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에 대한 라깡의 이해-라깡의 맹자주석 텍스트를 중심으로
(본문)
Un nommé MENCIUS, comme l’ont appelé les jésuites, nous dit que la question de la bienveillance de l’homme se juge de la façon suivante : sa bienveillance est naturelle à l’origine, elle est comme une montagne couverte d’arbres.
(번역)
제수이트 수사회가 명명했던 호칭으로 불리우는 맹자MENCIUS는 인간의 선함에 관한 문제가 다음과 같이 규정 될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선함은 나무로 덮혀 있는 산과같이 원래부터 자연스럽다.
(주석)
라깡이 학문적 의미에서 중국철학 특히 노장사상을 접하게되는 것은 . 중국출신의 서예가이기도 한 François Cheng 과의 교류속에서 이루어 졌다. François Cheng를 통해 장자철학을 접하게 되고 그 결과물로써 라깡 스스로 1964년에 강의했던 세미나가 1973년에 세미나 11이라는 이름으로 출판 되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스 철학계 사상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은 중국태생의 프랑스 국적자François Cheng는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된다.
여러 가지 정황상 정신분석의 윤리학이 1959년에서 1960사이에 행하여진 강의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라깡이 1960년대초에 유통되던 제수이트 수사들에 의해 라틴어와 프랑스어 번역본(1687)년을 참조해서 맹자를 접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근래에는 6종류의 라틴어 번역본을 인터넷에서 확인하여 참조 할 수 있다.)
제수이트 수사들은 Jesus나 Confucius 처럼 맹자孟子를 남성명사를 만든는 어미를 붙혀서 Mencius로 표기했는데 중국어 발음 대로 표기해서 공자孔子를 Kongzi로 표기하지 않은 것처럼 라깡은 맹자의 표기를 제수이트 수사들의 표기법에 따라 Mencius로 표기하고 있다.
라깡의 프랑스어 원문에서와 같이 라깡 스스로도 <맹자가 선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선의문제(la question de la bienveillance de l’homme )라는 표현 속에서 확인 할 수가 있다. 구체적인 내용의 전개를 라깡이 일목요연하게 맹자의 성선설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다고 확언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간의 선함(la bienveillance de l’homme )을 맹자가 문제화(la question)하고,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nous dit)고, 라깡이 직접 본문에서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번역의 어려움은 주어 <인간의 선함(그의 선함)sa bienveillance>과 <자연스럽다naturelle와 < 원래부터 à l’origine>를 조합해서 과연 천명지성天命之性의 의미를 담아내어서 우리 말로 옮길수 있는가 ? 하는 번역의 완결성에 놓여져 있다. 하늘이 명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자면 본문의 프랑스어<à l’origine >는 처음부터 혹은 영어 번역에서 확인되는 태초부터(in the beginning)로 번역 돌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天과 명命의 관계를 태초부터(in the beginning)로 번역하면 천天이 유일신적인 의미를 지나치게 지니는 번역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어<à l’origine>는 시원성始原性과 연결시켜서 <원래부터>로 번역 되었다.
프랑스어 naturelle는 라틴어 natura에서 유래했고 이 명사형natura는 ,출생하다, 돋다,돋아 나다,생기다 시작되다, 기원되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동사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어
<나무로 덮여 있는 산과같이comme une montagne couverte d’arbres >라는 라깡의 프랑스어 표현은 특정하여 어떤 이유에서 라깡이 인간의 본성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는지를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라깡 스스로 인간의 선함을 산montagne과 같은 직접적 존재 사태로 간주해서 비유적인 표현을 시도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가능성은 라깡이 제수이트 수사들이 라틴어로 번역한 맹자 번역본을 읽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라깡이 <인간의 선함bienveillance de l’homme>을 서술하면서 <산montagne>, <나무들을 베어냄par couper les arbres>, <새싹의 새롭게 자라남nouveau foisonnement de surgeons,> <그 위에 아무 것도 자라나지 않는 민둥산 une surface chauve sur laquelle rien ne pousse.>등의 표현은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편을 연상 시키고 있다.
-맹자孟子 고자상告子 8편을 참고로 명기 한다.
