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근의 풍속화 <국수누르는 모양> 구글 이미지
1. 탕병회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관혼상제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태어나서 삶의 주기마다 겪게 되는 의례였다. 관례(冠禮)란 태어난 아이가 성인이 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공식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례였으며, 댕기를 풀어서 상투를 틀고 그 위에 갓(冠)을 씌우는 것으로 거행되는 예식이었다. 전통적으로 혼례(婚禮)는 남녀 개인 간의 결속 예식일 뿐만 아니라 가문 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의례였으며, 상례(喪禮)는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례로 묘를 쓰고 탈상의 과정을 모두 마치는데 100일에서 3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제례(祭禮)는 상례를 치른 고인을 살아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기억의 공간으로 환원시키는 예식이다. 상례는 고인을 공동체에서 분리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어서 흉례에 해당하지만, 제례는 공동체의 기억 공간에서 조상이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가족으로 초대하는 축제이기 때문에 길례에 해당된다. 유교문화권에 속한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관혼상제는 이처럼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의 생애의 주기를 구별해주는 의례 행위였다. 하지만 생애 주기를 구획해주는 관혼상제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새로운 구성원의 탄생을 전제로 가능했는데, 관혼상제의 유교적 의례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새로운 구성원의 출생을 모두가 축하하는 의례를 우리 조상들은 탕병회라고 지칭했다. 오늘날의 돐 잔치에 해당한다.
오늘날 치러지는 돌잔치는 새로운 구성원이 첫 일년을 무탈하게 지내는 아이의 첫 번째 생일을 기준으로 치러지지만,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탕병회는 아이가 태어난 지 3일, 그리고 100일, 그리고 첫 돌을 기준으로 마련되었다.
1.1 탕병의 의미
탕병회의 탕병은 우리말 한글로 국수를 의미하고 회는 한자로 모일회 즉 회합을 의미 한다.
탕병회는 국수를 먹는 회합정도로 해석 될 수 있다.그러나 탕병을 먹는 것이 반드시 아이의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은 아니였다. 여유가 있는 서울 장안의 권문세가의 집에서는 겨울철에 즐기는 별미의 음식이도 했는데 겨울에 먹는 탕병 즉 국수는 온면의 형태로 마련되었는데 허균의 도문대작에 겨울철 온면 형태의 탕병이 확인 된다.
"서울에서 철따라 먹는 음식으로는 봄에는 쑥떡ㆍ송편ㆍ괴엽병(槐葉餠)ㆍ두견화전(杜鵑花煎)ㆍ이화전(梨花煎)이 있고, 여름에는 장미전(薔薇煎)ㆍ수단(水團)ㆍ쌍화(雙花)ㆍ만두(饅頭)가 있고, 가을에는 경고(瓊糕)ㆍ국화병(菊花餠)ㆍ감과 밤을 섞어 만든 찰떡[糯餠]이 있으며, 겨울에는 탕병(湯餠)이 있는데 자병(煮餠)ㆍ증병(蒸餠)ㆍ절병(節餠)ㆍ월병(月餠)ㆍ삼병(蔘餠)ㆍ송고유(松膏油)ㆍ밀병(蜜餠)ㆍ설병(舌餠) 등은 사시 내내 만들어 먹는다.밀병(蜜餠)은 약과(藥果)ㆍ대계(大桂)ㆍ중박계(中朴桂)ㆍ홍산자ㆍ백산자ㆍ빙과(氷果)ㆍ과과(瓜果)ㆍ봉접과(蜂蝶果)ㆍ만두과(饅頭果) 등으로이는 모두 제사나 손님 접대에 사용한다. (都下時食。春有艾糕,松餠,槐葉餠,杜煎,梨花煎。夏有薔薇煎,水團,雙花,小饅頭。秋有瓊糕,菊花餠,柹栗糯餠。冬有湯餠。而煮餠,蒸餠,節餠,月餠,蔘餠,松膏油蜜餠,舌餠等味。通四時。而蜜餠則藥果,大桂,朴桂,紅白散子氷果,瓜果,蜂蝶果,饅頭果。皆用於享祀賓讌。絲麪則有吳同者善造。故至今稱之)"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겨울철에 별미로 즐겼던 탕병을 언급하면서 다른 종류의 병餠들을 자병(煮餠)ㆍ증병(蒸餠)ㆍ절병(節餠)ㆍ월병(月餠)ㆍ삼병(蔘餠)ㆍ송고유(松膏油)ㆍ밀병(蜜餠)ㆍ설병(舌餠)등을 소개 하고 있는데 , 이러한 허균의 언급은 탕병을 병과류의 한 종류가 아니라 국수로 지칭하기에는 보다 면밀한 분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오래된 음식 조리서로 1450년경 어의(御醫) 전순의(全循義, 생몰연대 미상)가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세면(細麪)이라는 국수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다. 이 역시 녹두가루를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다.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아언 각비에서 麪면에대한 서술을 하고 있는데 아언각비 한문 원문에도 탕병이라는 표현은 확인 되지 않는다.
면이라 것(麪者)은,밀가루(麥末)를 일컫는다。. 서진(西晉)때의 학자 속철(束晳)이 쓴 맥부- 2 (麪賦)의 기록에 의하면, 고운 채로 걸은 밀가루는 매우 곱고 흰 눈처럼 날린다고 하였는데 밀의 가루(麥屑)를 지칭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밀 가루를 진말(眞末)이라고 지칭 한다. 우리나라말로는 진가루(眞加婁)라고 지칭 하고 , 또한 면이라고 하면 응당 음식에 대한 명칭 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면을 국수(匊水)라고 지칭한다. 이것은 잘못 된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칼로 썬 것을 일컬어 절면(切麪)이라 고 지칭하고 압착하여 눌러 뽑은 것을 일컬어 접조면(摺條麪)이라고 지칭하고 마른 것을 괘면(掛麪)이라고 지칭 한다.
그러나 반드시 밀가 루로만 면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남송 시대 문인 임홍(林洪)이 저술한 "산가청공(山家淸供)" 에는 두면(豆麪)이 확인 된다. 육우(陸游)의 시에 촌의 주막에서 교면(麥喬 麵,메밀국수)을 판 다는 것이 확인 된다. 예기禮記 월령광의(月令廣義)에 녹두면(菉豆麪, 녹두국수)이 확인 된다. 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에 호마면胡麻麪(깨국수)이 확인 된다. 왕건의 시에 맑은 샘물에 갈면葛麪(칡국수)을 말았다는 기록이 확인 된다. 또한 예기 월령강의 月令廣義에 능면菱麪의 기록이 확인 된다. 사면莎麪은 사목 나무의 가루로 만드는데 사목나무 가루는 남번국 바깥나라南番外國에서 나 온다.
