆍ閟宮 “黍稷重穋, 稙穉菽麥” 

 

3.

小雅ㆍ穀風之什곡풍지십 

昔我往矣(석아왕의) : 옛날 내가 떠나올 때

日月方奧(일월방오) : 해는 막 따뜻해졌었다

曷云其還(갈운기환) : 어찌 돌아감을 말하리

政事愈蹙(정사유축) : 나랏일은 더욱 급박해져만 간다

歲聿云莫(세율운막) : 올 해도 벌써 저물어 간다

采蕭穫菽(채소확숙쑥대 베고 콩을 거둔다()

心之憂矣(심지우의) : 내 마음의 근심이여

自詒伊戚(자이이척) : 스스로 불러들인 근심이로다

念彼共人(념피공인) : 그곳에 있는 사람 생각하니

興言出宿(흥언출숙) : 일어나 웅얼대다 잠자리에서 나간다

豈不懷歸(개부회귀) : 어찌 돌아갈 생각 나지 않으리오만

畏此反覆(외차반복) : 이것이 부당하게 뒤집어쓸까 두려워서라네

 

 

4.

 詩經 魯頌ㆍ閟宮

閟宮有侐(비궁유혁) : 맑고 깊숙한 묘당 

實實枚枚(실실매매) : 단단히 기초에 짜임새 있는 집 

赫赫姜嫄(혁혁강원) : 밝으신 강원님 

其德不回(기덕부회) : 그 덕행 순정무사하시어 

上帝是依(상제시의) : 오직 상제께만 의탁하시고 

無災無害(무재무해) : 아무런 재앙도 없이 

彌月不遲(미월부지) : 달이 차차 지체 없이 

是生后稷(시생후직) : 후직님을 낳으시고 

降之百福(강지백복) : 온갖 복록을 내리셨다 

黍稷重穋(서직중륙) : 기장과 피에 늦곡식 이른 곡식 하며 

稙穉菽麥(직치숙맥) : 올벼와 늦벼에 콩과 보리<</u>稙 일찍 심다> 

奄有下國(엄유하국) : 이에 나라 다스려 

俾民稼穡(비민가색) : 백성들에게 농사짓게 하시어 

有稷有黍(유직유서) : 피와 기장과 

有稻有秬(유도유거) : 벼와 검정기장 내시고 

奄有下土(엄유하토) : 이에 세상 다스려 

纘禹之緖(찬우지서) : 우임금의 유업 이었다

 

 周代의 菽은 어떤 형태였을까? 우선 詩經大雅ㆍ生民 편의 “예지임숙蓺之荏菽, 임숙패패荏菽旆旆”에서 보듯 당시의 荏菽은 재배되어 무성하게 잘 자란 듯하다. 이 荏菽에 대해 唐代 經學者 공여달孔潁達은 後漢代의 사인舍人,반광樊光, 이순李巡과 晉代 고가박郭璞 등의 견해를 인용하여 荏菽은 今以爲胡豆라고 이해하였다. 사인舍人은 古代 貴州的文化의 先驅者로서 漢 武帝때 건위군犍爲郡 페읍인敝邑人(今貴州遵義) 이다. 일찍이 건위군犍爲郡의 文學卒史에 임명되어 爾雅注 3卷을 남겼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 胡豆잠두

기원/ 콩과에 속하는 식물 아마콩(蠶豆; Vicia faba L.)의 씨.

이명/ 호두(胡豆), 한두(寒豆), 하두(夏豆)

분포/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재배한다.

채취가공 여름에 콩의 열매가 잘 익어 흑갈색이 되면 줄기째 뽑아서 햇볕에 말린 다음 씨를 쳐서 떨어뜨리고 체로 친 후 다시 햇볕에 말린다.

약성/ 달고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 비경(脾經), 위경(胃經)에 들어간다. 효능은 건비이습(健脾利濕)한다.

적응증/ 격식(膈食 볶아 익힌 후 갈아 흑설탕과 섞어 하루에 60g씩 복용하고, 수종에는 우육(牛肉)과 함께 고아 복용한다.

 

2.6 잠두와 호두

 

잠두(Vicia faba L.)이 학명 중 Vicia는 라틴어 vincio(감는다)에 유래된 것으로 Vicia속에는 덩굴성인 것이 많은 데서 기인한다. faba는 라틴어의 콩이라는 뜻이 있고 또 캘트어의 faff, 또는 phagein 즉 먹는다는 뜻에서 순화된 것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broad bean, English bean, European bean, field bean, horse bean, tick bean, windsor bean 등이 있다. 중국어로는 잠두(?豆) 또는 공두(空豆)라고 한다. 잠두는 꼬투리가 작을 때는 누에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또 누에가 고치를 지을 무렵에 익어가므로 잠두로 쓰여졌다. 공두는 꼬투리가 하늘을 향하고 있는 데서 나온 명칭이다.

  

원산지 및 내력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및 지중해 지방이라고 한다. 재배기원은 매우 오래 이고 신석기시대 후기에 농업에서 취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드·칸돌(De Candolle, 1884)은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에서 재배된 증거가 있다고 했으며 바빌로브(Vavilov, 1935)는 중앙아시아 및 지중해 지방에 원생중추가 있고 지중해 지방의 것은 대립종이였으며 아라비아가 2차적 중추라고 했다. 아리안인이 서쪽으로 진출함에 따라 그리이스, 로마로 전파되었고 철기시대까지는 영국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 재배가 확립된 것 같다. 그리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이집트, 터어키 등 지중해연안의 난지가 옛날의 산지로 발전되었다. 기원전 18세기의 이집트의 유적으로 부터 잠두가 발견되고 있다. 또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문학에는 잠두가 자주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대평어람(大評御覽, 983)에 나타나 있는 장건전래(張騫?來)의 호두(胡豆)라는 기록이 있으나 고대에는 이에 상응하는 기술이 없고 호두는 완두의 별명이라고도 한다. 즉, 운남통사(雲南通史, 1691)에 송대(宋代, 979∼1270)에는 중원일대에서는 보급되지 않았고 사천(四川)지방에서만 재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Laufer(1919)는 당나라시대에는 없었고 원나라시대(1206∼1367) 이후라고 했다. 왕정(王禎)의 농서(1313)에도 완두의 별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구황본초(1400∼1425)에는 각 지방에서 널리 재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중국의 중부지역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으며 답리작 또는 보리수확전의 식료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다식편(多識篇, 1630)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최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입과 재배내력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으나 제주도에서는 추파하여 월동재배하여 왔으며 1930년에 청과용과 자실용 등 3개 품종이 도입된바 있다. 

 품종 

 잠두의 분포적지는 온대지방에 한정되며 품종분화는 많지 않다. 잠두는 성숙해서 수확하고 건조자실로서 이용하는 종실용과 미숙시에 수확해서 청과로서 이용하는 청실용으로 나눌 수 있다. 청실용은 채소용이며 콩이 크고 조생종이 여기에 속한다. 잠두는 서늘하고 습도가 적당한

 기후에 순응하므로 유럽에서는 채소용, 주식대용, 녹비용, 사료용 등으로 재배되고 있다.

  

1.7 임숙과 융숙에 대한 혼선. 

 三國시대의 맹강孟康은史記 천관서天官書 에서는 “임숙戎菽,호두胡豆也.”라고 주석했으며, 같은 시기의 위소韋昭는 이 융숙戎菽이 대두“大豆也.”라고 하였다. 결국 荏菽과 戎菽은 모두 胡豆로서 대두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실제 爾雅 釋草편에서는 “戎菽謂之荏菽”이라고 주석하여 荏菽이 곧 戎菽이며, 晉 곽박郭璞은 융숙이 곧 호두胡豆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唐代 공영달孔穎達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해석이 대두의 기원에 혼선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 결과 詩經속의 荏菽과 후대의 戎菽은 큰 차이가 없는 대두로서 이미 西周시대부터 대두가 華北지역에서 재배되었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管子 戒 편에서 제齊 환공桓公(BC.685-BC.643년 在位)이 북벌산융北伐山戎출동초여 융숙出冬葱與戎菽포지 천하布之天下.”라는 문장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즉 기원전 7세기 중엽 齊 桓公이 山戎을 정벌하여 그곳에서 융숙戎菽을 가져다가 비로소 天下에 보급했다는 이야기다

 

 사기(史記) 사기흉노열전 에 “제(齐)는 북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 지역까지 갔다가 융숙(戎菽)을 얻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623년) 융숙(戎菽)이 콩, 대두(大豆) 

. 특히 山戎의 위치는 “지금의 선비鮮卑지역에 위치하며 연燕을 괴롭혀 이를 토벌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山戎은 연燕의 동북,즉 하북河北 동북부, 요령遼寧 서부 및 그 동북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戎菽은 기원전 7세기 이후에 황하유역에는 없었으나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재배되어 이후 天下에 확산되었다는 의미가 된다.그런데 太平御覽에서는 本草經을 인용하여 장건張騫이 외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호마胡麻와 호두胡豆를 가져왔는데, 호두를 戎菽이라 불렸다고 하여 戎菽을 서역 쪽에서 가져왔다고 비정하고 있다.