제8장(第八章)
孟子曰 牛山之木이 嘗美矣러니 以其郊於大國也라 斧斤이 伐之어니 可以爲美乎아 是其日夜之所息과 雨露之所潤에 非無萌蘗之生焉이언마는 牛羊이 又從而牧之라 是以로 若彼濯濯也하니 人見其濯濯也하고 以爲未嘗有材焉이라하나니 此豈山之性也哉리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었는데, 대국(大國)의 교외(郊外)이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로 매일 나무를 베어가니,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그 일야(日夜)[밤] 에 자라나는 바와 우로(雨露)가 적셔주는 바>에 싹이 나오는 것이 없지 않건마는,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되므로, 이 때문에 저와 같이 탁탁(濯濯)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탁탁(濯濯)한 것만을 보고는 일찍이 훌륭한 재목이 있은 적이 없다고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산(山)의 성(性)이겠는가.”
牛山은 齊之東南山也라 邑外를 謂之郊라 言 牛山之木이 前此固嘗美矣러니 今爲大國之郊하여 伐之者衆이라 故로 失其美耳라 息은 生長也라 日夜之所息은 謂氣化流行하여 未嘗間斷이라 故로 日夜之間에 凡物이 皆有所生長也니라 萌은 芽也요 蘗은 芽之旁出者也라 濯濯은 光潔之貌라 材는 材木也라 言 山木雖伐이나 猶有萌蘖이어늘 而牛羊이 又從而害之라 是以로 至於光潔而無草木也니라
우산(牛山)은 제(齊)나라의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읍(邑) 밖을 교(郊)라 이른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전에는 일찍이 아름다웠었는데, 지금 대국(大國)의 교외가 되어 나무를 베어 가는 자가 많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잃었음을 말씀한 것이다. 식(息)은 생장(生長)함이다. ‘일야(日夜)에 생장(生長)하는 바’라는 것은 기화(氣化)가 유행(流行)하여 일찍이 간단(間斷)하지 않으므로 일야(日夜)의 사이에 모든 물건이 다 생장(生長)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맹(萌)은 싹이요, 얼(蘖)은 싹이 곁으로 나온 것이다. 탁탁(濯濯)은 빛나고 깨끗한 모양이다. 재(材)는 재목(材木)이다. 산의 나무가 비록 베어져도 오히려 싹이 나오는데, 소와 양이 또 따라서 해치므로 이 때문에 산이 빛나고 깨끗하여 초목(草木)이 없는 데에 이름을 말씀한 것이다.
雖存乎人者인들 豈無仁義之心哉리오마는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에 旦旦而伐之어니 可以爲美乎아 其日夜之所息과 平旦之氣에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어늘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나니 梏之反覆이면 則其夜氣不足以存이요 夜氣不足以存이며 則其違禽獸 不遠矣니 人見其禽獸也하고 而以爲未嘗有才焉者라하나니 是豈人之情也哉리오
비록 사람에게 보존된 것인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그 양심(良心)을 잃어버림이 또한 도끼와 자귀가 나무에 대해서 아침마다 베어 가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일야(日夜)에 자라나는 바와 평단(平旦)의 맑은 기운에 그 좋아하고 미워함이 남들과 서로 가까운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낮에 하는 소행이 이것을 곡망(梏亡)하니, 곡망(梏亡)하기를 반복하면 야기(夜氣)가 족히 보존될 수 없고, 야기(夜氣)가 보존될 수 없으면 금수(禽獸)와 거리가 멀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그 금수(禽獸) 같은 행실만 보고는 일찍이 훌륭한 재질(材質)이 있지 않았다고 여기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실정(實情)이겠는가.