(역자주: 남번국南番國은 실학자 지봉(芝峰) 이수광이 지은 백과전서에 해당하는 지봉유설에 의하면 네덜란드를 지칭한다. 사목가루는 사고야자나무의 고갱이에서 추출한 전분. 가공하여 타피오카 펄처럼 '사고 펄(sago pearl)'을 만들기도 하는데, 망고 포멜로 사고, 사고 푸딩 등 다양한 음료 및 디저트의 식재료로 쓰인다.) 유면(楡麪)은 느릅나무의 흰 껍질을 벗겨서 만든다. 괴엽면(槐葉麪)은 육유의 시에 기록이 확인된다. (역자주: 육우의 원문에는 괴엽면(槐葉麪)의 표기는 확인되지 않고 <凍齏此際價千金,不數狐泉槐葉面>에서처럼 괴엽면이 확인된다. 자연스럽게 홰나무잎의 넓은 면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다산의 오기를 바로 잡는다.)
麪
麪者,麥末也。束晳〈麪賦〉云:“重羅之麪,塵飛雪白。” 麥屑之謂也。東人麥屑曰眞末。【方言眞加婁】 而麪則認之爲食物之名,【方言曰匊水】 誤矣。然中國亦然,其刀切者名曰切麪,其榨壓者名曰摺條麪,其乾者名曰掛麪。亦未必麥末爲麪也,有豆麪,【見《山家淸供》】 麪,【陸游詩云:“村店賣麪。”】 有菉豆麪,【見《月令廣義》】 胡麻麪,【《物類相感志》】 葛麪,【王建詩云:“濾泉調葛麪。”】 菱麪,【見《月令廣義》】 莎麪,【莎木之屑也,出南番外國】 楡麪,【刮白皮爲之】 槐葉麪,【陸游詩云:“不數狐泉槐葉麪。”】 萊菔麪,【萊菔去麪毒】 萱草麪,【汴中臘日食】 百合麪,【見《山家淸供》】 桐皮麪,【東京之俗食】 蓬子麪,【《唐書》云:“關東大旱,飢民食之。”】 桄榔麪,【西蜀人刮皮取屑】 汗漫久矣
아언각비에서 주목할 만한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국수라는 단어를 우리식 한자어 국수(匊水)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식 한자어 국수(匊水)는 중국식 한자어 국掬에서 손수(手) 변을 탈락시켜 국수(匊水)로 표기하고 발음하고 있지만, 국匊와 국掬의 차이는 대등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액체를 떠내는 기구를 국자(匊子)라고 지칭하는 것도 국匊와 국掬 모두 양손으로 모아 물을 떠내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민간에서 '양손으로 물을 뜬다'는 단어인 동사 국수(掬水)가 면발을 끓는 물이나 육수에서 건져내어 먹는다는 의미로 차용되면서, 중국어 동사 국수(掬水)는 면류를 지칭하는 명사 국수(掬水)로 그 의미를 확장했다.
중국에서 면은 밀가루 또는 밀가루로 만든 요리를 의미하고, 밀가루를 가늘고 길게 가공한 식품인 국수는 미엔땨오(麵條), 또는 미엔땨오아(麵條兒)라고 하였다. 화북 지방에서는 면조, 면조아를 많이 쓰고, 남방에서는 면(麵)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다. 석모직도(石毛直道)는 면은 곡물, 콩류 등의 가루를 주 원료로 해서 길고 가늘게 가공한 식품으로 원칙적으로 삶거나 끓여서 주식 혹은 준 주식 정도 요리의 주 재료로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도 나중에는 면이 밀가루 이외의 곡류로 의미가 넓게 확대되어 다른 곡물의 가루로 만든 것도 면이라고 하게 되며, 소미면(小米麵)은 좁쌀가루로, 황미면(黃米麵)은 기장 쌀가루 등으로 만든 면이라고 하게 되며, 남송에서는 쌀을 원료로 한 국수도 있었다.
고대 중국의 민간에서는 탕병이라는 지식층의 용어보다는 국수나 면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다산은 면이 원래 밀가루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조선 사람들은 밀가루를 진말 또는 진가루라고 부르며,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통칭하여 면이라고 부른다고 명시하면서 이러한 면에 대한 명칭이 잘못되었다고 설명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면과 국수라는 단어가 함께 또는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2 탕병의 어원
그렇다면 탕병회에서 탕병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유래되었을 까?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탕병 이전에 맥반(麥飯), 즉 밀은 최초의 밥이었다. 밀과 보리의 식용은 처음에 다른 곡물들처럼 알곡으로 밥을 해먹는 형태였다. 사적에는 '맥반'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많다. '맥(麥)'의 식용 역사는 현재까지 고고학 발굴과 역사 문헌 연구의 성과로 볼 때 격류(鬲類, 솥)의 조리기구 발명과 사용 역사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다시 말해 당시 ‘오곡’ 또는 ‘백곡’ 등 여러 곡물과 마찬가지로 밀 역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는 뜻이다. 물론 ‘자맥(炙麥)’, 즉 밀을 구워서 먹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삶거나 끓여 먹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대에는 보리나 밀 알갱이를 끓여 먹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었으며, 병이(餠餌)나 맥반, 감두갱(甘豆羹)이 백성들의 일상적인 음식이었다. '맥반은 밀을 껍질과 함께 갈아서 밥을 짓는 것이다. 감두갱은 쌀뜨물과 팥을 삶은 것이다. 햇밀로 밥을 하면 부드럽고 윤기가 흐르며 향이 좋을 뿐더러 제철 음식이기 때문이다.' 소식의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성 서쪽에서 친구가 온다는 기별이 있어 황급히 집안을 소제하고 맥반을 지었네(城西忽報故人來, 急掃風軒炊麥飯).' 또 육유의 시에도 '맥반'이 나온다. '날은 길고 곳곳마다 앵무새 소리, 풍년 들어 집집마다 맥반 향기(日長處處鶯聲美, 歲樂家家麥飯香).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는 병류餠類의 종류가 백병白餠, 소병燒餠, 수병髓餠, 고환膏環, 계압자 병鷄鸭子餠, 세환병細環餠, 절병截餠, 수인水引, 박탁馎饦, 기자면棋子麵, 분병粉餠 등과 같이 세분화되기 시작한다. 한 나라 이전에 밀麵은 밀가루 반죽 형태의 병餠으로 조리되지 않고 쪄서 오늘날의 쌀밥 형태로 식탁에 올랐는데 맥반麥飯이라고 지칭되었다. 중국 고대 사전인 석명釋名에 의하면 병餠은 밀가루를 물에 개어 반죽한 것을 지칭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옛날 중국의 한나라 때 사람들은 모양이나 만드는 방법과 무관하게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것을 통칭하여 '병'이라고 했다.
