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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 대한 문화적 공경 기로연의 기원
  • 김병철
  • 등록 2026-06-17 09:51:37
  • 수정 2026-06-17 09:57:15

노인에 대한 문화적 공경 기로연의 기원

1.기로연의 기원.  

 1.1 기로연의 기원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나이 많이 드신 분들에 대한 존칭은 노인이 가장 익숙한 단어라 할 것이다. 기로연이라는 단어에서 기로라는 단어도 해당 학문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면 생소한 단어로 인식되기도 한다. 한국 전역에 설립되어 있는 경로당의 경로라는 단어는 노인을 공경한다는 뜻을, 그리고 양로는 노인을 기른다는 뜻 정도로 이해될 수 있지만 실제로 노인을 기른다는 것의 본뜻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기로에서 한자 기도 노인을 뜻하고 노도 역시 노인을 뜻하는 것이어서 기로는 어떤 나이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지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그 의미를 확정짓기가 쉽지 않다.  

 기로라는 단어는 당나라 때부터 문헌에서 확인되었는데 기로의 동의어인 기영耆英이라는 단어가 먼저 문헌에서 확인된다. 행차하여 제사를 지낸 후 사면령을 내리고, 기로를 위문하고 물품을 내려주었다. 어전으로 납시어 기로와 고아 및 자식 없는 늙은이와 독질자(매우 위독한 병이 있는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물품을 내려주시었다. 친히 기로 및 효자, 순손, 열녀, 의부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고려 때의 문헌 만으로 <기로>의 뜻을 60이나 70을 넘어선 노인으로 특정할 수는 없는데 기로연은 단순히 나이가 지긋한 노인을 초청하여 열리게 되는 양로례와는 차이가 있었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과 관직을 왕으로부터 내려받고 일정한 노년의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난 전직 관료를 위한 궁중연회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노년에 관직에서 물러나서 궤장을 받고도 관직에 예외적으로 봉직하는 사례도 확인되는 일이어서 기로연은 반드시 퇴직한 관료를 그 구성원으로 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기로라는 표현 이외에 국노라는 단어도 확인되는데 국노는 관직에서 물러난 80세의 전직 관료를 의미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지난하게 어려운 일이었지만 관직에 오랫동안 봉직하면서 귀양을 가거나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퇴직 후까지 덕성을 지니면서 80세의 장수를 누리는 것은 참으로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노인으로의 단어 앞에 '나라' 국자를 결합하여 국로라고 지칭했다.

 

1.2 기로와 생애 주기 

 

 세월의 경과에 따라 자연히 축적되는 ‘나이’와 국가 차원에서 공적인 권한을 소유하는 ‘벼슬’ 은 전혀 무관해 보인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상치(尙齒)’, 곧 나이로 상징되는 이빨이 많은 연장자를 존경하는 전통이 발달하였다. 그 결과 나이가 많 으면 높은 벼슬을 가진 것처럼 사회적 존경을 받아야 된다는 관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특히 유교 경전에서는 지식인·관료 계층에 대해 10년 단위의 나이로 세분(細分)해서 상이한 명칭과 사회적 역할의 변화를 제시하였다. 가령, 『예기(禮記)』에서는 학업과 관례(冠례), 결혼과 관직 생활을 거쳐 노년에 이르는 인생의 여정(旅程)을 10년 단위의 나이로 보여주고 있다. 이 여정에 따르면, 40~60대까지는 관직에 종사하고 70세가 되면 자식에게 가사(家事)를 물려 주며, 80~90세가 되면 형벌을 받지 않으며, 100세가 되면 전적인 봉양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노인이 되면 벼슬에서 물러 나고 사회적 역할이 축소되지만 원칙상 ‘경로(敬老)’나 ‘양로(養老)’, 곧 사회적 공경과 봉양의 대상이 되었다. 