良心者는 本然之善心이니 卽所謂仁義之心也라 平旦之氣는 謂未與物接之時淸明之氣也라 好惡與人相近은 言得人心之所同然也라 幾希는 不多也라 梏은 械也라 反覆은 展轉也라 言 人之良心이 雖已放失이나 然이나 其日夜之間에 猶必有所生長이라 故로 平旦未與物接하여 其氣淸明之際에 良心이 猶必有發見者라 但其發見至微하고 而旦晝所爲之不善이 又已隨而梏亡之하니 如山木旣伐에 猶有萌蘗이어늘 而牛羊이 又牧之也라 晝之所爲가 旣有以害其夜之所息하고 夜之所息이 又不能勝其晝之所爲라 是以로 展轉相害하여 至於夜氣之生이 日以薄하여 而不足以存其仁義之良心이면 則平旦之氣亦不能淸하여 而所好惡遂與人遠矣니라
양심(良心)은 본연(本然)의 선(善)한 마음이니, 바로 이른바 ‘인의지심(仁義之心)’이란 것이다. 평단지기(平旦之氣)는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의 청명(淸明)한 기운을 이른다. 호오(好惡)가 남들과 서로 가깝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똑같이 옳게 여기는 바를 얻음을 말한다. 기희(幾希)는 많지 않음이다. 곡(梏)은 틀이다. 반복(反覆)은 전전(展轉)함이다. 사람의 양심(良心)이 비록 이미 방실(放失)되었으나, 일야(日夜)의 사이에 그래도 반드시 생장(生長)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평단(平旦)에 사물과 접하지 않아서 그 기운이 청명(淸明)할 때에는 양심(良心)이 반드시 발견(發見)[현] 되는 것이 있다. 다만 그 발견(發見)됨이 지극히 미약한데 낮에 하는 바의 불선(不善)이 또 이미 따라서 곡망(梏亡)시키니, 이것은 마치 산의 나무를 이미 베어가도 오히려 싹이 돋아나나,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방목됨과 같은 것이다. 낮에 하는 행위가 이미 밤에 자라는 바를 해치고, 밤에 자라는 바가 또 낮에 하는 바의 나쁜 행위를 이기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전전(展轉)하여 서로 해쳐서 야기(夜氣)가 생겨나는 것이 날로 점점 박(薄)해져서 인의(仁義)의 양심(良心)을 보존할 수 없는 데에 이르면, 평단(平旦)의 기운도 또한 맑지 못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가 끝내 남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故로 苟得其養이면 無物不長이요 苟失其養이면 無物不消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기름을 잘 얻으면 물건마다 자라지 못함이 없고, 만일 그 기름을 잃으면 물건마다 사라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山木, 人心이 其理一也라
산의 나무와 사람의 마음이 그 이치가 같은 것이다.
孔子曰 操則存하고 舍則亡하여 出入無時하며 莫知其鄕은 惟心之謂與인저하시니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셨다.”
孔子言 心은 操之則在此하고 舍之則失去하여 其出入이 無定時하고 亦無定處如此라하시니 孟子引之하여 以明心之神明不測이 得失之易而保守之難이라 不可頃刻失其養하시니 學者當無時而不用其力하여 使神淸氣定하여 常如平旦之時면 則此心常存하여 無適而非仁義矣리라 程子曰 心豈有出入이리오 亦以操舍而言耳니 操之之道는 敬以直內而已니라
○ 愚聞之師하니 曰 人理義之心이 未嘗無하니 惟持守之면 卽在爾라 若於旦晝之間에 不至梏亡이면 則夜氣愈淸이요 夜氣淸이면 則平旦未與物接之時에 湛然虛明氣象을 自可見矣니라 孟子發此夜氣之說하시니 於學者에 極有力하니 宜熟玩而深省之也니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잡으면 여기에 있고, 놓으면 잃어버려서 그 출입이 정해진 때가 없으며, 또한 정처(定處)가 없음이 이와 같다.” 하셨는데, 맹자(孟子)께서 이것을 인용하여, 마음이 신명(神明)하고 측량할 수 없어 득실(得失)[잃음] 이 쉽고 보존하여 지킴이 어려워서, 잠시라도 그 기름을 잃어서는 안됨을 밝히신 것이다. 배우는 자가 마땅히 때마다 그 힘을 쓰지 않음이 없어서, 정신이 맑고 기운이 안정되게 하여, 항상 평단(平旦)의 때와 같이 한다면,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가는 곳마다 인의(仁義) 아님이 없을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마음이 어찌 출입이 있으리오, 이 또한 잡아두고 놓음으로써 말씀했을 뿐이니, 마음을 잡는 방법은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는 것일 뿐이다.”
○ 내가 스승에게 들으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사람은 의리(義理)의 마음이 일찍이 없지 않으니, 오직 이것을 잡아 잘 지키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알 낮 사이에 곡망(梏亡)시키는 데에 이르지 않는다면 야기(夜氣)가 더욱 맑아질 것이요, 야기(夜氣)가 맑아지면 평단(平旦)에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에 담연(湛然)히 허명(虛明)한 기상(氣象)을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맹자(孟子)께서 이 야기(夜氣)의 말씀을 발(發)하셨는데 배우는 자들에게 지극히 힘이 있으니, 마땅히 익숙히 보고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본문)
Seulement, il y a des habitants dans les environs qui ont commencé par couper les arbres,
단지 주변에는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던 거주자들이 있습니다.