병이 주식으로 일상적인 음식이 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한나라 이전이지만 이때의 병餠은 국수의 면 형태가 아닌 반죽인 병을 쪄낸 음식을 의미했다. 춘추전국시대에 탄수화물인 조, 기장, 수수 등을 일차적으로 시루에 찌고 다시 물에 끓여 중국인들이 섭취했는데, 시루에 찌는 조리 방법이 밀을 가루 내고 물로 반죽하여 쪄내는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신석기 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증陶甑(진흙을 구워 만든 시루)은 비록 전용 찜기이기는 하지만 그 용도는 주로 낱알을 쪄서 '밥'을 만드는 것이지 가루를 쪄서 '만두' 등과 같은 식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어떤 학자는 시경·패邶風·백주柏舟에 나오는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니 이리저리 구를 수 없고(我心匪石, 不可轉也).'라는 구절을 들어 중국에서 춘추 시대 이전에 이미 맷돌이 발명되어 곡물을 가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중국에서 밀을 제분하여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분식의 등장을 한나라 이전으로 확정하는 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오 늘날의 벼와 비교해서 찌고 다시 끓인 조, 기장, 수수 등은 식감이 거칠고 목넘김이 부드럽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국(羹)과 함께 먹게 되었는데, 이러한 음식 관행 food practice 은 동북아시아에 밥과 국이라는 식습관의 패턴을 만들기도 했다. 한나라 이전에 병餠에 대한 기록은 춘추시대의 문헌인 묵자·경주耕柱편에서도 확인된다. "묵자가 노양(魯陽) 문군(文君)에게 말했다. '지금 여기에 어떤 사람이 양과 소 등 가축을 잘 길렀습니다. 요리사에게 그것을 잡아 요리를 만들게 하여 먹었는데 이루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만든 떡을 보고는 얼른 그것을 훔치면서 말하기를 '내게도 먹을 것을 좀 줘야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기름진 음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에게 도둑질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까?' 노양 문군이 대답했다. '도둑질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오.' (子墨子謂魯陽文君曰, 今有一人于此, 羊牛犓㹖. 維人但割而和之, 食之不可勝食也. 見人之作餅, 則還然竊之, 曰舍余食. 不知日月安不足乎, 其有竊疾乎. 魯陽文君曰, 有竊疾也./ 墨子,耕柱)" 묵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밀가루 반죽을 쪄낸 병餠은 병餠을 만드는 것을 보는 사람이(見人之作餅) 얼른 그것을 훔쳐서 달아날 정도로 진귀한 음식임을 알 수 있으며, 이렇듯 이미 오래 전부터 병은 각종 밀가루 음식의 범칭이었다. 이러한 병餠의 분화는 한나라 때에 접어들면서 찌거나 불에 굽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후 만드는 방법이나 모양에 따라 구분하여 불로 구워 먹는 것은 소병燒餠, 물에 삶아 먹는 것은 탕병湯餠, 소쿠리에 쪄서 먹는 것은 증병蒸餠, 만두처럼 만들어 먹는 것은 농병籠餠이라고 병을 세 분하여 지칭하게 된다.
한나라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삶거나 화로에 구워 만든 각종 병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 고 한나라 때 병이 나온 것은 아니다. 늦어도 춘추 시대에 이미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예 를 들어 묵자·경주耕柱 에 보면, “사람 이 병을 만드는 것을 보면 놀란 눈을 하고 훔친다(見 人之作餠, 則還然竊之).”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렇듯 이미 오래 전부터 병은 각종 밀가루 음 식의 범칭이었던 것이다.
이후 만드는 방법이나 모양에 따라 구분하여 ‘증병蒸餠’, ‘탕병湯 餠’, ‘호병胡餠’ 및 ‘갈병蝎 餠’과 ‘삭병索餠’ 등 구체적인 이름이 생겨났다. 그래서 송나라 사 람 황조영黄朝英에 따르면, “무릇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모두 병이라고 한 다 동한 시기의 ‘삭병索餠’은 칼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주물러서 길고 가늘게 만든 면발 형태인데 당시의 ‘삭병’은 주방에서 요리사가 직접 만들어 끓는 물에 넣어 삶았다. 당시 국수를 삶는 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삼생三牲(소, 돼지, 양)을 삶은 국물” 등과 같은 고기국물이며, 적어도 상류사회나 시장에서 영업할 때는 이런 국물을 사용했다. 중국 고대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동한에서 위진남북조까지 대략 5,6세기 동안 ‘삭병’을 시작으로 ‘수인면’이 전형적인 국수의 대표 자리를 이었으며, 줄곧 모든 이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고 ‘탕병湯餠이라는 지칭은 삶은 국수를 일반 명사가 되었다. 고대 중국의 동한 시대 이후인 5세기에서 가사협이 저술한 제민요술에는 국수(水引)에 대한 상세한 최초의 레시피가 최초로 확인된다.
“ 고운 비단 체로 친 밀가루를 사용하고, 간을 맞춘 고기 국물을 식혀서 반죽에 사용한다. 수인(국수)은 반죽을 주물러 젓가락 굵기로 만들고 길이를 1자로 잘라서 쟁반에 물을 붓고 담근다. 적당한 상태가 되면 납작하고 밑이 평평한 솥 위에서 손으로 눌러 부추 잎처럼 얇은 납작한 면발을 만들고 끓는 물에 넣어 삶는다. 잘 반죽한 면을 부드럽게 치대어 가늘고 긴 면발을 만든 다음 다시 1자 길이로 잘라 맑은 물이 담긴 쟁반에 담근다. 솥에 물이 끓어오르면 그 옆에서 면발을 밀어 부추 잎처럼 얇고 납작한 형태로 만들어 끓는 물속에 넣는다.”
(水引、餺飩法 細絹篩麵,以成調肉汁,待冷之。 水引:如箸大,一尺一斷,盤中盛水浸。宜以手臨上,令薄如葉,逐沸。 :如大指許,二寸一斷,著水盆中浸。宜以手向盆旁使極薄,皆急火逐沸熟。非直光白可愛,亦自滑美殊常)
가사협이 살았던 당시 대나무등으로 만든 젓가락의 길이가 30cm, 굵기가 5mm였다는 것을 기준으로 수인면의 길이가 75cm와 굵기 1cm였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수인면’과 재료나 만드는 방법이 유사하되 좀 더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박탁餺飥’ 즉 우리말로 수제비가 등장한다. 박탁餺飥의 레시피를 소개한다. “반죽을 주무르고 비벼서 엄지손가락 굵기로 만들어 2치 정도 길이로 자른 다음 동이에 물을 붓고 담근다. 적당한 상태가 되면 동이 옆에서 손으로 주물러 아주 얇게 만든 후, 아주 센 불에서 물이 끓어오르면 넣어 삶아 익힌다. 이렇게 면을 삶아 내놓으면, “새하얗게 윤기가 있어 좋을 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맛있다.