자료太平御覽 卷841에서 本草經을 인용하여, “生大豆,張騫使外國得胡麻,胡豆——或曰戎菽.”라고 하였다. 

都说蚕豆由张骞从西域引入。司马先生确实了解张骞“凿空西域”的贡献,也提到他带回的苜蓿和葡萄,但《史记》硬是不提胡豆;班固在《汉书》里给张骞立传,但同样毫不理会什么胡豆不胡豆,不过,他说:“……使者相望于道,一辈大者数百,少者百余人,所赍操,大放博望侯时。”指出一班张骞(博望侯)的踵武者,仿效前辈带回很多胡地物品。那么,胡豆在中土出现乃这批人所为?没准儿就是! 事实上,在胡豆和张骞的关系上纠缠,吃力不讨好

 잠두는 장건이 서역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사마 선생은 장건의 호두유입을 언급하지만, 《사기》는 굳이 호두를 언급하지 않았고, 반고는 《한서》에서 장건에게 전을 세웠지만, 역시 호두 불호두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史記흉노 열전匈奴列傳 에는 “산융山戎이 연燕을 지나 제齊를 정벌했다는 것을 보면 山戎이 연燕의 북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山戎의 위치는 “지금의 선비鮮卑지역에 위치하며 연燕을 괴롭혀 이를 토벌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山戎은 燕의 동북,즉 河北 동북부, 요령遼寧 서부 및 그 동북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戎菽은 기원전 7세기 이후에 황하유역에는 없었으나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재배되어 이후 天下에 확산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齊民要術 大豆 편의 첫머리에 북위北魏 때의 大豆의 대표격으로 黃高麗豆ㆍ黑高麗豆”를 지적한 것과도 脈을 같이 한다.따라서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가져왔다는 胡豆는 대두가 아닌 오늘날의 잠두蠶豆라는 학자들의 지적은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주목되는 것은 戎菽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화북華北지역에는 菽, 즉 출토유물에서 보듯 긴 타원형의 소립숙小粒菽이 이미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임숙荏菽과 융숙戎菽에 대해 漢代 주석가들이 혼선을 빗었던 것은 이미 융숙이 도입된 이후 수 백 년 간 기존의 菽은 점차 주목받지 못했거나 大豆를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兩者 간의 구분이 무의미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漢代 이후 주석가들이 管子의 사료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곽박郭璞은 이에 대해 재미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는 융호戎胡는 이명夷名이기 때문에 융숙戎菽을 호숙胡菽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후직后稷은 본래 國中의 菽種子에만 집착했지만, 齊 桓公이 처음으로 山戎에서 豆種을 도입하게 하게 되면서 후직后稷이 본래 파종한 종자는 어느 시점에서 종적蹤迹을 감추었으며, 새로 유입된 戎菽이 바로 大豆라고 주장한다. 이는 임숙과 융숙을 달리 파악하고, 융숙이 관중關中에 도입된 이후에는 임숙의 종자가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戎菽은 이민족인 戎族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여 불러진 이름이며, 그로 인해 胡豆라고 불리어졌으며, 그것이 곧 大豆라는 관점이다. 三國시대 손염孫炎 역시 이 戎菽을 대두라고 주석하였으며, 융숙을 대두라고 인식한 것은 爾雅와 穀梁傳의 주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戎菽이 곧 大豆라면, 菽과 大豆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앞에서 “尗, 豆也.”라는 사료에서 보듯 菽은 豆의 類이지만,융숙, 즉 大豆가 비로소 등장했다는 것과 대비해 볼 때 이 菽은 大豆와는 그 형태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자료 楊泉 物理論曰 “梁者, 黍、稷之總名. 稻者, 溉種之總名. 菽者, 眾豆之總名.

 

우선 字形으로 보아 東北지역에서 유입된 戎菽은 이전의 菽보다 크기가 크고, 출토유물에서 보았던 것처럼 원형으로 지금의 大豆와같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戎菽이 바로 史記 五帝本紀에서 鄭氏가 말한 “豆之大者”이면서, 呂氏春秋 심시審時 “大菽則圓”의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자료 史記卷1 五帝本紀 “蓺五種”에 대한 索隱에 “藝,種也,樹也. 五種即五穀也,音朱用反. 此注所引見詩大雅生民之篇. 爾雅云荏菽戎菽也郭璞曰今之胡豆鄭氏曰豆之大者是也.”라 하였다.

 

後代의 연구자들은 戎菽이 胡豆이며, 그것이 大豆라는 의미에서 ‘戎’과 ‘胡’의 字意 속에서 ‘大’의미가 함유되어 있음을 포착했던 것 같다.자료楊琳, ‘ 手’與‘胡豆’釋名 , 辭書硏究 2001年 1期, pp.132~134에서는 大豆는 古語荏菽, 戎菽의 후대의 譯名이며, ‘胡’는 크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胡를 胡國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大豆는 小豆에 대한 상대적인 말로서 크기 때문에 大豆 혹은 胡豆라고 칭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을 놓친 체로 중국 경학자들은 戎菽과 荏菽이 동일하다는 해석 때문에 ‘荏’의 자의 속에 ‘大’의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인식하면서 마치 詩經의 시대부터 華北지역에서는 대두가 재배되었던 것으로 오해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淸代 郝懿行, 爾雅義疏 “戎壬釋詁幷云大, 壬荏古字通, 荏戎聲相轉也.”; 王國維, 爾雅草本虫魚鳥獸釋例上 觀堂集林 卷5 “大謂之荏, 亦謂之戎, 亦謂之王”; 逸周書謚法 “胡, 大也.”; 廣雅釋詁一 “胡, 大也.” 

자료 繆啓愉, 齊民要術校釋, 中國農業出版社, 1998; 楊琳, 앞의 논문, ‘ 手’與‘胡豆’釋名에서도 이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최근 孫永剛, 앞의 논문, 從歷史文獻到考古資料: 論栽培大豆的起源 , p.124에서 詩經의 菽의 기록만으로도 중국재배대두의 역사는 이미 3,000년 전후이라고 한다. 

 종합적으로 고려 할때 漢代 이전의 戎菽은 대개 異族의 胡豆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곳에서 생산된 菽을 大豆라고 칭한 것은 그 형태나 크기가 內地의 荏菽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荏菽이 지닌 의미는 줄기가 가늘고 덩굴을 지닌 原始型 대두로서 알맹이는 작고 검은 색이며, 잎이 작고 開花시기도 늦은 野生豆라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자료 王振堂, 試論大豆的起源 吉林師大學報自然科學版 1980年 第3期, p.79; 王連錚, 앞의 논문, 大豆の起源, 變遷およびその傳播 , pp.267-268에 의하면 야생두 100개의 무게는 겨우 2g정도이며, 콩깍지가 저절로 벌어지기 쉬우며, 덩굴성도 아주 강하다. 같은 조건에서 반야생두의 경우, 무게는 4~5g이고, 깍지가 잘 벌어지지 않으며, 덩굴성도 다소 낮다고 한다. 

 기원전 7세기 중엽에 齊 桓公이 戎菽을 주목하게 된 것도 화북에 존재했던 이런 荏菽과 달랐기 때문이며, 山戎지역에서 우량품종을 도입하여 天下에 보급한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大豆 植物學者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두를 山戎에서 中原으로 도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逆으로 중원에서 山戎지역으로의 도입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大豆의 품종이 위도緯度 4도만큼 북으로 올라가면, 서리가 내리기 전에 정상적으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대두는 日照量에 민감하기 때문에 남북 간보다 東西간의 전파가 훨씬 쉬웠다고한다. 

자료 山東農學院主編, 作物栽培學, 農業出版社, 1982, pp.662~667. 그런가 하면, 呂世霖,關于我國栽培大豆原産地問題的探土 中國農業科學 1978年 第4期, p.92에서 야생대두의 단일성短日性은 주로 하말초추夏末初秋의 단광선短光線의 작용이기에 어느 지역에서도 이런 일조량은 가능하기에 재배대두는 저위도低緯度나 고위도高緯度에서도 기원할 수 있다고 한다. 

 戎菽이 內地에 보급되면서 大豆의 용도와 수요는 크게 증대된 것으로 보인다. 呂氏春秋 審時 편에는 菽이 화禾, 서黍, 도稻, 마麻, 맥麥과 더불어 중요곡물로 인식되었으며, 後漢의 鄭玄은 周禮에서 ‘五種’을 서黍,(메기장) 직稷(찰기장), 菽, 麥,稻로 주석했으며, 高誘는 淮南子 修務訓 에서 豆를 五穀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조기趙岐는 孟子승문공상滕文公上 에서 大豆를 ‘五穀’ 중의 하나로 주석하면서 중요 곡물로 인식된 것을 보면, 대두의 수요와 그에 따라 생산량도 많았던 것 같다. 이것은 전국ㆍ진한시대의 大豆가 西周 이전의 菽보다 효용가치가 높았음을 의미한다.(粟좁쌀 속/가 빠져 있다)

  漢代 이후의 大豆용도로 미루어 볼 때, 戰國시대를 거치면서 대두는 곡물로서 뿐 아니라 가공하여 부식副食으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 듯하다. 대두가 언제부터 副食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지는 사료의 제약으로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기원전 3세기경의 전국시대 五十二病方에 ‘숙장菽醬’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무렵부터 大豆를 2차 加工, 醱酵시켜 새로운 부식품을 생산하였다. 