 

 2. 최초의 기로연은 기로회였다 

 

 크게 구분해서 기로연은 국가 주도로 왕실이 주최가 되는 향연과 사적으로 퇴임한 관료들이 소박한 음식과 술을 나누며 서로 시문을 짓고 교우하는 모임으로 구별 된다. 고려 때부터 시작된 기로연은 조선시대에 들 어서는 국가에서 반드시 일년에 그 시기를 정해 거행해야 할 국가 차원의 연향이 되었고 조선의 왕중에 태조, 숙종, 영조, 고종은 스스 로 기로소에 입소하는 연향을 열기도 하였다. 기로들의 모임을 처음으로 연 사람은 시문을 가장 쉬운 문장으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짓기 로 유명한 당나라의 백낙천白樂天이다. 향산에 아홉 노인이 모여 회합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향산구노회香山九老會라고 불렀다. 향산구노회香山九老會에서 백낙천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칠언 육운시를 지었다. 백낙천이 주최 가 된 이 기로회는 백락천이 75세에 사망함으로써 기로회는 1년 6개월 정도만 지속된다 

 七人五百七十歲 拖紫紆朱垂白髮. 일곱 사람나이 합치니 570세라네 자색 인끈 붉은 옷에 백발을 드리웠네 手裏無金莫嗟歎 樽中有酒且歡娛. 수중에 돈없다고 한탄은 하지 말지니 단지속에 술 있으니 또한 즐거운 일이지 詩吟兩句神還王 酒三杯氣尙飲麤. 두 구절 시 읊으니 정신 오히려 맑아오고 소리 높은 노래에 게집종이 손벽치네 嵬峨狂歌婢拍教 婆娑醉舞遣孫扶. 어지러이 취한 춤사위에 자손들이 부축하네 타고난 수명은 疏廣 ,疎受를 지나고 天年高過二疏傅疏廣疎受・ 人數多於四皓圖.商山四皓 사람들의 숫자는 商山四皓보다 많다네 除三山五天竺卻 人間此會更應無 삼신산 오천축을 제외 하고는 인간사는 세상에 이런 모임 없으리.  

 백낙천 이후 당나라를 지나 송나라때 문언박은 몹시도 백낙천의 시풍을 흡모하였고 기로들의 모임인 백낙천의 향산구노회를 전형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한 기로들의 모임인 낙양기영회를 열고 있 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려시대 사적인 기로회의 기원은 문언박의 낙양기영회였다. 송나라의 문언박은 기로회에 참석 할 수 있는 회원에 벼슬에서 물 러난 70세 이상의 기로라는 제한을 두었다. 낙양기영회에 참석한 전직 관료들은 벼슬의 높 낮이가 있었지만 이가 많이 빠진이를 우선한다 는 의미의 상치회尙齒會라고 불려졌을 정도로 나이를 우선해서 기로들사이의 관계를 설정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언박이 70세이상의 기로 들을 모시고 기로회를 열면서도 말석에 64세의 사마광을 참석시켜서 서문을 쓰게 했다는 사실이다. 말석에 사마광을 앉히고 서문을 쓰게한 기로회의 에외조치는 최당이 해동기노회를 열었던 무신 정권하의 고려때에도 이어지는데 해동기노회에 나이가 해당되지 않았던 이인모가 참 석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적인 기로회에서도 확인 되는데 이 내용은 사적인 기로회를 다루는 부분에서 다시 살펴 보기로 한다

3. 고려 중·후기 기로회(耆老會)의 구성과 사회·문화적 의미  

기로회는 치사(致仕)한 고관들이 중심이 되어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 하여 만든 사적 조직이다. 기영회(耆英會)·기구회(耆舊會)라고도 불리며, 회원들의 숫자에 따라 구로회(九老會) 등으로도 불렸다. 중국에서는 기로 회가 당나라 때부터 존재하였지만, 한국사의 경우에 사료에서 확인되는 첫 사례는 고려 무신집권기에 결성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이다. 이후 고려 후

기에 기로회가 여러 사례 확인되며, 지역적으로 모두 개경(開京)에서 결 성되어 활동하였다. 기로회는 단순히 음주와 가무를 즐기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시문의 창 작과 창화(唱和) 등 문예활동을 동반하였다. 저명한 당·송대 유학자들의 고사에서 연원을 찾고 일정 수준의 나이·관작·덕망을 회원 자격기준으로 제시하여 존경 받는 원로들의 모임으로서 자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로 회의 활동을 통하여 당시 군자(君子)를 지향하는 사대부(士大夫)들의 은퇴 후 생활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3.1 기로회의 구성과 활동  