박탁馎饦은 불탁, 탕병이라고도 하며 면류는 모양과 함께 고대 이름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당나라 시절에는 냉면을 냉타오라고 불렸고 송나라 이후에는 면류라고 지칭되었다. 박탁馎饦이 일본에 전래된 후 야마나시현의 향토 요리로 자리 잡게 된다. 북송대에는 면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반죽을 손으로 쳐서 면을 뽑는 납면이 발명되면서 국수다운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면은 탕병의 하나에서 분리되어 밀가루 자체를 가리키는 면이라는 이름으로 되고, 이것이 납면류, 절면 등으로 분화되었다. 중국의 국수에 대한 분류는 소맥분류와 쌀가루, 메밀, 옥수수, 고량 등의 비 소맥분류로 나누어졌다. 중국의 면의 주재료는 밀가루이지만, 쌀가루, 메밀가루, 녹두 전분 등으로 만든 면이 나 밀가루에 다른 재료를 섞어 만든 면도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 면이 발달해 있다. 중국 면의 분류법은 재료의 종류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제면법에 따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국에서는 면을 만들 때 주재료인 밀가루에 물 이외에도 소금, 달걀 등을 넣는다. 특히 소금 외에 '첸'이라는 천연 소다를 물에 녹여서 반죽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면 면의 탄력성이 더해져 부드러워지고, 면의 색이 황색이 되어 '황면'이라고 불린다. 중국 북부의 밀 생산 지역은 알칼리성 토양이어서 물도 강한 알칼리성이며, 이러한 풍토에서는 천연 소다수에 대한 선호가 생겨났다. 중국에서도 북부 지역에서는 천연 소다수를 넣지 않는 반면, 남부에서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남부에서는 물이 산성이기 때문에 천연 소다수로 중화시키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달걀을 넣어 반죽하기도 한다. 물 없이 오직 달걀만으로 반죽한 것이 '전체 달걀 면'인데, 그중에서도 관동성의 '이후우 면'이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달걀만으로 반죽하는 법과 달걀과 소량의 천연 소다수를 섞어 만드는 법 두 가지가 있다. 달걀을 넣으면 반죽이 어려워지고 국수에 끈기가 적어 부서지기 쉽다. 밀대로 밀어 칼로 자르는 것은 일반적인 칼국수와 같다. '이후우 면'의 특징은 기름에 튀기는 방법으로, 절단된 면을 한 묶음씩 기름에 넣어 튀기거나 먼저 데쳐서 튀기는 방법이 있다. 그대로 두면 부서지기 쉬우므로 튀겨서 굳히는 것이다.
그 결과 수분이 증발되어 건면처럼 보관하기가 쉬워진다. 먹을 때는 끓는 물에 살짝 익힌다. 튀겼을 때 면이 부풀고 기포가 생겨 다공질이 되어 있으므로, 끓는 물이 면에 침투해도 익히는 시간이 짧아도 괜찮다. 인스턴트 라면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인스턴트 라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제면법에서 중국 사람들은 국수를 '늘인다(伸)'고, 중국집 주방에서 국수 발 빼는 것을 보면 반죽한 밀가루를 가락가락 늘려서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늘이는 제면법인 납면(拉麵, 라면)법 외에도, 소면(素麵)법, 절면(切麵)법 등으로 분류된다. 손으로 늘린 납면(라면)법-수인병(水引餠) 이 방법은 면 만들기의 원초적인 방법으로, '제민요술'의 수인병이 그 원형이다. 3세기경부터 이 기술이 존재해왔다고 본다. 화북 평야의 밀 경작 지대에서 성립된 기법이다. 손으로 밀어 만든 '라면'은 산동성, 산서성, 섬서성이 유명하며 현재도 중국 각지에서 만들어진다. '론슈이면'은 손으로 늘려서 만든 것 중에서 가장 가느다란 라면이다. 잡아당기면 16,384가닥이 된다. 잡아당기면 길이가 41 km에 이른다고 한다. 한 번도 끊기지 않고 14번 잡아당기기 위해서는 그날의 날씨와 반죽의 상태와 집중력이 모두 맞아야 비로소 실현이 가능하다. ‘론슈이면’은 약 2분간 살짝 기름으로 튀겨서 설탕이나 깨를 뿌려 고급 연회의 디저트로 먹는다..
1.3 소면(素麵)법-索麵 그리고 간략한 중국의 면류의 역사
밀가루 반죽을 한 개의 긴 끈 모양으로 늘리고 마르지 않게 식물성 기름을 발라두고, 이 끈으로 2개의 막대기를 칭칭 감는다. 막대기 한 개를 고정시켜 놓고, 한 쪽의 막대기를 잡아당기면 감아둔 밀가루 반죽이 한꺼번에 늘어나 가늘게 된다. ‘색면(索麵, 동아줄 색(삭), 새끼 꼬다)’은 북송 시대의『중궤록(中饋錄)』에 처음 나오고, 원대의『거가필용사류전집』에 만드는 법이 기록되었다.
색면의 북경어 발음은 ‘스오미엔’이다. 『거가필용사류전집』의 색면은 소금과 기름을 섞어 밀가루를 잘 반죽해 둔다. 먼저 기름을 바르면서 가는 끈 모양으로 만든 후 기름 종이로 싸서 또 재워 둔다. 막대기에 감아 잡아 늘린 후 말린다. 또는 기름 대신 싸래기가루를 뿌리면서 끈 모양으로 잡아 늘리는 법도 있다고 하였다. 현재 중국에서 소면 계열의 면은 복주(福州)나 아모이(廈門) 등 복건성(福建省)에서 많이 만들어진다. ‘미엔센(麵線)’ 또는 ‘센면(線麵)’이라고 불린다. 절면(切麵)법은 칼국수 가장 일반적인 제면 기술로, 중국에서는 한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이 방법으로 면을 만드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면을 ‘첸면(切麵)’이라고 한다. 『거가필용사류전집』의 ‘경대면(經帶麵)’은 폭이 넓게 자른 면이다. 밀대를 사용해 반죽을 펴고 칼로 썰어 만드는 면을 ‘칸미앵(桿麵)’이라고 한다.
1.4 중국면의 변천과 종류
한나라 시대 중국에 밀이 들어오고, 밀가루를 면(麵, 국수 면/麪밀가루 면, 현재는 국수 면)이라 하였고, 면으로 만든 제품을 통틀어 병(餠, 떡 병)이라고 하였다. 제분 기술의 발달로 밀가루 음식이 보편화되었고, 중국의 분식은 병과 알로 대별되어 밀가루를 원료로 하는 것을 병, 그 외의 전분으로 만든 것을 알이라고 하였다. 병은 병이라고도 하며, 각종 면식(麵食, 가루로 만든 음식)의 총칭이라고 하였다. 병은 『석명』에 합치는 것, 밀가루를 반죽해 뭉치는 것이다. 호병(胡餠)은 거북등을 포갠 것처럼 만들고, 깨를 위에 뿌린 것이라고도 한다. 증병(蒸餠), 탕병(湯餠), 갈병(蝎餠), 수병(髓餠), 금병(金餠), 색병(索餠) 등의 종류가 있다.