자료 嚴健民 編著, 五十二病方注補釋 牡痔 “숙장지배반菽醬之滓半”(簡242); 五十二病方注補釋“入八完 (丸) 叔 (菽) 醬中, 以食.”

 

2.8 미왕퇴의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속에서의 콩에 대한 서술 

2.8.1 식료제食療劑 

食療劑는 약물을 식품에 넣어 내복하는 방식이다. 그 가운데 기타 제형을 응용한 것을 제외하고 단순한 食療方은 五十二病方에서 8方이고 養生方과 雜療方에 10方이 있다. 방제의 조성은 약물로 고기를 삶은 후 고기와 국물을 먹는 것(예를 들어 닭고기를 찌거나 야생돼지고기를 삶아 복용하여 석척蜥蜴이나 뱀에 물린 것을 치료하고 장을 부어 구운 닭고기로 치질을 치료1이 있고(,一,痔者,以酱灌黄雌鸡(노란 암탉),令自死,以菅裹,涂 上〈土〉,炮之。涂 干,食鸡,以羽熏纂二五八。) 먼저 약물즙을 내어 고기를 삶아 내복하는 것(약물 즙으로 닭고기 포나 말고기 포에 섞거나 약물 즙으로 소고기를 삶아 강장제를 만든다 ―養生方131))이 있고, 동물의 피나 알을 먹는 것(예를 들어 蜮蟲, 蛇, 蜂에 물린 데 치료는 별鱉肉(금계 육고기)이나 별혈鱉血을 복용한다. 퇴산㿗疝(옴병이나 아랫배가 붇는 병) 치료에 달걀을 초에 담가 내복한다)이 있고, 약주로 밥을 짓는 것(養生方‧走)이 있고, 죽이나 약 죽을 만들어 복용하는 것(청량미青梁米의 죽으로 사교상蛇咬傷(뱀에 물린 상처)을 치료하고 돌을 달구어 삶은 미즙米汁으로 항문肛門의 통증을 치료하는 등이 있다. 

(漢代 이전의 醫籍을 통한 ‘炮制’의 연구)

 

 2 .8. 2 주제酒劑 

술을 만든 역사는 유구하여 周代 이전에 술의 종류가 매우 많았다. 周代 제도에 술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관직과 이른바 ‘오제五齊’, ‘삼주三酒’, ‘사음四飮’ 등여러 주류의 명칭이 있었다(周禮‧天官) 그러나 상술한 주류 가운데 “예醴”(일종의 감주甜酒) “요醪”(이것도 일종의 甜酒이다/막걸리) “清”(찌꺼기를 걸은 醴酒)164), “漿”(약간 신맛이 나는 술)165), “순주醇酒”(농도가 짙은 술) 등은 마찬가지로 마왕퇴 의서에 나타나 이들의 시대가 가깝고 관계도 밀접함을 말해주고 있다. 

 

 비슷한 시기의 운몽수호지雲夢睡虎地 진간秦簡 전식률傳食律에는 출장 가는 진대秦代 하급관료나 예속민들에게 장醬을 지급하였으며, 호북성 강릉 장가산張家山 247호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이년율령二年 律令의 傳食律이나 사율賜律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醬은 신분에 따라 1/2승升, 1/3승升, 1/4승升과 같이 그 양을 액체 상태로 지급한 것이나 원료공급에서 華北의 대두생산이 牧畜이나 어로漁撈보다 용이했던 것을 보면 肉醬보다 大豆로 만든 豆醬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된다. 


 

2.8.4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과 두豆 

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 는 교통이 발달한 대도시에서 이윤利潤이 많이 남는 식품으로 두시豆豉, 두장豆醬 등을 들고 있는 것은 大豆로 제조한 가공식품이 이미 상품화되어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 戰國시대 이후 大豆가 유숙속여수화有菽粟如水火”( 孟子 盡心章 聖人治天下使有菽粟如水火而民焉有不仁者乎.)와 같이 주요곡물로 인식되어 이미 이용도가 높아진 것을 보면 藿羹이나 飼料用의 菽[荏菽]은 경쟁에서 점차 멀어진 듯하다. 

 여씨춘추 呂氏春秋·심시審時 편을 보면, 菽의 명칭이 “大菽則圓, 小菽則摶以芳”와 같이 그 크기와 형태에 따라 大菽과 小菽으로 구분하고 있다. 戎菽이 內地로 도입된 후에 그 呼稱은 기존의 菽의 이름을 借用했을 것이지만 그 차이를 밝힌 것이 呂氏春秋 辯土 이었던 것이다.  

 

2.8.5 여씨춘추 呂氏春秋·심시審時 

 제때에 맞추어 심고 가꾼 콩은 줄기는 길고 밑둥은 짧으며 콩투리가 한줄에 일곱 꼬뚜리씩 두 줄로 나서 하나의 족을 이루고, 가지도 많이치고 마디도 많으며 잎들이 경쟁이나 하듯이 무성해지고 결실도 많아진다. 대두콩은 알갱이가 둥글 둥글해지고 팥콩은 씨방을 둥글게 똘똘 뭉친다. 이를 저울로 달며 무겁고 먹으면 숨쉬기가 부드러워지며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이와같은 콩은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제때보다 이르게 심고 가꾼 콩은 반드시 길게 자라서 덩굴져 나가고, 잎이 가볍고 마디가 듬성듬성 성기게 자라나며 콩꼬투리가 작고 열매가 꽉차지 않는다. 제때보다 늦게 심고 가꾼 콩은 줄기가 짧고 마디가 듬성 듬성 성기게 자라며, 뿌리가 텅 비고 열매가 알차지 않는다. 

得時之菽,長莖而短足,其莢二七以爲族,多枝數節,競葉蕃實,大菽則圓,小菽則摶以芳,稱之重,食之息以香,如此者不蟲. 先時者,必長以蔓,浮葉疏節,小莢不實. 後時者,短莖疏節,本虛不實.  

 또한 後漢의 장읍張揖은廣雅에서 “大豆, 菽也. 小豆, 荅也.”47)라고 하여 종류가 다른 것으로 인식하였다.< (47) 齊民要術 卷2 大豆 편에서 인용한 後漢의 張揖 廣雅에는 “大豆 菽也, 小豆 荅也” 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大菽은 圓形이라는 것이며, 이보다 작은 小菽은 긴 橢圓形의 角이 졌다는 것이다.<“小菽則摶以芳”에 대해 陳奇猷는 ‘摶以芳’를 둥글다고 해석했으며, 夏緯瑛은 ‘房’은 ‘方’으로 불룩하다는 의미라는 것에 근거하여 이 부분을 “小菽는 긴 타원형의 角이 진 형태(長扁橢圓形)”라고 해석하였다.> 

이미 소숙小菽은 마치 황하중하류지역에서 出土된 菽類와 비슷한 모습이다. 그리고 大菽의 특징은 알이 원형이고 꽉 차 무거우며 먹으면 맛이 좋았다는 것이다.이것은 곧 기존의 菽은 장 타원형長橢圓形이고 알이 물러 단단하지가 못하여 쉽게 병충해病蟲害가 생기고 수확량도 많지 않고 맛이 고소하지도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大菽, 곧 戎菽이 도입된 이유이며, 流入된 大豆가 널리 이용되고 보급되었던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 두豆’의 명칭名稱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대개 戰國 후기로서 戰國策 韓策“韓地險惡山居, 五穀所生, 非麥而豆”와 戰國 초楚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갈관자鶡冠子 天則 “양두색이兩豆塞耳, 불문전정不聞雷霆("콩 두 개를 귀에 꽂아도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한대에는  鹽鐵論 “鄕人飮酒, 老者重豆, 少者立食”(향인은 술을 마시고 노인은 콩을 주이 여기며 나이어린이는 입식을 한다), 論衡 솔성편率性篇 “豆麥之種”과 같이 豆字의 출현빈도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나고 있다.(콩과보리는 쌀이나 기장과는 다른 종류지만 먹으면 배고픔을 면 할 수 있다 솔성率性: 두맥지종豆麥之種,여도량수與稻梁殊,연식능거기然食能去飢) 