(본문)
le bienfait de la nuit est de rapporter un nouveau foisonnement de surgeons, mais au matin les troupes viennent qui les dévorent, et finalement la montagne est une surface chauve sur laquelle rien ne pousse.
밤의 축복이 그루터기의 새싹들을 새롭게 자라나게 하지만 아침이 되면 무리들이 다시 찾아 와서는 (모두)먹어버린 산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다.
( 주석 )
라깡이 맹자 고자상 제 8편을 독했다고 가정 한다면, 본문 가운데 프랑스어 <밤의 축복le bienfait de la nuit>은 맹자 고자상 8편의 < 그 일야(日夜)[밤] 에 자라나는 것과 우로(雨露)가 적셔주는 것是其日夜之所息 雨露之所潤)>을 의미하게 된다. 아울러 아침이 되면 다시 찾아 오는 <무리들les troupes>은 맹자 고자상 8편중에서 확인 되는 소牛와 양羊을 의미하게 된다(而牛羊 又從而害之).
(본문)
Je vous ai parlé tout à l’heure de MENCIUS. MENCIUS explique très bien, après avoir tenu ces propos que vous auriez tort de croire optimistes sur la bonté de l’homme, comment il se fait que ce sur quoi on est le plus ignorant, c’est sur les lois en tant qu’elles viennent du ciel, les mêmes lois qu’ANTIGONE.
나는 이미 앞에서 맹자에 대해 말한바 있습니다.
맹자는 여러분들이 인간의 선함을 낙관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일 수 있다고 술회 합니다. 이러한 언급을 한 후에 맹자는 우리가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즉 안티고네의 법과 같이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법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 한지를 아주 훌륭하게 설명합니다.
(주석)
라깡은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유래하는)viennent du ciel,> <법들les lois>과 <안티고네의 법들lois qu’ANTIGONE>을 <동일한 것 les mêmes> 프랑스어 본문 가운데서 병치 시키고 있다.
테바이의 왕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장례식을 치러 주었던 안티고네는, 폴리스 즉 국가의 법을 어겨가면서 까지 국가의 법보다는 자신이 결정한 내면성의 결정을 관철 시킨다.배반자의 장례식을 금지시킨 폴리스의 법적 권위는 폴리네이케스의 장례식을 안티고내가 치러 냄으로써 부정되고 국가에 대한 인륜성Sittlichkeit의 위력이 확인 된다.
라깡이 말하고자 하는 <안티고네의 법들lois qu’ANTIGONE>은 여기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의미 하는가 ?
<안티고네의 법들lois qu’ANTIGONE>은 자신의 유한성의 한계 지점(죽음)까지 내면의 결정을 결국 관철시려 했던 안티고네의 순수 욕망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닐까 ? 따라서 <안티고네의 법들lois qu’ANTIGONE>이 안티고네의 순수한 욕망을 의미 한다면 이 경우 , 안티고네의 순수 욕망은 법들lois이 아니라 쥬이상스Jouissance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 까 ?
안티고네의 순수 욕망은 법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욕망함으로 이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까 ?
(본문)
Il en donne une démonstration absolument rigoureuse.
맹자는 이것에 관하여 엄밀하고 절대적인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Il est trop tard pour que je vous la dise ici. Les lois du ciel en question, ce sont bien les lois du désir.
여기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리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하늘의 법들이란 바로 욕망의 법들입니다.
여기서 라깡이 말하고 있는 <욕망의 법들les lois du désir>은 라깡 스스로 칸트와 사드를 다루 고 있는 맥락에서 이해 되어야 할 까 ?아니면 상징계와 상상계사이의 관계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 가 ?
라깡은 <세미나7 정신분석의 윤리학L'éthique de la psychanalyse>에서 오로지 한번 <욕망의 법들les lois du désir>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것도 <하늘의 법들Les lois du ciel>과 병치 시켜서 <욕망의 법들les lois du désir>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문맥상 <하늘의 법들>이 부여 된 것으로서 맹자의 천명지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라깡이 말하는 <욕망의 법들les lois du désir>도 부여 된 어떤 법칙을 의미 한다고 주장 할 수 있을 까 ?또한 여기서 라깡이 말하는 <욕망의 법들les lois du désir>은 쾌락의 원리나 불쾌의 원리(프로이트)로도 치환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