명나라 왕삼빙(王三聘)의 『고금사물고』에 “잡기에서 말하기를 면으로 만든 것을 모두 병이라 한다. 불에 구운 것을 바병, 물에 담근 것을 탕병, 찐 것을 증병이라 한다. 이들은 한․위대에 비로소 나타난 말인 것 같다”고 하였다. 병의 종류에는 증병, 탕병, 갈병(蝎餠), 수병(髓餠), 금병, 색병 등이 있으며, 색병은 탕병에 기초하여 발전된 한대 초기에 보이는 면의 형태이다. 탕병은 탕에 넣어 삶는 병이라는 의미로 밀가루 반죽을 한 손에 잡고 한 손으로 뜯어서 솥에 넣어 끓이는 면편탕(麵片湯), 즉 일종의 수제비 형태인데, 이 것이 후에 얇아지고 가늘어져 ‘면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한대에는 병을 먹는 습관이 더욱 유행하였고, 병 이외에도 가루를 이용하여 만드는 ‘계’(밀가루 이외의 가루에 물을 섞어 수증기)를 이용하여 만든 음식), 알(밀가루 이외의 가루를 이용하여 만든 음식) 등이 생겨났을 만큼 가루를 이용한 음식이 보편화되는 추세에 있었다 .
진대(5~6세기)에는 탕병의 일종으로서 수인병(수引餠)이 등장한다. 『제민요술』에서 밀가루를 조미한 육즙으로 반죽하여 젓가락 굵기로 다듬어 1척(尺) 길이로 자르고 물속에 담가 손가락으로 부추 잎 모양 얇게 눌러서 하나씩 냄비에 넣어 삶아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석명(釋名)』에는 이 수인병을 색병(索餠, 동 아줄 색)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거가필용(居家必用)』에는 색병을 색면(索麵)이라고 하였다. 후세에는 밀가루에 간수를 넣고 만든 반죽을 양손으로 면판 위에 치고 잡아당기곤 하여 가늘고 길게 뽑아내게 되었다.
이것을 화북지방(華北地方)에서는 납면(拉麵, 꺾을 납), 화남지방(華南地方)에서는 타면(打麵, 칠 타)이라고 한다. 현재 인스턴트 라면의 어원이라고 하는 납면은 밀가루 반죽을 길게 한 줄로 뽑아낸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줄로 길게 뽑아내는 방식은 우리나라 전통 국수에서는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당대(618~907) 당대의 이광예의 『자가집(資暇集)』에 “식도와 면판이 없을 때는 손으로 탁(托) 하였으나 이제는 식도와 면판이 있어서 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칼국수(切麵)다. 전도면(剪刀麵, 가위 전剪)도 당나라 시대에는 벌써 보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도면(剪刀麵)은 원래 중국 산시성에서 유래한 요리법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 중 한 명인 이시민 황제가 수나라를 정복하기 전 어느 날 그의 집에 현 황제에 대한 혁명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전술가와 전사들이 찾아왔는데 점심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그의 아내 장손 씨는 출정을 앞둔 군인들을 위한 군복 맞춤 제작에 너무 바빠서 큰 점심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즉흥적으로 가위를 이용해 반죽으로 결절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가위로 밀 반죽을 썰어내어 면요리를 대접하였다. 그날 이후 이시민과 그의 아버지는 병사들과 함께 장안을 가위질하듯 반죽을 자르며 정복하고 당나라를 세웠다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도면(剪刀麵) 속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송대-현대(송960~1279, 북송 960~1127, 남송 1127~1279) 소송대는 면의 대발전 시기로, 밀 생산 증가와 함께 면에 사용되는 부재료의 종류도 ‘닭고기 면’, ‘해물면’, ‘두렁허리면’, ‘양 고기면’ 등으로 다양해졌다. 『동경몽양록』에서도 30여 종의 면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중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도시의 음식점에서는 일반 음식으로 면이 팔리게 되었고, 면 전문점도 등장하였다. 예전의 탕병에서 면이 독립하였다.
전에는 덩어리(수 제비) 모양의 탕병이 일반적이었으므로, 탕병은 숟가락으로 먹던 것이 선형의 면이 보급되었기 때문에 송대에 이르면 젓가락으로 먹게 되었다. 이 시대에 중국 남부의 도작 지대에서는 쌀가루를 원료로 한 면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북 송대에는 국수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반죽을 손으로 쳐서 면을 뽑는 납면 즉 신면이 발명되면서 국수 형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밀가루 제품이 남송 대에 크게 유행하였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중국 북부에서는 떡을 즐겨 먹고, 남부에서는 면을 즐겨 먹는 습속이 생겨났다. 이렇게 하여 면은 중국식 납면, 칼국수, 냉면식 압착면의 셋으로 나뉘게 되었다. 또 기계나 손으로 보다 가늘게 만들어진 건조한 국수를 건면 이라 한다. 중국에서도 송대의 『산가청공』, 원대의 『거가필용』에서 밀가루가 아닌 다른 전분으로 만든 면이 등장하였다.
豆면, 메밀면, 녹두면, 참깨면 등이 그것이다. 녹두면은 밀가루는 아니나 아시아 면에 대한 정의에 면은 주식이나 준주식에 해당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녹두로 만든 당면은 요리의 재료로 사용되지만 두면(豆麵)이라고 불리므로 면의 범주에 넣는다. 원나라(1206~1368)의 습면(濕麵)으로는 『거가필용사류전집』에 탕면류, 수제비류 완단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 탕면에는 새우가루를 넣어서 붉게 한 ‘홍사면’이나 회나무 잎을 갈아서 넣은 ‘취루면’, 가죽 띠처럼 납작한 ‘경대면’ 등도 있다. ‘산약발어(山藥撥魚)’는 수제비 형태로, 밀가루 1근, 콩가루 4냥을 되게 반죽하여 간 마와 함께 섞어서 끓는 물에 숟가락으로 떠서 떨어뜨린다. 다 익으면 조자즙(燥子汁)으로 먹는다. 발어라 함은 떨어뜨린 면 덩어리가 국물 속에서 춤추는 모양을 말한다.
명대(1368~1644)의 장일규(蔣一葵)는 『장안객화(長安客話)』에서 삶거나 찌거나 구어서 익힌 면条가 대략 27종류 정도로 다양하였다. 이는 송대에 만들어 먹기 시작한 납면이 보편화되면서 다양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전반, 명나라 시대에 중국을 방문한 교토 천룡사 책언(策彦) 스님 여행기 에 냉면, 맥면(麥麵, 정진요리의 면) 등 두면이 기록되었다. 스님이 기도 후에 먹는 식사에 두면, 그리고 소반(小飯)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중요한 요리로서 당면이 제공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당면은 두면 외에 휀스(粉糸), 휀티아오, 센휀(선粉)이라고도 한다. 청대(1616~1911)에 ‘오향면’의 오향은 간장, 식초, 후추, 깨 등으로 집안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고 먹던 면이었다. 그러나 현재 오향은 회향, 화자오, 대료, 계피, 정향 등의 향신료를 일컫는 것이므로 청대와는 차이가 있다. ‘팔진면’은 닭, 생선, 새우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아주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으로 보여진다.