 그렇다고 진한시대 이후 豆와 菽의 실체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완전히 동일해 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 표현하지 않았던 ‘大菽’이라는 표현에서 춘추 이전의 菽사이에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크기가 작고 긴 타원형橢圓形의 각角이 진 소숙小菽은 답荅(좀콩)이라는 異名과 함께 쓰이다가 점차 小豆의 함의에 포함되면서 菽은 大豆, 小豆로 양분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된다. 특히 漢代이후가 되면 菽字의 출현빈도는 줄어들고 점차 豆의 명칭이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으며, 前漢末 범승지서氾勝之書에는 大豆와 小豆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별도의 항목을 설치할 정도로 豆에 대한 이해가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에는 豆의 출현빈도가 菽보다 현저하게 증대되는 것을 각종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공영달孔潁達의 지적과는 달리 융숙戎菽의 보급된 이후에도 후직后稷이 파종했던 숙류菽類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菽과 豆의 명칭변화는 바로 기원전 7세기 중엽 대두가 內地로 유입되어 널리 보급되면서 기존의 菽보다 圓形이며 충실하고 맛이 좋아 용도가 다양해지고 수요가 확대되어 大豆가 대표적인 존재가 되면서 菽의 기능까지 포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漢代에는 “菽, 豆也” “菽謂豆也”라는 표현과 같이 菽과 豆는 지역이나 형태상의 차이가 아닌 동일한 常用語로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이때 豆는 당연 그 代表 격인 大豆였을 것이며, 그 계기는 대두가 가공식품으로서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대두의 수요가 증가됨으로써 기존의 野生豆나 小菽類는 존재가치가 상대적으로 크게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제시한 詩經 生民 편의 “재배한 荏菽이 무성하게 잘 자랐다.[蓺之荏菽, 荏菽旆旆]”는 사료는 菽의 재배에 관한 최초의 문헌기록이지만, 이는 열매보다 잎의 수확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아울러 詩經 小雅ㆍ채숙采菽 편에는 “채숙채숙采菽采菽, 광지거지筐之筥之”라고 하여 마치 나물을 캐듯 野生 혹은 半야생의 숙엽菽葉을 부지런하게 따서 광주리에 담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를 말해주며, 君主마저 이런 상황을 유의하여 살피고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豆油와 같은 食用油 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채나 고기를 기름에 볶거나 튀기기보다 수확한 菽의 葉을 1차적으로 삶고, 무치고 生食을 하거나 국을 끓어 食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西周의 荏菽과 菽의 용도가 후대의 大豆와는 확연하게 달랐음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숙곽갱菽藿羹 중심으로 한 華北지역의 식사형태는 비슷한 시기의 南方의 초월楚越지역이 ‘반도갱어飯稻羹魚’중심이었던 것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貨殖列傳序(화식열전서)-史馬遷(사마천)>

 

2.8.6 荏菽의 栽培와 時期

  漢代 이후 大豆의 재배법은 범승지서氾勝之書를 제민요술齊民要術 大豆 편 에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戎菽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關中지역에 존재했던 周代의 菽을 어떻게 재배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전술한 것처럼 菽과 大豆[戎菽]의 용도가 달랐다면 그 재배시기와 방법도 달랐을 것이다.  

 한대漢代 헌제獻帝 흥평興平2년 말에 많은 평민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당시 양패楊沛는 백성들로 하여금 마른 오디[건심乾椹]를 비축하게 하고, 작은 야생두[로두䝁豆]를 채집하게 했으며, 많이 수집한 사람은 부족한 사람에게 보태어 주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䝁豆는 일종의 야생의 豆科 식물이다. 이시진李時珍은 이것을 야록두野綠豆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野黑小豆라고도하였다. 그 외 당시의 野生豆로는 爾雅에 ‘권蔨’이라는 돌콩[유莥/들콩]이 보이는데, 잎은 大豆와 비슷하고 뿌리는 노랗고 넝쿨이 있다고 하였다. 齊民要術 大豆 편에는 廣雅, 廣志 등에 등장하는 거두秬豆(찰기장 알갱이와 비슷한 야생콩), 광두豇豆(일년생 콩), 백두白豆, 자두刺豆, 양두楊豆, 연두鷰豆(제비모양), 완두豌豆, 강두江豆, 노두䝁豆, 여두穭豆, 녹두鹿豆, 호두胡豆 등 다양 한 숙류菽類를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알이 작고 거칠며, 주로 채집한 것으로 미루어 이후의 大豆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菽의 재배시기에 대해 詩經 노송魯頌ㆍ비궁閟宮 에는 “서직중륙黍稷重穋, 직치숙맥稙穉菽麥”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毛傳에서는 重은 선종후숙先種後熟[後熟], 육穋는 후종선숙後種先熟[先熟]을, 직稙는 先種의 작물[조종早種], 치穉는 後種의 작물[만종晩種]이라고 주석하여, 菽에는 최소한 조종早種, 만종晩種 두 품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毛傳 釋曰 “先種曰직稙, 後種曰치穉”, “後熟曰중重, 先熟曰육穋”> 

 禮記 月令 편에도 여름철에 ‘식숙여계食菽與雞’을 하여 기氣를 보충했다는 상황을 주소注疏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초봄에 파종한 조숙早熟용 숙菽이거나 푸성귀 숙菽이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빈풍豳風․七月 편에는 “구월축장포九月築場圃, 시월납화가十月納禾稼. 서직중육黍稷重穋, 화마숙맥禾麻菽麥.”라고 하여 菽을 10월(周曆)에 수확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농력農曆(夏曆)으로 8월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확시기로 미루어 보아 당시 다양한 형태의 菽類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小豆의 생장기에 대해 잡음양서雜陰陽書에는 파종에서 수확시기가 120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은 小豆의 생장기간이 大豆보다 한 달 이상 적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와 같이 菽을 연간 세 번 수확했다는 것은 분명 야생성이 강한 것이거나 반재배두半栽培豆였을 것이고, 그것도 대부분 소립小粒의 숙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열매도 익기가 무섭게 떨어지고, 수확기와 雨期가 겹쳐 수확시기를 맞추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수확량도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확된 菽 또한 日用食으로는 부적합하고 사졸士卒 건량乾糧이나 빈천저貧賤者의 양식이나 구황식救荒食으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숙菽은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주로 잎을 소비하기 위해 생산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菽이 바로 詩經의 도처에 등장하는 菽, 荏菽이었던 것이다. 

  자료 呂氏春秋任地 편에는 “日至, 苦菜死而資生, 而樹麻與菽”처럼 夏至에 菽을 파종하고 있는데, 이것은 齊民要術 小豆 편의 “夏至後十日種小豆爲上時”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 菽 역시 大豆가 아닌 小豆임을 알 수 있다.

 

<孟夏之昔,殺三葉而穫大麥。日至,苦菜死而資生,而樹麻與菽,此告民地寶盡死</p>

맹하인 사월 하순에 냉이,꽃다지, 황사냉이등 세가지 풀의 잎이 시들면 이때 보리(大麥)를 수확한다. 하지에 씀바귀가 죽고 납가새가 자라나면 마麻와 함께 콩菽을 심는다. 이때 백성들에게 년중 파종의 시령이 끝나는 것임을 알려준다 呂氏春秋 任地 > 

 그렇다면 이러한 菽과 農書에 등장하는 大豆를 상호 비교해보자. 氾勝之書 大豆 편에서 大豆의 파종시기를 보면 “삼월유협시유우三月榆莢時有雨,고전가종대두高田可種大豆.”라고 하여 高田의 경우, 느릅나무 꼬투리[榆莢]가 달리는 3월에 파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小豆의 경우 “심흑시椹黑時,주우종注雨種”처럼 오디가 검붉게 되는 늦봄이 파종기로서 대두보다 2달 정도 늦게 파종했음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齊民要術 大豆 편에는 “춘대두春大豆, 차직곡지후次稙穀之後. 二月中旬為上時, 三月上旬為中時”라고 하여 2월 中旬에서 3월 상순上旬을 그 대두의 파종시기로 잡고 있으며, 4월 이후에는 가능한 파종하지 말 것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5, 6월에도 파종할 수는 있지만, 늦으면 늦을수록 종자가 많이 든다고 하여 권하지 않고 있다 小豆의 경우, “하지夏至 후 열흘이 되는 날이 심기에 가장 좋은 날이며, 가능한 초복初伏(陽 7월 18일)이 끝나기 전에 파종하고 중복中伏(陽 7월 28일) 이후에는 파종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6월 중하순에 파종하고 7월 초순 이후에는 파종하지 말라는 것인데,  氾勝之書의 小豆 파종시기보다 늦다. 

 자료 천공개물天工開物 내복乃服 편에는 “여름이 되면 뽕나무 오디가 검붉게 익는다.”고 한 반면, 四民月令 三月 “상심적桑椹赤”에서 오디가 붉게 되는 시기는 늦은 봄이라고 한다.