 기로회의 효시로 알려진 해동기로회는, 최해(崔瀣)의 「해동 후기로회서(海東後耆老會序)」의 기록에 따르면 1203년에 결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최당(崔讜)의 묘지명에는 이보다 앞서 1200년에 최당이 벼 슬에서 물러난 뒤부터 결성했다고 기록하였는데, 아마 이 때부터 최당의 쌍명재(雙明齋)에서 기로들과 모임을 갖다가 정식으로 기로회를 결성한 것 이 1203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해동기로회를 포함하여 이후 고려 말까지 여덟 사례 정 도의 기로회 를 확인할 수 있으며 해동기로회는 회원들이 은퇴한 관료로 구성되어 “시·술·거문고·바둑 으로 서로 즐기며” “매월 열흘마다[每月逐旬] 모여 술을 마시고 시문을 읊 조리는 것을 즐겼으며 세간의 시비득실은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하였다. 이 기로회 활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이후 기로회 의 효시가 되었다. 유자량이 결성한 기로회도 “때로는 술자리를 마련하여 마음껏 즐기고 한가로이 느긋하게 지내면서 성품을 잘 길렀다”고 하였고, 금의가 중심이 된 기로회는 “날마다 서로 만나 잔치를 베풀면서 재물을 쓰 는 낙을 즐겼다”고 하였다.  

 채홍철이 중심이 된 기영회에서는 “대개 선현의 모임을 본받은 것으로서 풍류가 그보다 줄지 않았으며”, “날마다 기로 들을 맞아 마음껏 즐기고서야 자리를 파하였다”고 하였다. 즉 기로회는 은퇴한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정기적이거나 부정기적이라도 자주 연회를 열고 시문을 창화하면서 노년생활을 즐기는 사적인 네트워크조직이었다. 따라서 궁정이나 관부를 매개로 한 공적인 연회모임 또는 동료(同僚) 경험 을 매개로 한 결사조직 등과는 구별되었다. 

 해동기로회는 자기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것을 돌에 새겨 세상 에 알리려고 하였다.회칙도 마련했던 것 같다. 조선초기에 활동 한 후기영회의 경우에 1404년(태종 4)에 만들어진 회목(會目: 회원 명단)과 회약(會約)이 현재 전하고 있는데, 이는 해동기로회의 옛 규칙을 따른 것이 라고 하였다「쌍명재기(雙明齋記)」에 따르면 해동기로회의 모든 규정은 사마광((司馬光))의 진솔회(眞率會=洛中耆英會=洛陽耆英會)의 옛 예에 따 랐다고 하였다. 해동기로회가 전범으로 삼은 사마광의 낙중기영회에도 회 약이 정해져 있었고 그것은 후기영회의 것과 대동소이했기 때문에, 해 동기로회에 그와 비슷한 회약이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후기영회의 회약은 다음과 같다. 기로회의 음식과 술에 관한 규정이 확인 된다 ◦ 서열은 나이에 따르고, 관직으로써 서열을 정하지 않는다[序齒 不序官]. ◦ 도구는 간소하게 한다[爲具務簡潔].  음

식은 오미(五味)를 넘지 않게 한다[食不過五味]. ◦ 채소·과일·포·젓갈 종류는 다섯 그릇을 넘지 않게 한다[菜菓脯醢之類不 過五器]. ◦ 술 순배는 세지 않고, 주량에 따라 각자 스스로 조절한다. 주인은 권하지 않 고 손님도 사양하지 않으며, 약간 취하는 정도로써 법도를 삼는다[酒巡無筭 深淺自斟 主人不勸 客亦不辭 微爲度]. ◦ 손님을 초대하는 데는 편지 하나를 같이 사용하여, 손님이 자(字) 밑에 참석 여부를 표시하고 따로 답서를 쓰지 않는다. 사정 때문이라면 편지를 따로 나누어 보내는 것을 허용하되 모임날 일찍 와서 재촉하지 않게 한다[召客共 用一簡 客注可否於字下 不別作簡 或因事分簡者聽 會日早赴 不待促]. ◦ 매월 차례대로 연회를 준비한다. 준비를 맡은 사람이 문제가 있으면 다음 사람이 순서를 바꾸어 먼저 준비한다[每月以次辦會 當辦者有故 次者先辦]. ◦ 회약을 주장(主掌)하는 사람은 6개월마다 바꾼다[掌約者六月一遆]. ◦ 회약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그때마다 벌주로서 큰 술잔으로 한 잔 마시게 한다[違約者 每事罰一巨觥]  