‘면식연(麵食宴)’은 면식을 주제로 한 연회상 차림을 의미하며, ‘麵食之鄕’으로 불리는 산시 지역, 특히 태원 및 진중 지역에서 다양하고 대중화된 면식연이 발전하였다. 면식연은 한 대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탕병연’이었다. 이는 청 대 말기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간소화되었다. 면식연은 한 그릇의 국수와 4가지 냉채(고기 2, 채소 2), 4색 채마(菜碼), 4종 소스를 포함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면식연의 격식이나 예술성은 더욱 두드러졌고, 1980년대에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지역적 특성을 살린 연구가 계속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1980년대부터 지역적 특성을 가진 일부 면(란저우라면, 베이징 자장면 등)은 체인 형태로 대도시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그 중 ‘자장면’은 우리나라에 아주 오래전에 전해졌다. 중국이 개혁 개방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면을 포함한 더욱 다양한 음식들이 대도시와 해외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운남성 대리 소수 민족인 백족의 국수는 쌀로 만든 얼쓰(餌絲)로 미시엔(米線)보다 더 가늘게 제작된 것이다. 중국 면요리로 잘 알려진 것으로는 자장면, 팔진탕면, 해물짬뽕, 비취냉면, 초면 해산물쌀국수 볶음 등이 있다. ‘자장면(炸醬麵)’은 산동 지역에서 발생한 음식으로 북경에서도 자주 소비된다. 중국에서는 여름철에 차갑게 해서 먹기도 하며, 맛은 우리 자장면보다 더 짭짤하고 톡 쏘는 느낌이 난다.
‘비취냉면’은 시금치 즙이 들어간 푸른색 국수로 조리한다. 굴소스와 참기름, 식초, 설탕, 레몬향 등이 오묘한 맛을 낸다. ‘초면’은 삶은 국수를 기름에 볶아 구수하고 쫄깃한 국수에 각종 채소와 해산물, 굴소스를 곁들인다. ‘해산물 쌀국수 볶음’은 빨간 새우와 게살에 불린 흰 쌀국수와 피망이 색스럽다. 진한 해물 맛에 쌀국수가 잘 어울린다. 중국의 면 요리는 성마다 그 종류가 여러 가지이고 조리법도 다양하다.‘담담면(擔擔麵)’은 사천 지역의 보편적인 음식으로, 길가에서 어깨에 지고 다니면서 국수를 팔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고추장, 돼지고기 등을 국수에 넣어 말아 먹는 것으로 면의 색이 붉으며, 산초를 넣어 양념장 향이 강하고 매콤새콤함이 특징이다.
고추기름을 친 사천풍의 국수인 백유연면(白油燃麵)은 풋마늘, 콩나물, 깨, 땅콩, 참기름 등 대여섯 가지 조미료를 별도로 넣어 향긋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백유연면’이라는 이름은 참기름을 너무 많이 넣어 성냥을 그어대면 불이 붙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도삭면(刀削麵)’은 중국 산서 지역의 인기 음식이다. 한 손에 칼을, 다른 손에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들고 가장자리에서부터 버들잎처럼 깎아내는 면이다. 이 지역에는 밀 이외의 음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정교한 국수는 아니다.
‘묵두어묘이면(墨斗魚苗描耳麵)’은 면 모양이 고양이 귀를 닮은 면으로, 닭뼈나 돼지뼈를 우려 만든 국물을 부어 먹는 면이다. ‘양춘면(陽春麵)’은 아무런 양념 없이 담백한 육수에 말아 먹는 면이다. ‘장수면(長壽麵)’은 장수를 기원하며 삶아 먹는 면이다. ‘산랄면(酸辣麵)’은 시고 매운 국물에 녹말을 풀어 걸쭉하게 만들어 말아 먹는 면이다. ‘해선면(海鮮麵)’은 닭뼈나 돼지뼈를 우려 만든 육수에 해물과 채소를 얹어 먹는 면이다.‘일근면(一根麵)’은 샤브샤브 스타일의 면 요리로, 돌솥의 육수가 끓으면 손가락 굵기의 면가락을 조리사가 쭉쭉 당겨 돌솥에 넣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끊어지지 않는다. 베이징 시내에 있는 서북면촌(西北麵村)이란 서북 지방의 면 요리 전문점에서 만든다. 『제민요술』에 등장하는 제면법이다.‘후난미펀얼(湖南米粉兒)’은 국수로, 후난은 마오쩌둥(毛澤東)의 고향이고, 그 고장 사람들도 우리네처럼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다. 마라(麻辣, 우리의 고춧가루)를 국수 고명 위에 끼얹어 먹는, 술을 마신 뒤 속풀이 해장국 대용의 국수다. 북경에서는 밀가루 국수를 일컬어 ‘면(面)’으로 표기하고 있다.
1.4 간략한 일본 면류의 역사 / 우동(うどん)과 소면의 유래
「소면」이나 「우동」보다 더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奈良)・헤이안(平安) 시대까지 도달하게 된다. 12세기경 당나라로부터 전래된 전병(煎餠)인 당과자(唐菓子)의 일종인 삭병(索餠, さくべい)과 박탁(餺飥, ほうとう)에 대한 기록이 확인된다.일본식 면류에 사용되는 한자 표기 또한 12세기 당나라 시기의 중국어식 한자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삭병은 북위 시대의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 병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모두 꿀로 물을 조절해 반죽하라. 꿀이 없으면 대추를 삶아 즙을 내고, 소・양의 기름이나 젖을 사용해도 좋다. 그렇게 해야 떡이 맛있고 바삭하다.”