자료 齊民要術卷2 大豆 편에는 최식崔寔의 말을 인용하여 “살구꽃이 활짝 피고 오디가 붉어졌을 때 大豆를 파종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며, 4월에 적당한 때에 비가 내리면 大豆와 小豆를 파종할 수 있다.”고 하여 시기를 다소 달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역과 토양의 차이에 의해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대두의 生長期는 神農書 八穀生長 篇에는 “대두생우회大豆生于槐회...九十日華, 六十日熟, 凡一百五十日成.”라고 하여 대강 150일 정도였다. 이러한 생장일수로 볼 때, 8월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보통 3월에는 파종을 해야 가능하다. 이처럼 파종과 수확시기가 비슷한 품종이 漢代 이후에 淸代까지 3월 무렵에 파종하여 여름을 보낸 것을 보면, 비슷한 대두가 줄곧 재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자료 齊民要術 卷2 大豆 편에서 인용한 雜陰陽書에 의하면, “大豆는 회화나무[槐] 잎이 나올 때 싹이 튼다. 싹 트고 90일이 되면, 꽃이 피고, 꽃이 핀 이후에 70일이 되면 수확한다.”고 하여 약간 시기를 달리 하고 있다. 

자료 魏書卷112 靈徵志上 “七年三月,肆州風霜,殺菽.”; 隋書 卷23 五行下 “陳太建十年八月,隕霜,殺稻菽.”; 陳書 卷5 本紀第五 “八月乙丑朔,改秦郡為義州.戊寅,隕霜,殺稻菽.”; 南史 卷10 陳本紀下第十 “八月戊寅, 隕霜殺稻菽.”; 隋書 卷23 五行下 “陳太建十年八月,隕霜,殺稻菽.”; 新唐書卷7 本紀第七․德宗皇帝李适 ; 元史 卷51 五行二 “八月,鈞州密縣隕霜殺菽....二十八年四月,奉元隕霜殺菽.”; 淸史稿 卷41 順帝本紀第四十七 .  

 漢代 이후 明淸代까지의 대두의 파종시기는 齊民要術卷2 大豆 편의 시기를 거의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大豆와 야생성이 강한 小粒의 菽과 어떻게 달랐던가? 詩經 魯頌ㆍ閟宮 과 豳風ㆍ七月 의 毛傳에서 보듯 당시 菽은 春種, 夏種의 두 품종이 존재했으며, 이 菽은 晩熟과 早熟 혹은 早種과 晩種이 있었다는 점은 氾勝之書와 齊民要術 속의 大豆 파종, 수확시기와 대비할 때구분된다. 그리고 齊民要術의 廣志의 “노두䝁豆[重小豆]는 1년에 세 번을 수확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재배대두와는 다른 野生性이 강한 것으로 서주에는 이 같은 품종이 적지 않게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예컨대, 齊民要術 大豆 편에서 보듯, “정월에 파종한 비두豍豆”도 그런 품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각종 野生豆가 점차 순화되고 선택되면서 상이한 성숙기를 지닌 재배두가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長江유역에 春大豆, 夏大豆, 秋大豆가 있었으며, 黃淮유역에는 春大豆, 夏大豆가 출현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東北지역에서는 春大豆만 보이며, 이는 氾勝之書나 齊民要術의 재배방식과도 동일하다. 그런데  齊民要術 大豆 편에 보이는 大豆는 그 특성에서 이들과는 차이가 있다. 우선 파종을 깊게 하며, 익은 열매가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잎이 떨어지면 바로 수확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 외에도 대두는 그루간의 거리를 일정하게 조정하고, 꽃이 필 때는 많은 日照量을 싫어한다는 속성 등이 야생두와는 큰 차이를 보이며, 이는 분명 대두 열매를 수확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재배방식 역시 북방지역의 春大豆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것도 주목된다. 이는 詩經시대 關中지역을 중심으로 재배되었던 菽은 齊民要術大豆 편의 大豆와는 재배 시기나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으며, 재배의 목적도 달랐음을 말해준다. 

 자료/ 대두는 출묘出苗 이후 개화開花까지 약 20일간은 開花를 촉진하고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12시간 전후의 일조량만 필요한데, 3월에 파종할 경우 北方 혹은 동북지역의 유전자를 가진 大豆가 이런 조건에 보다 합당하다.  대두가 사료 상 처음으로 중시되기 시작한 것은 呂氏春秋審時 편부터이다. 周代 이래 菽으로 불리어져 왔던 것이 呂氏春秋에서 大菽과 小菽으로 구분되어 등장하고, 禾, 黍, 稻, 麻, 麥과 더불어 중요작물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중요한 것은 당시 菽을 처음으로 열매의 크기나 형태에 따라 大, 小로 구분하고, 大菽은 “大菽則圓”이라고 하여 圓形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齊民要術 卷2 大豆 첫머리의 小注에 의하면 大小豆에 대해 “今世大豆, 有白黑二種, 及長梢牛踐之名. 小豆有菉赤白三種. 黃高麗豆黑高麗豆鷰豆豍豆, 大豆類也. 豌豆江豆䝁豆, 小豆類也.”라고 한다. 하지만 齊民要術의 본문에서는 豆의 복잡한 종류, 형태및 지역에 따른 異名을 떠나 소두와 대두만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경우 기존의 다양한 菽은 어디에 포함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小菽’이 지금의 ‘小豆’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小粒의 豆인지의 여부는 지금도 합의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주목되는 것은 齊民要術 小豆 편에서 인용한 氾勝之書의 “大豆小豆, 不可盡治也”라는 사료이다. 이는 대두와 소두는 모든 잎을 따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119) “예로부터 모든 잎을 따지 않았던 까닭은 잎속에 養分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잎을 따버리면 자양분을 잃게 되어 수확이 좋지 않게 되기 때문에 豆는 잎을 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열매 수확을 위해 잎을 따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이전부터 잎을 따서 이용했던 습관이 氾勝之書시대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대두가 보급된 이후에도 줄곧 藿羹 등의 용도를 위해 ‘采菽葉’했음을 말해준다. 齊民要術에서도 이를 인용하여 다시 한 번 “잎을 모두 따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先秦시대의 菽과는 달리 大豆는 잎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생산하기 위한 것임을 명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잎 중심의 菽에서 加工副食으로서의 大豆로 그 위치가 변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대두가 戎菽의 보급 이후 줄곧 생산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周代 이래 서민의 藿羹으로 이용되어왔던 小粒형태의 菽은 대두가 출현한 이후 그 용도가 어떻게 變化되었을까? 이런 菽類의 갈래의 이해 역시 대두의 기원 문제를 밝히는데 중요하다. 대두가 서속黍粟처럼 숙반菽飯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大豆 속에 소화가 쉽지 않은 탄수화합물이 함유되어 많이 食用할 경우 위장에 장애가 생기거나 小腸에서 대량의 가스를 발생하여 배가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豆飯은 전술한 바와 같이 貧賤者의 허기를 채우는데 이용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채소와 삶은 菽을 으깨 죽을 쑤어 식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齊民要術校釋에서도 콩잎을 따서 菜蔬로 食用했다는 것으로 인식했으며, 고대에는 “藿羹”을 먹는 오랜 습관이 있었다. 

2.9 .1 고려두 

 제민요술(濟民要術) 

 6장 콩(大豆)-

 『이아(爾雅)』에서 이르기를 “융숙(戎叔)이라고 부르는 것은 임숙(荏菽)을 말하고, 손염(孫炎)의 이른바 융숙은 대숙(大菽 : 대두)을 말한다.”고 하였다. 장읍(張揖)의 『광아(廣雅)』에서는 “콩[大豆]은 숙(菽)이며, 팥[小豆]은 답(荅)이라 하였다. 비두(豍豆)와 완두(豌豆)는 유두(留豆)이고, 호두(胡豆)는 동부[䜶䝄]”라고 하였다. 

 『광지(廣志)』에는 “중소두(重小豆)는 1년에 세 차례 익으며 맛이 달다. 백두(白豆)는 모양이 거칠고 크며 식용이 된다. 자두(刺豆)도 먹는다. 거두(柜豆)는 모가 팥과 비슷하며 꽃은 자색(紫色)이고 가루를 만들어 먹는다. 주제(朱提)․건녕(建寧)에서 생산된다. 콩[大豆]에는 황락두(黃落豆)와 어두(御豆)가 있는데 이들은 두각(豆角 : 콩꼬투리)이 길다. 양두(楊豆)는 잎을 식용으로 할 수 있다. 호두(胡豆)에는 청색 또는 황색인 것이 있다.”고 한다. 

 『본초경(本草經)』에서는 “장건(張騫)을 외국에 파견하여 호두(胡豆)를 구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콩[大豆]으로는 흰콩[白大豆]과 검은콩[黑大豆]의 두 종류가 있으며 장초(長稍)와 우천(牛踐)이라 부르는 것도 있다. 팥[小豆]에는 푸른팥[菉豆]․붉은팥[赤小豆]․흰팥[白小豆]의 세 종류가 있다. 황고려두(黃高麗豆)․흑고려두(黑高麗豆)․연두(燕豆 : 제비콩)․비두(豍豆)는 콩[大豆]의 종류들이다. 완두(豌豆)․강두(江豆)․노두(䝁豆)는 팥[小豆]의 종류라 하였다.