 이 회약을 보면, 회원들이 각자의 관위로 서열화하지 않고 나이 순서로 차서를 정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기로회가 회원 사이에 신분·계층이 나 관직서열을 고려한 계서적 조직이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였다는 사실 을 보여준다. 연회모임도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아니라 회원 사이에 돌아가며 개최하였으며, 회약의 주장(主掌)도 일정한 주기로 돌아 가며 맡았다. 물론 기로회원끼리는 수평적 관계였다고 하지만, 그 기로회에 가입하는 데는 은퇴관료라도 아무 조건 없이 허락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로회에 가 입하려면 일정한 자격요건이 필요하였다. 해동기로회의 규약을 본받았다고 하는 후기영회에서는 “70세 이상으로 덕망과 작위를 함께 갖춘 사람에게 입회를 허락하고 정승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은 나이에 관계없이 받는 다”고 정하였다. 즉 일정한 나이[齒]·덕망[德]·관작[爵]을 가입 자격으로 삼았다. 이는 이른바 삼달존(三達尊)을 모두 갖춘 사람들을 회원으로 한다 는 것이다.11) 나이 기준에서 70세를 거론한 것은 그 나이에 치사(致仕)하여 은퇴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삼달존은 세 가지 모두 구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것을 갖춘 사람은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해동기로회를 주도했던 최당과 최선 형제에 대하여 이인로가 쓴 글에 따르면, “(箕子와 孟子) 두 분이 모두 당세의 이름난 대현으로서…반드시 덕망·관작·나이를 말한 것 은 대개 예나 지금이나 다 같이 존경하는 것이 이 세 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비가 행세하면서 하나를 얻고 둘은 잃거나 둘은 얻었지만 셋 까지는 미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성인(聖人)·군자(君子)의 열에 서 뒤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 세 가지를 다 구비하고 하나도 부족하 지 않음에랴”라고 하였다. 해동후기로회에 참여했던 이진(李瑱)이 지은 김방경(金方慶)의 묘지명에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천하에 달존이 세 가 지가 있는데, 덕망·나이·관작이다. 군자가 행세하면서 그 중에 하나나 두 가지를 얻기도 힘든데 하물며 세 가지를 얻는 것이랴. 그 세 가지를 얻 어 빠진 것이 없는 이는 우리 상락공(上洛公) 뿐이다.…아! 재난에서 백성 들을 구제하고 사직을 다시 안정시켰으니 덕이 하나이고, 연세가 89세나 되었으니 나이가 하나이며, 상국도원수(上國都元帥)로서 또 공(公)으로 봉 해졌으니 관작이 하나이다. 이른바 세 가지를 갖추어 빠진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영회를 주도했던 채홍철의 묘지명을 이곡 (李穀)이 지었는데, 그 명(銘)에도 “사람이 덕망[德]이 있으면 반드시 높은 지위[位]에 오르고 반드시 장수[壽]하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데 오직 공

(公)만이 그것들을 갖추었으니 이로써 길이 전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삼달존을 회원자격으로 한 기로회는 자연히 사회에서 존경받는 조직으로 대접받았다.

 