가사협이 언급한 돈피병(豚皮餠), 삭병(索餠), 돈톤(飩飩), 종자(粽子), 자명(煮熐) 등이 정찬(正餐) 음식으로 올려졌는지, 혹은 점심이나 아침・저녁 사이의 간식처럼 먹었던 음식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현재 중국어에서는 사어(死語)가 된 ‘박탁(餺飥)’은 본래 국물에 밀가루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넣어 끓여 먹는 요리를 의미한다.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에 들어서면 소면(索麵, 素麵)이나 우동(饂飩, うどん)이 다양한 문헌에 등장하게 된다. 그중에는 ‘고자면(碁子麺)’이라는 이름도 보인다.다만, 이 시대의 고자면은 밀가루 반죽을 대나무 통에 넣고 바둑돌 모양으로 눌러 삶은 뒤 콩가루를 뿌려 먹는 것이며, 현재 나고야 지역의 명물인 평편우동(平打ちうどん) 형태의 고자면과는 다르다.소면은 대표적인 여름철 음식으로, 차게 식혀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1.そうめん [素麺] 간단한 고명과 소면만을 먹는다
2.イカそうめん [イカ素麺 이가소멘은 연한 소스에 소면을 찍어 먹는 것
3. ながしそうめん [流し素麺] 나가시소면
4. そうめんサラダ [素麺サラダ 소면 셀러드
소면이나 우동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반죽된 밀가루를 늘이거나 가늘게 썬 면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기리무기나 냉면(冷麺, ひやむぎ)과 같은 것도 이로부터 탄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면에 관한 문헌상의 최초 기록은 야사카 신사의 『기온 집행일기(日記)』, 강영 2년(1343)의 문서에서 확인된다. 그 내용 중, “자 단바 소면 공사 면제 사이, 1년 이내에는 올라가지 않고, 여전히 방인 궁사 등이 약간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소면'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최초의 문헌적 출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동복사(東福寺)에 따르면 엔니벤엔(円爾弁円, 1202~1280)은 가정 원년(嘉禎元年)부터 인치 2년(仁治2年, 1235~1241) 사이 송나라에 건너가 다양한 도서를 들여오고 문교 진흥에 기여했으며, 수력으로 제분하는 기계의 구조도(水力を用いて製粉する器機の構造図) 또한 전수해 면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소면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 남아 있다고 한다.'성이일국사(聖一国師)'라는 호칭은 엔니벤엔이 천황으로부터 받은 칙사명이며, 교토와 나라 지역에서는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 무로마치 초기까지 조정과 귀족, 사원들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많은 공급처와 유통망이 형성되고, 각기 독점 판매권을 지닌 소면집들이 생겨났다.
『중세의 총촌과 문서』(다나카 가츠유키 저서)에 따르면, 문명 12년(1480)부터 문가 2년(1502) 사이 오미국 아사이 군 사카모토의 소면집 ‘히코지로’(素麺屋 彦次郎)는 교토 장원 영주 야마시나 가문의 ‘소바’ 관련 세금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에도 이미 유력한 소면집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소면이 전국으로 퍼져 나간 기원이라 여겨지는 삼륜소면은 아즈치모모야마(16세기 말) 시대, 오오가미 신사(미와신사)의 신주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게이초 연간에는 제분 설비와 전문 기술자 집단을 갖춘 수준까지 발전하여 소면 제조 기술이 널리 확산되었다.신섬 시게루의 『소바 세이지키』에 따르면, 미와 에비수 신사의 ‘초시 축제’ 및 미와 명신을 모시는 오오미와 신사의 복정제에서는 신탁에 따라 해마다 쌀, 보리, 콩 등과 함께 소면 가격을 점치는 전통이 있다. 보류 4년(宝暦4年, 1754)에 출간된 『일본 산해명물도회』에서는 “야마토 삼륜소면은 명물이다. 가는 것은 실 같고, 하얀 것은 눈 같으며, 삶아도 쪼그라들지 않는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소면 중 이에 필적할 것이 없다”고 기록돼 있어, 그 명성을 엿볼 수 있다.‘미와 소면’은 나라현 미와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혹한기에 밀가루를 반죽해 손으로 가늘게 늘여 만든다. 미와는 밀 재배에 알맞은 토양을 갖추고 있고, 미와산에서 흘러내린 마키무카이 강과 하쓰세 강이 풍부한 수원을 제공해 밀 재배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미와 소면의 역사는 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카미 신사의 12대 승려인 사카이 히사의 둘째 아들인 사사이 히사의 곡식 주인이 기근을 극복하기 위한 보존 식품으로 유래했다. 이것이 소면의 원형이 된 밧줄 형태로(索색)로, 밀을 빻아 반죽하여 막대기로 만들고 말려서 만든 것이다. 에도 시대에는 면의 맛이 널리 보급되어 그 제조 방법이 전국에 전해지게 되었다. 문헌상에서 '우동'의 최초 출처로 언급되는 것은 나라의 호류지의 자료인 '가원기' 정평 7년(1352)의 '삼가모타, 타칸나, 우톰, 후, 사우메마, 이치오리시키...'라는 기록이다. 호류지 서실의 삼경원에서 술의 안주와 함께 죽순이나 우동, 부 등이 제공되었다. 오사카에서는 텐쇼 12년(1584)에 신마치에서 소바집 '스나바'가 개업하였고, 에도에서는 경쇼 19년(1614)에 타가 대사 사상(정확히는 타가 대사 별당 부동원에서 존승원의 주지)이 동일명사에 간 날에 소바를 먹었다. 교토에서는 권대납언인 히노 스케카츠의 일기 '스케카츠 경기'에 원와 10년(1624) 2월의 조항에서 교토의 대복안에서 소바를 대접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람은 에도에서 소바가 제공되었다고 '자성일기'에 남긴 자성의 아버지이다.
또한, 대복안은 자성일기에도 자주 등장한다. 교토는 일본 국수 문화의 발상지로서, 7세기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의 간다오사이(遣唐使)와 유학승들이 가져온 소면에 이르는 기술이 사원에 의해 채택되고, 궁중과 귀족들과 함께 이를 보급하였는데. 이 음식은 사원이나 귀족 사회의 행사 음식 및 전통적인 식생활에도 적합하게 보급되었지만, 그 후 교토에 전해진 소바(蕎麦)도 유사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오사카의 우동집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쇼와 초기까지 도톤보리를 중심으로 우동집이 나란히 세워지기 시작하여 우동에 대한 기록이 많이 눈에 띄게 되었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킷츠네 우동은 신타즈시(이나리즈시)의 그 달콤짭짤한 두부 튀김이 기원이었으며, 그것이 다시의 맛에 깊숙이 배어들어 그 식감은 서민의 맛을 넘어 바로 오사카의 맛 그 자체이다. 일본 면류 산업단체 연합회가 감독한 우동의 기본 기술에는 킷츠네 우동이 에도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내용이 있다. 킷츠네 우동의 정확한 기원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메이지 10년대가 유력하다고 한다. '킷츠네 우동'은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등장했음이 분명하다.
1.5 고려시대의 국수
우리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국수에 대한 문헌 기록은 고려 도경이다. 1123년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휘종의 명을 받고 고려 예종의 조의를 위해, 정사 노윤적(路允迪), 묵경(墨卿)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고려의 국내 사정을 은밀히 살펴보고 송나라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가 고려 도경이다. 서긍은 개경을 비롯한 인근 지역은 직접 목격한 사실들을 기록했고, 직접 확인하지 못한 부분은 서긍을 수행했던 고려 관리에게 질의를 하고 답변을 얻음으로써 고려 도경의 내용을 채워 나갔다. 다음은 고려 사람들의 음식 관행에 관한 고려 도경 속의 서술들이다.