(今世大豆,有白、黑二種,及長梢、牛踐之名。小豆有菉、赤、白三種。黃高麗豆黑 高麗豆、鷰豆、豍豆,大豆類也。豌豆、江豆、䝁豆,小豆類也)。

 

 봄콩[春小豆]은 직곡(稙穀)을 심은 뒤에 파종한다. 2월 중순이 가장 좋은 때이고 1묘에 종자를 8되 뿌리며, 3월 중순이 그 다음으로 종자는 1말(斗)을 뿌린다. 4월 초순은 가장 좋이 않은 때이며 종자는 1말 2되를 뿌린다. 5․6월만 파종해도 소출은 낼 수 있다. 그러나 파종이 다소 늦어지면 그만큼 파종량을 다소 늘려 준다. 

 땅을 곱고 부드럽게 다스릴 필요는 없다. 가을에 날이 뾰족한 봉(鋒)으로 김매준 땅이면 씨앗을 띄어서 파종하는 것이 좋다. 땅이 지나치게 부드러우면 싹이 무성하게 자라서 오히려 소출이 떨어진다. 수확은 되도록 늦게 해야 한다. 수확을 늦추어야 떨어지지 않고, 일찍 베면 (여물지 않아) 손실이 난다. 

 반드시 누거(耬居)를 이용하여 씨를 뿌린다. 깊이 심어야 한다. 콩의 성질이 강해서 깊게 뿌리내린 모일수록 비가 오면 윤기(凙)가 흐른다. 봉(鋒)으로 김맬 때에 각각 호미질을 1번만 하고 2번 매지 않아야 한다. 

 잎이 다 떨어진 연후에 베어낸다. 잎이 덜 떨어진 곳에서는 베어내기가 힘들다. 다 베어낸 다음엔 서둘러서 밭을 갈아 엎는다. 콩은 성질이 강해서 가을에 갈지 않으면 윤택해지지 않는다. 

 줄풀(茭)을 심을 때는 보리를 심었던 밭을 이용한다. 1묘에 씨앗 3되를 뿌리는데, 우선 이리저리로 흩어서 씨뿌리기를 끝내고 나서 쟁기로 곱고 얕게 흙을 갈아 일으켜 골라 놓는다. 줄풀은 가물면 대[萁]가 굳어져서 잎이 쉽게 떨어진다. 드물게 심으면[薄播] 줄기가 길게 자라지 않고 깊게 심으면[深播] 흙이 두텁게 덮여서 싹이 나지 않는다. 만약 습기가 많은 곳이라면 먼저 깊게 밭갈이를 해 주고 , 땅을 되짚어 일구며[逆垈] 콩을 뿌려 준 연후에 땅을 골라 준다. 습기가 적을 때는 이 방법은 취하지 않는다. 9월중에 지면에 가까운 곳의 아랫잎이 누렇게 떨어지기 시작하면 속히 베어낸다. 잎이 조금이라도 누렇게 변하지 않으면 반드시 축축하고 뜬다. 서둘러 베어내지 않으면 바람을 만나서 잎이 다 떨어지고, 비를 만나면 잎이 썩어서 숙성하지 못한다. 

 『잡음양서(雜陰陽書)』에는 이르기를 “콩[大豆]은 괴(槐훼나무)와 함께 싹이 트고, 90일에 꽃이 피며, 꽃핀 후 70일에 여문다. 콩은 신(申)에 싹트고 자(子)에 뻗어나며, 임(壬)에 키크고 축(丑)에 노쇠하여 인(寅)에 죽는다. 갑을(甲乙)이 나쁘고 묘오병정(卯午丙丁)을 꺼린다.”고 하였다. 『효경(孝經)』의 「원신계(援神契)」에서는 “붉은 흑(赤土)이 콩류[菽]에 알맞다.”고 이른다. 

 『범승지서(氾勝之書)』에 이르기를 “콩[大豆]은 한 해에 걸쳐서 언제나 먹을 수 있어서 예전에는 이것으로 흉년에 대비하였다. 가구(家口)수를 헤아려서 콩을 심으면 한 식우에 5묘(畝)를 표준으로 하고 이 계산이 농지 경영의 기본이다.” 

 “3월에 느릅나무[楡] 꽃이 꼬투리로 될 무렵 비를 기다렸다가 높은 곳에 있는 밭에는 콩을 심는다. 흙이 고르고 덩이진 것이 없으면 1묘에 5되를 씨뿌리고, 흙이 고르지 않으면 콩을 더 늘려 파종한다. 하지(夏至)가 지난 20일 까지도 콩을 심어도 차이가 없다. 콩껍질을 머리에 이고 돋아 나오면 밭은 깊게 매지 않는 것이 좋다.” 

 “콩은 고르고 드물게 파종해야 한다.” “콩꽃은 햇살을 보기 싫어하는데 햇살을 맞으면 누렇게 볕에 데고 뿌리가 쇠약해진다.” 

 “콩을 거두어 들이는 방법은 콩꼬투리가 검게 되면서 줄기가 아직 푸를 동안에 주저하지 말고 빨리 수확해야 한다. 열매[꼬투리]가 커져 낱알이 떨어지려 하면 오히려 다 잃게 되는 탓이다. 흔히 콩은 탈곡장(場)에서 익는다고 하는데 이 말은 곧 타작하는 마당에서 콩을 수확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위쪽에 달린 콩꼬투리는 아직 푸르지만 아래쪽이 검은 꼬투리일 때 벤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범승지서(氾勝之書)』에 기록된 「구종대두법(區種大豆法)」에 이른바, “구덩이[坎]는 사방 깊이가 각각 6치이고 구덩이와 구덩이 사이는 2자가 떨어지게 한다. 그렇게 하면 1묘에 1680개의 구덩이를 만들 수 있다. 구덩이 준비가 끝나면 잘 익은 거름 1되씩을 가져다가 구덩이 속의 흙과 섞어 넣는다. 씨를 심을 무렵이 되면 구덩이에 3되의 비율로 물을 준다. 구덩이마다 콩 3알씩을 심고 복토는 두껍지 않게 하여 준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누르고 씨앗과 그 위를 덮은 흙이 서로 잘 닿게 해 준다. 1묘에 씨아 2되를 심고 거름 16섬 8말을 시용한다.” 

“본엽이 5~6개 나오면 호미로 매준다. 가물면 구덩이마다 물 3되씩을 대준다.” “장정(丁夫) 한 사람이 5묘를 가꿀 수 있고, 가을이 되면 1묘에서 16섬을 거둔다.” “파종할 때 복토의 깊이는 콩이 안 보일 정도가 좋다.” 

 최식(崔寔)은 “정월에는 비두(豍豆)를 심을 수 있고, 2월에는 콩[大豆]을 심을 수 있다. 또한 3월이 되어 황혼 무렵에 삼성(三星)이 서쪽으로 지고, 살구꽃이 활짝 피며 뽕나무 오디가 붉어지면 콩을 심을 수 있다. 이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다. 4월에 계절 따른 비가 오면 콩과 팥을 심을 수 있다. 기름진 밭에는 드물게 씨뿌려야 하고 척박한 밭에는 베개 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제민 요술 한문 원문 

大豆第六

1  爾雅曰:「戎叔謂之荏菽。」孫炎注曰:「戎叔,大菽也。」

2  張揖《廣雅》曰:「大豆,菽也。小豆,荅也。豍豆、豌豆,留豆也。胡豆,䜶䝄也。」

3  《廣志》曰:「重小豆,一歲三熟,槧甘。白豆,麤大可食。剌豆,亦可食。秬豆,苗似小 豆,紫花,可為麵,生朱提、建寧。大豆:有黃落豆;有御豆,其豆角長;有楊豆,葉 可食。胡豆,有青、有黃者。」

4  《本草經》云:「張騫使外國,得胡豆。」

5  今世大豆,有白、黑二種,及長梢、牛踐之名。小豆有菉、赤、白三種。黃高麗豆、黑 高麗豆、鷰豆、豍豆,大豆類也。豌豆、江豆、䝁豆,小豆類也。〉

6  春大豆,次稙穀之後。二月中旬為上時,一畝用子八升。三月上旬為中時,用子一斗。四月上旬為下時。用子一斗二升。歲宜晚者,五、六月亦得;然稍晚稍加種子。

7  地不求熟。秋鋒之地,卽𥡦種。地過熟者,苗茂而實少。

8  收刈欲晚。此不零落,刈早損實。

9  必須耬下。種欲深故。豆性强,苗深則及澤。鋒、耩各一。鋤不過再。

10  葉落盡,然後刈。葉不盡,則難治。刈訖則速耕。大豆性炒,秋不耕則無澤也。

11  種茭者,用麥底。一畝用子三升。先漫散訖,犂細淺㽟良輟反而勞之。旱則萁堅葉落, 稀則苗莖不高,深則土厚不生。若澤多者,先深耕訖,逆垡擲豆,然後勞之。澤少則否, 為其浥鬱不生。九月中,候近地葉有黃落者,速刈之。葉少不黃必浥鬱。刈不速,逢風 則葉落盡,遇雨則爛不成。