 한편 회약상으로 기로회는 검소한 음식차림과 자유로운 음주문화, 번거롭지 않은 예절 등을 강조하였다. 술을 강권하지 않으며 각자의 음주량에 따라 마시고, 취기가 약간 도는 정도에서 그치도록 하였다. 채홍철의 기영 회의 관련 기록을 보면 질펀한 술자리를 가진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검박한 연회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우세하였다. 이색이 참여했던 우왕 때의 기로회 분위기는 “서로 즐기는 것이 잔뜩 취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곱게 단장한 미인들을 물리쳤고 국생(麴生=술)도 명함 내밀고 들어와 뵈려고 하다가 감히 어울리지 못하고 물러갔네. 평생에 마음 쓰는 것이 보통사람들과는 달라서 세상을 교화하려고 하였기에 삼가 법도를 지키고 검소함을 숭상했으니, 지·기(志氣)가 서로 부합하는 것을 말로 다 전할 수 없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로 인하여 “화기(和氣)가 하늘을 감동시켜 비를 내려 가뭄에 시달리는 농경지를 두루 적셨네”라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격조 있는 연집 분위기는 기로회가 음주와 시·부의 창작 및 창화 등을 통해 노년생활을 즐기는 동시에, 수양한 사대부로서 동료들과 어울려 성품을 기르는 것을 표방한 것과 관련된다. 그러한 연집 모습 때문에 기로회의 존재와 활동은 한 시대를 압도하고 후세를 고무시키며 국가의 원기를 배양하는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해동기로회 외의 다른 기로회들의 경우에 위와 같은 회칙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후기영회가 낙중기영회의 회칙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고, 이색이 참여한 기영회의 분위기도 비슷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려시대에는 기로회가 지방에서 조직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이는 당시 기로회가 퇴직 후 낙향하여 처사로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여전히 왕도 개경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적하고 우아한 생활을 선망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였음을 말해준다. “벼슬에서 은퇴하여 세속을 떠나 함께 놀면서…실로 세상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거나, “속박 없이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지상의 신선이라고 불렀다”고 해 은일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원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해동기로회는 개경 영창리에 지은 쌍명재에서 모였고, 채홍철의 기영회는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지은 중화당에서 모였다. 다른 기로회의 경우도 대개 개경에 있는 회원들의 저택에서 모였던 것 같다.

 그들은 성공한 사대부로서 행세하고 은퇴한 다음 동료 인사와 함께하는 연회와 문학 활동의 공간을 구하여 왕도 개경에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재(齋)·당(堂)을 조성하여 자연으로의 귀의를 표현하였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왕도의 도시적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한가롭고 안온한 삶을 누리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기로회의 활동은 은일을 전면에 내세워 세속적 현실로부터 일탈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관료의 세계와 은일처사의 세계 사이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은일처사적 지향을 한 대표적인 조직은 해동기로회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결성된 죽림고회

(竹林高會)였다. 임춘·오세재·이담지 등 죽림고회의 회원들은 문재가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때를 만나지 못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거나 한직에 머문 사람들로서, 이욕(利欲)을 쫓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은일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그들도 사대부의 일원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기를 고대하였고, 음주와 문학을 즐기는 생활을 한 것은 기로회와 비슷하였다. 

 죽림고회와 해동기로회 양쪽에서 활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죽림고회의 회원 중에 조통은 뒤에 해동기로회에 참여하였다. 이인로는 나이 차이 때문에 해동기로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기는 못했지만 모임에 참여하여 어울렸다. 그리고 박인석은 죽림고회 회원들과 교유하였는데, 해동기로회 에도 정식회원은 아니었지만 모임에 참여하고 후서(後序)를 썼다. 이규보도 죽림고회 회원들과 교유하였으며, 뒤에 현달한 후 은퇴하면서 기로회를 결성하고 싶어 하였는데 성사여부는 알 수 없다.  