고려의 향음은 술과 단술을 귀하게 여긴다. 공식 회합이 있을 때에는 왕족과 국 관에게만 탁자와 의자, 다과가 갖추어진 상이 제공되며, 나머지 관리와 사민들은 단지 의자에 앉을 뿐이다. 후한 때 예장태수 진번이 서치를 위해 평상을 특별히 마련했다는 것으로 보아 옛날 중국에도 이런 예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고려인은 평상 위에 또 작은 소반을 놓고, 구리 그릇을 사용하여 말린 고기와 생선, 채소를 섞어서 내놓지만 풍성하지는 않는다. 술 따르는 법에도 절도가 없고 여러 번 주고받는 것에만 힘쓸 뿐이다. 평상마다 단지 2인 정도가 앉을 뿐이고 손님이 많이 모이면 그 수에 따라 평상을 늘려 서로 마주 앉는다. 나라 안에 밀이 적어 모두 상인이 중국의 경동도로부터 사들이니 면 가격이 대단히 비싸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식품 가운데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웃을 만한 일이다.
鄕飮
麗俗重酒醴. 公會, 唯王府與國官, 有床卓盤饌, 餘官吏士民, 唯坐榻而已. 東漢豫章太守陳蕃,
特爲徐稚設一榻, 則知前古, 亦有此禮. 今麗人於榻上, 復加小俎,
器皿用銅, 鱐腊魚菜, 雖雜然前進, 而不豐腆. 酒行亦無節, 以多爲勤. 每榻只可容二人, 若會賓
客多, 則隨數增榻, 各相向而坐. 國中少麥, 皆賈人販自京東道來,
故麵價頗貴, 非盛禮不用. 在食品中, 亦有禁絶者, 此尤可哂也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나라 안에 밀[麥]이 적어 모두 상인이 〈중국의〉 경동도(京東道)로부터 사들인다>는 것은 당시 고려에 재배되는 밀로는 국수를 만들수있을 정도의 수확량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중국으로부터 밀을 수입해서 국수를 고려 사람들은 만들 수 밖에 없으며 전량 수입에 의존하였기에 왕가나 귀족 혹은 사찰의 행사나 연회가 아니면 면요리를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고려도경 본문 속의 경동도(京東道)는 북송 때 장강(長江)의 변경(汴京)에서 산동(山東)과 하남성(河南省)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중국의 산동(山東)지역을 지칭한다.
1.6 기타 한국의 고문헌 속의 국수에 대한 명칭
1690년 사역원에서 신이행이 중국어의 발음과 뜻을 한글로 풀이한 사전. 중국어사전인 역어유
해譯語類解에 餠에 대한 한글 표현이 확인 된다.
<餠{食+者} / 빙쟈 >, <麵 / 국슈>, <餄餎 /굴근 국슈>, <麵䬣달 / 슈져비 >, <掛麵 / 국슈>, <麨麵 / 미시(미수가루)>, < 餈餻 / 인졀미 >,<燒餠 / 구은 떡>
사역원에서 몽고어 어휘를 모아 1768년에 간행한 교재. 몽골어학습서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도 <哈絡 / 국슈 >, <粉湯 /슈면>, <撒糕 /시르 떡>등의 어휘가 확인 된
다. 귀족이나 사대부 혹은 식자층에서는 중국어를 충실하게 번역하여< 탕병>이라는 단어를 사용 했다면 역어유해譯語類解나 몽어유해蒙語類解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면류에 대한 우리 한글 표기가 <국슈>라는 것이 확인 되었다.
동북아시아에 밀이 음식관행food practice이라는 형태로 공동체의 식생활에 영향학적으로 그리고 인류학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전통사회에서 면류는 그 희소성때문에 고려때 입식으로 궁중이나 귀족층의 향연이나 불교의 의례에 올려 질수 밖에 없었다. 서울 은평구에 소재한 고찰인 진관사에서 거행되는 수륙제에 면류가 올라가는것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종묘의제례를 위시한 전국의 현존하는 종가집의 불천위 제례에도 면류. 즉 국수가 올려지고 있다.조선후기 영조, 정조시대에 농업생산량이 증대 되면서 국수는 혼례때에 하객들이 축하를 하는 의미에서 국수를 한동이 또는 형편에 따라 두 동이씩 부조의 형태로 답례하는 문헌 기록이 확인 된다.
서영보(徐榮輔, 1759~1816) 등이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당시 유통되던 물건의 가격이 기록되어 있으며, 만기요람의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의 밀가루 가격을 추정할 수 있다. 메밀가루는 1말에 1냥 3전 3푼, 햇밀가루는 1말에 4냥이었다. 1냥의 당시 화폐 가치는 오늘날 17만 7천원에 해당한다. 초가집 한 채의 가격은 당시 5냥이고, 노비의 거래 가격은 5~10냥, 국밥 한 그릇은 3~5푼의 화폐가치를 지녔다. 당시 햇밀가루 1말을 구입하려면 4냥을 지불해야 하므로 현재 돈으로 28만원에 해당하며, 1냥을 더하면 품질이 좋지 않은 노비를 구입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밀의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일반 양인 및 사대부들이 국수를 면류로 즐기는 일은 평생에 한두 번의 기회에 불과했다.
이러한 식문화의 환경 속에서 엄청난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국수 먹는 잔치를 문화적 강제력으로 치뤄내야 하는 생애 주기의 의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수 먹는 모임 탕병회이다. 한국 사회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생애 주기의 의례였던 탕병회를 상실했다. 돐이 태어난 아이의 첫째 생일을 기준으로 열리는 공동체의 잔치라면 탕병회는 아이가 태어난 후 3일, 100일, 돐에 열렸던 공동체의 향연이었다.
탕병회는 멀고 가까운 친척,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지역의 이웃들이 초대되었으며, 별다른 음식 없이 탕병 즉 온면의 국수 한 그릇으로 충분한 잔치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가 태어난 마을의 100여 집을 방문해서 100개의 천을 얻어와서는 손 바느질로 아이가 입을 옷을 만들어 아이에게 입히는 것이 탕병회의 의례였는데 이 때 이러한 100개의 천을 가지고 지어 입힌 옷을 백가의 백家衣라고 했다. 또한 갓 태어난 아이가 7세 가량이 될 때까지 학습해야 할 내용으로 채워진 학습서를 아울러 탕병회에 마련해야 했다. 아이가 태어난 마을의 덕성 좋고 학식이 있는 윗어른에게 간청해서 학습서를 마련했는데 이러한 책자를 백가의 백家衣라고 지칭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백의서에는 성호 이익의 증손자인 이삼환이 청탁을 받아들여 책을 지었던 백가의 백家衣가 존재한다. 결국 한국의 전통 사회는 마을 100곳으로부터 천 조각을 얻어 아이가 입을 옷 백가의 백家衣와 아이가 바르게 자라나도록 품성을 갖추어줄 또 다른 백가의 백家衣 두 가지를 탕병회에 마련했다. 이삼환이 지어 갓 태어난 아이를 위해 마련했던 백의서 백家衣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