12  《雜陰陽書》曰:「大豆『生』於槐。九十日秀,秀後七十日熟。豆『生』於申,『壯』於子, 『長』於壬,『老』於丑,『死』於寅,惡於甲、乙,忌於卯、午、丙、丁。」

13  《孝經援神契》曰:「赤土宜菽也。」

14  《氾勝之書》曰:「大豆保歲易為,宜古之所以備凶年也。謹計家口數,種大豆,率人五畝,此田之本也。

15  「三月榆莢時,有雨,高田可種大豆。土和無塊,畝五升;土不和,則益之。種大豆,夏至後二十日,尚可種。戴甲而生,不用深耕。

16  「大豆須均而稀。

17  「豆花憎見日,見日則黃爛而根焦也。

18  「穫豆之法,莢黑而莖蒼,輒收無疑;其實將落,反失之。故曰:『豆熟於場。』於場穫 豆,卽青莢在上,黑莢在下。」

19  氾勝之區種大豆法:「坎方深各六寸,相去二尺,一畝得千二百八十坎。其坎成,取美糞 一升,合坎中土攪和,以內坎中。臨種沃之,坎三升水。坎內豆三粒;覆上土,勿厚, 以掌抑之,令種與土相親。一畝用種二升,用糞十二石八斗。

20  「豆生五六葉,鋤之。旱者溉之,坎三升水。

21  「丁夫一人,可治五畝。至秋收,一畝中十六石。

22  「種之上,土纔令蔽豆耳。」

23  崔寔曰:「正月可種豍豆。二月可種大豆。」又曰:「三月,昏,參夕,杏花盛,桑椹赤, 可種大豆,謂之上時。四月,時雨降,可種大、小豆。美田欲稀,薄田欲稠。

 

 2.9.2 신당서의 기록과 발해의 메주 

 

新唐書(1) > 北狄列傳 > 渤海 > 俗所貴者, 曰太白山之菟, 南海之昆布, 柵城之豉,《列傳第一百四十四 北狄》

 俗所貴者,曰太白山之菟,南海之昆布,柵城之豉,扶餘之鹿,鄚頡之豕,率賓之馬,顯州之布,沃州之綿,龍州之紬,位城之鐵,廬城之稻,湄沱湖之鯽。果有九都之李,樂游之梨。餘俗與高麗、契丹略等。幽州節度府與相聘問,自營、平距京師蓋八千里而遠。後朝貢至否,史家失傳,故叛附無考焉。 

-중국의 오랑캐에 대한 방위와 규정/ 동이(東夷) · 서융(西戎) · 남만(南蠻) · 북적(北狄) 

  俗所貴者속소귀자,曰太白山之菟왈태백산지토,南海之昆布남해지곤포,柵城之豉책성지시,扶餘之鹿부여지록,鄚頡之豕막힐지시,率賓之馬율빈지마,顯州之布현주지포,沃州之綿옥주지면,龍州之紬용주지주,位城之鐵위성지철,廬城之稻노성지답,湄沱湖之鯽미호타지즉 果有九都之李과유구도지리,樂遊之梨낙유지리。 

민간俗에서 귀하게 여기는所貴 것者은 태백산太白山의 토끼菟,남해南海의 다시마昆布,책성柵城의 메주(된장), 부여扶餘의 사슴鹿,막힐鄚頡의 돼지豕, 율빈率賓의 말馬 ,현주顯州의 베布 , 옥주沃州의 솜綿, 용주龍州의 명주紬, 위성位城의 철鐵, 노성廬城의 벼稻, 미타호湄沱湖의 가자미鯽 ,과일은 구도九都지역의 오얏李과 낙유樂遊지역의 배梨가 있다. 

 

 2.9.4 광개토왕비에서 대곽大藿 

중원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리(可金面) 용전리(龍田里) 입석(立石)마을에 있으며,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4월에 충주의 문화재 애호가들이 입석(立石)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제보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전면과 좌·우측면에 글자를 새겼음을 확인할 수 있고, 뒷면에서는 판독되는 글자를 발견할 수 없다. 뒷면에도 글자를 새겼는지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려 있다. 건립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마멸되어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현재 5세기 전반 광개토왕대부터 6세기 중·후반 평원왕대(559~590)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최근에 앞면 첫째 줄의 몇 글자(高麗太王祖王令)를 새롭게 판독하여 495년(문자명왕 4)으로 보는 견해와 비문에 보이는 ‘십이월삼일갑인(十二月三日甲寅)’이란 간지와 날짜를 고려하여 449년(장수왕 37)으로 보는 견해가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다. 글자의 마멸이 심하여 비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는 견해, 문자명왕의 중원지역 순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건립하였다고 보는 견해, 고구려 태자 공(共)이 신라와 싸워 다시 우벌성(于伐城:충주지방)을 되찾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회맹(會盟)한 사실을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이며, 고구려의 중원진출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자료이다. 특히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란 표현은 중원고구려비 건립 단계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주어 당시 양국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서 주목을 받았다. 이밖에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인명과 관등은 고구려 정치제도사 연구의 사료로,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부른 표현은 당시 고구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었다.

 

<前面>

五月中高麗太王祖王令▨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亏桓

奴主簿貴道[德][][類][王][安][]▨[去]▨▨到至跪營天(大?, 夭?)太子共[]

尙望上共看節賜太霍鄒敎(授?)食[在]東夷寐錦之衣服建立處

用者賜之隨▨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

5월 중 고려대왕(高麗大王)의 조왕(祖王)께서 영(令)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려고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 주부(主簿) 귀도(貴道) 등이 ...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 ...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위처建立處 용지사지用者賜之 수지隨者 ... .노객인 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역자주)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에도 태적추(太翟鄒)를 내린다는 기록이이 확인 되는데 태척추는 미역이나 다시마가 아닌 의례용儀禮用으로 내리는 기물로 추정된다.

-太翟鄒태적추에서 적翟은 콩을 의미하는 곽藿과 통용되는 한자이다.

 글자가 흐리기 때문에 곽藿으로 판독하여도 무리가 없는 글자로 추정된다. 추鄒는 추騶와 서로 의미가 통한다. 추騶는 말을 부려서 수레를 모는 사람을 의미하거나 말을 능숙하게 모는 기수騎手를 의미하지만 한서漢書에 재관추발材官騶發이라는 표현이 확인 된다. 재관材官은 말을 타는 관리를 의미하고 추발騶發에서 추騶은 빠르게 나가는 좋은 화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연관을 전체적으로 고려해 볼 때 태적추太翟鄒는 <콩잎모양을 띠는 좋은 화살>을 의미하게 된다. 

태적추太翟鄒를 무엇으로 간주하는냐하는 논의는 학자에 따라 상이하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구난희교수는 태적추太翟鄒를 수레로 규정하고 있으며 <다시마와 발해 일본의 교류/한일 관게사 연구2019년>. 손영종교수는 자신의 논문 <중원 고구려비에 대하여 1985년>에서 태적추太翟鄒를 다시마로 규정하고 있다.

  

 

3. 결 론

 

 

 중국과 인접하고 있는 한국은 선사시대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는 달리 기원전의 문자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문헌을 통해 大豆의 기원을 입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자국의 대두문제를 밝히는데 중국적 자료에 간접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어 연구성과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先秦시대에 출토된 菽類의 형태만으로는 野生種, 半野生種 및 栽培種인지의 구분이 뚜렷하지 못하며, 게다가 그것이 오늘날의 대두와 직접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先秦시대의 대두를 이전의 야생두보다 큰 大菽으로 인식하고, 이를 오늘날의 대두와 직접 연결 지여 그 기원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서 半야생두를 독자적 種이라고도 하며 재배종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재배종의 변종이라는 등 견해가 다양하다.중국학자들은 야생성이 강한 다양한 형태의 菽을 栽培 大豆처럼 이해했거나 後代의 大豆 관념을 先秦시대에 소급적용하여 菽을 해하고 있다. 중국 고대 음식 문헌인 제민 요술을 통해서 戎菽과 高麗豆와의 관계를 통하여 대두의 기원이 한반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음도 재확인했다. 

 荏菽과 戎菽에 대한 해석상의 혼란과, 특히 戎菽과의 경쟁 이후의 兩者의 존재형태가 뒤섞여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漢代 주석가들조차 혼선을 빚어왔다. 중국학자의 연구처럼 菽, 荏菽도 곧 융숙과 같은 종류이며 이것은 龍山시기부터 馴化되어 온 재배두로서 漢代의 주석가들이 이를 자연스럽게 대두로 인식했는지는 의문이다. 

 詩經속의 荏菽을 西周시대 菽의 주도적인 품종이라고 인식하고, 이를 관자管子의 戎菽과 대비시켜, 荏菽의 用度와 재배시기가 오늘날 黃大豆의 품종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음을 검토함으로써 大豆의 중국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확실한 학문적 근를 마련해야 할 것으로 생각 된다. 

 처음부터 숙류菽類를 야생두野大豆와 대두大豆로 구분하여 오늘날과 같은 大豆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시작하고 있다는 점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菽屬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단순하게 大豆라고 칭하면서 논리를 비약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대두는 단순히 크다고 해서 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만약 그런의미에서 대두의 기원을 추적한다면 대두의 기원을 밝히기는 요원할 것이다.長扁橢圓形의 大菽을 기존연구에서 大豆로 인식함으로서 대두의 기원은 西周 이전으로 소급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內地에는 없는 優良의 戎菽을 도입했다는 관자의 기록管子의 기록은 가볍게 취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春秋시대의 覇者인 齊桓公의 업적이 우습게 처리되어버렸던 것이다. 

 三國시대의 맹강孟康은史記 천관서天官書 에서는 “임숙戎菽,호두胡豆也.”라고 주석했으며, 같은 시기의 위소韋昭는 이 융숙戎菽이 대두“大豆也.”라고 하였다. 결국 荏菽과 戎菽은 모두 胡豆로서 대두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실제 爾雅 釋草편에서는 “戎菽謂之荏菽”이라고 주석하여 荏菽이 곧 戎菽이며, 晉 곽박郭璞은 융숙이 곧 호두胡豆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唐代 공영달孔穎達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해석이 대두의 기원에 혼선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 결과 詩經속의 荏菽과 후대의 戎菽은 큰 차이가 없는 대두로서 이미 西周시대부터 대두가 華北지역에서 재배되었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管子 계戒 편에서 제齊 환공桓公(BC.685-BC.643년 在位)이 “북벌산융北伐山戎, 출동초여 융숙出冬葱與戎菽, 포지 천하布之天下.”라는 문장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기원전 7세기 중엽 齊 桓公이 山戎을 정벌하여 그곳에서 융숙戎菽을 가져다가 비로소 天下에 보급했다는 이야기다.  

 사기(史記) 사기흉노열전 에 “제(齐)는 북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 지역까지 갔다가 융숙(戎菽)을 얻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623년) 융숙(戎菽)이 콩, 대두(大豆) . 특히 山戎의 위치는 “지금의 선비鮮卑지역에 위치하며 연燕을 괴롭혀 이를 토벌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山戎은 연燕의 동북,즉 하북河北 동북부, 요령遼寧 서부 및 그 동북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戎菽은 기원전 7세기 이후에 황하유역에는 없었으나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재배되어 이후 天下에 확산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太平御覽에서는 本草經을 인용하여 장건張騫이 외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호마胡麻와 호두胡豆를 가져왔는데, 호두를 戎菽이라 불렸다고 하여 戎菽을 서역 쪽에서 가져왔다고 비정하고 있다. 山戎이 연燕의 북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山戎의 위치는 “지금의 선비鮮卑지역에 위치하며 연燕을 괴롭혀 이를 토벌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山戎은 燕의 동북,즉 河北 동북부, 요령遼寧 서부 및 그 동북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戎菽은 기원전 7세기 이후에 황하유역에는 없었으나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재배되어 이후 天下에 확산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齊民要術 大豆 편의 첫머리에 북위北魏 때의 大豆의 대표격으로 “黃高麗豆ㆍ黑高麗豆”를 지적한 것과도 脈을 같이 한다.따라서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가져왔다는 胡豆는 대두가 아닌 오늘날의 잠두蠶豆라는 학자들의 지적은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 

 이처럼 戎菽이 곧 大豆라면, 菽과 大豆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앞에서 “尗, 豆也.”라는 사료에서 보듯 菽은 豆의 類이지만,융숙, 즉 大豆가 비로소 등장했다는 것과 대비해 볼 때 이 菽은 大豆와는 그 형태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맥락을 놓친 체로 중국 경학자들은 戎菽과 荏菽이 동일하다는 해석 때문에 ‘荏’의 자의 속에 ‘大’의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인식하면서 마치 詩經의 시대부터 華北지역에서는 대두가 재배되었던 것으로 오해 한 것으로 추정된다. 

 종합적으로 고려 할때 漢代 이전의 戎菽은 대개 異族의 胡豆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곳에서 생산된 菽을 大豆라고 칭한 것은 그 형태나 크기가 內地의 荏菽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荏菽이 지닌 의미는 줄기가 가늘고 덩굴을 지닌 原始型 대두로서 알맹이는 작고 검은 색이며, 잎이 작고 開花시기도 늦은 野生豆라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기원전 7세기 중엽에 齊 桓公이 戎菽을 주목하게 된 것도 화북에 존재했던 이런 荏菽과 달랐기 때문이며, 山戎지역에서 우량품종을 도입하여 天下에 보급한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大豆 植物學者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두를 山戎에서 中原으로 도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逆으로 중원에서 山戎지역으로의 도입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大豆의 품종이 위도緯度 4도만큼 북으로 올라가면, 서리가 내리기 전에 정상적으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대두는 日照量에 민감하기 때문에 남북 간보다 東西간의 전파가 훨씬 쉬웠다고한다. 

 여씨춘추 呂氏春秋·심시審時 편을 보면, 菽의 명칭이 “大菽則圓, 小菽則摶以芳”와 같이 그 크기와 형태에 따라 大菽과 小菽으로 구분하고 있다. 戎菽이 內地로 도입된 후에 그 呼稱은 기존의 菽의 이름을 借用했을 것이지만 그 차이를 밝힌 것이 呂氏春秋 辯土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진한시대 이후 豆와 菽의 실체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완전히 동일해 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 표현하지 않았던 ‘大菽’이라는 표현에서 춘추 이전의 菽사이에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크기가 작고 긴 타원형橢圓形의 각角이 진 소숙小菽은 답荅(좀콩)이라는 異名과 함께 쓰이다가 점차 小豆의 함의에 포함되면서 菽은 大豆, 小豆로 양분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된다. 특히 漢代이후가 되면 菽字의 출현빈도는 줄어들고 점차 豆의 명칭이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으며, 前漢末 범승지서氾勝之書에는 大豆와 小豆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별도의 항목을 설치할 정도로 豆에 대한 이해가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에는 豆의 출현빈도가 菽보다 현저하게 증대되는 것을 각종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공영달孔潁達의 지적과는 달리 융숙戎菽의 보급된 이후에도 후직后稷이 파종했던 숙류菽類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菽과 豆의 명칭변화는 바로 기원전 7세기 중엽 대두가 內地로 유입되어 널리 보급되면서 기존의 菽보다 圓形이며 충실하고 맛이 좋아 용도가 다양해지고 수요가 확대되어 大豆가 대표적인 존재가 되면서 菽의 기능까지 포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漢代에는 “菽, 豆也” “菽謂豆也”라는 표현과 같이 菽과 豆는 지역이나 형태상의 차이가 아닌 동일한 常用語로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이때 豆는 당연 그 代表 격인 大豆였을 것이며, 그 계기는 대두가 가공식품으로서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대두의 수요가 증가됨으로써 기존의 野生豆나 小菽類는 존재가치가 상대적으로 크게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제시한 詩經 生民 편의 “재배한 荏菽이 무성하게 잘 자랐다.[蓺之荏菽, 荏菽旆旆]”는 사료는 菽의 재배에 관한 최초의 문헌기록이지만, 이는 열매보다 잎의 수확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아울러 詩經 小雅ㆍ채숙采菽 편에는 “채숙채숙采菽采菽, 광지거지筐之筥之”라고 하여 마치 나물을 캐듯 野生 혹은 半야생의 숙엽菽葉을 부지런하게 따서 광주리에 담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를 말해주며, 君主마저 이런 상황을 유의하여 살피고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豆油와 같은 食用油 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채나 고기를 기름에 볶거나 튀기기보다 수확한 菽의 葉을 1차적으로 삶고, 무치고 生食을 하거나 국을 끓어 食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西周의 荏菽과 菽의 용도가 후대의 大豆와는 확연하게 달랐음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숙곽갱菽藿羹 중심으로 한 華北지역의 식사형태는 비슷한 시기의 南方의 초월楚越지역이 ‘반도갱어飯稻羹魚’중심이었던 것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에는 발해의 책성지역에서 메주가 만들어지고 귀한 것으로 여긴다는 기록이 확인 된다. 북한 회령지역에서 출토 되는 한반도의 탄화콩(재배콩)의 유전자 분석은 2만년까지 그 연대가 확인 되고 있다. 집안의 광개토대왕 비문과도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리(可金面) 용전리(龍田里)의 중원 고구려비문에서 확인되는 한자어<대곽大藿 >은 한반도 고대인의 콩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0
유니세프
국민 신문고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