 기로회 가운데는 불교 수행을 겸했던 경우도 있었다. 유자량이 참여한 기로회는 음주를 즐기고 유유자적하게 성품을 수양하기도 했지만 부처 섬기기를 매우 독실하게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색이 참여했던 기로회는 백련회(白蓮會)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백련회는 불교 결사이기도 하였고 백련회 활동 때문에 이색은 부처에게 아첨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활동한 기로회 중에 일부는 부처를 숭배하는 자리로 만들어 판 공(辦供)이라고 칭하면서 불경을 읽고 예불하는 등 배불향도(拜佛香徒)나 마찬가지였다고 조선 초기 유학자들이 비판한 것은 이런 사례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관계(官界)에서 성공한 사대부들이 은퇴한 후에 원로그룹으로서 존경받는 생활 모델을 제시하고 사회적 평판과 존경을 기대하였다. 동시대에 최고로 평판이 있는 문인에게 자기 기로회 서문을 쓰게 하거나, 모임 모습을 그려서 돌에 새겨 세상에 전하게 한 일 등은 그들 조직의 존재와 활동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이를 통해 사대부로서 본분을 지키면서 관직 생활을 온전하게 하는 것을 숭상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은퇴한 기로로서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당시 사대부로서 올바른 처신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부각되었다. “세태에 따라 입신하여 처자를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하는 데, 보통사람[庸人]들은 그럴 수 있다지만 군자(君子)의 논의와는 어긋난다. 의(義)와 리(利)를 밝히고 출·처(出處)를 살펴서 다른 사람들의 시비를 자 신의 영욕으로 삼지 않는 자는 드물다”고 하였다. 그런 인식에 따라 처 신을 바르게 하여 승진을 한 경우에는 사림(士林)들이 영예로 여겼으며, 학 식이 높고 요직을 거쳤더라도 비리를 범하면 사림들이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인주이씨 출신의 이인로도 귀족의식의 발현이 아니라 가문의 문학적 능력이 우수함 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원간섭기에 비록 ‘재상지종’이라는 세족(世族)이 형성되기는 하지만, 관리 인사에서 세가(世家)의 자제들만이 아니라 재주 와 덕망이 높고 효렴방정(孝廉方正)한 선비들을 기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되었다. 이렇듯 여전히 가문의 배경이 존중되면서도 이전시기보다 개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변화 속에서 기로회는 삼달존을 갖추어 존경받는 원로사대부들의 모임으로서 자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삼달존이라는 기로회 가입기준 가운데 덕망은 모호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유교적 수양을 의미하기 때문에, 비천한 출신이거나 비정상적인 방 법으로 출세한 부류들과 구별하려는 의식 내지 권력에 빌붙어 정치적 격동 에 부화뇌동하는 부류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반영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여 기로회의 등장은 동시대에 인사행정이 파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천계(賤系) 출신의 관계 진출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유교 수양을 쌓은 사대 부들이 스스로를 구별 짓는 것과도50) 관련된다고 보인다. 관시(官寺)의 노 비 출신은 비록 왕의 총애를 받아 고관에 제수되더라도 사족과 더불어 나란히 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4. 조선시대 기로연 

 

 예(禮)를 중시한 조선왕조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제정하고 그의 준 하여 왕실행사와 국가정치를 시행함으로써 예치(禮治)를 지향하였다. 『국조오례 의』는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다섯 가지로 구성되었는데, 가례 중에는 기로연이 있었다. 기로연(耆老宴)은 기로소(耆老所)1) 에 등록된 전·현직 문신관료들을 위해 국가에서 베풀어주는 잔치로서, 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기로연은 매년 상사(上巳: 음력 3월 상순의 일곱 번째 날, 혹은 3월 3일)와 중양(重陽: 9월 9일)에 거행되었으며, 정2품의 실직을 지낸 70세 이상 문과 출신 관원이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종친 중 70세에 정2품 이상인 자, 정1품 관, 경연당 상관들을 위해서는 훈련원이나 반송정에서 기영회를 배풀었습니다. 이들 잔치에는 왕이 사은품을 하사하며 술과 1등급 풍악이 울려 퍼졌으며, 군신이 함께 어울리는 연회로서 왕실 행사가 아닌, 유일하게 왕과 신하가 함께 한 잔치였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후 태조 자신이 60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늙은 신하들을 모아 보제원에서 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는 예조판서가 주관하여 준비하였고, 왕명의 받은 승지가 특별히 파견되어 감독하였느데. 태조 이후에는 숙종, 영조와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하였고, 기로회에 참여하였다. 헌종은 영중추부사 이경석에게 궤장을 하사하기도 하였고, 숙종 임금은 기로신들에게 은배를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문무 신이 함께 참여하였으나, 조선 중기부터는 무신을 제외한 문신으로 70세가 넘는 공신들에게만 베풀다. 이는 70세가 넘은 원로 대신이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청하면 왕이 신하에게 지팡이나 가마 등을 하사하던 전례에 따랐다. 

2.1 조선시대 기로의 의미 

 '耆老'란 명칭은 과거 지식인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진 대표적 경전 중 하나인 <禮記>에 명기되어 있는 용어이다. <禮記ㆍ曲禮上>의 기록에 의하면: “六十曰耆, 七十曰老”라 하여 60세

가 된 사람을 “耆”라 하고 70세가 된 사람을 “老”라 칭한다고 하여 “耆老”란 용어가 60-70세의 노인을 가리키는 의미임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외연이 점차 확대되면서 60-70세를 넘은 모든 노인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아울러 “耆老”란 명칭은 대표적인 한자문화권인 한, 중국, 일본 삼국에서 공히 역사적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노인”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고대에 이미 “벼슬에서 물러난 卿大夫 및 士”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명청대에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노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검색하면 “耆老”란 명칭이 무려 565건이나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이 명칭이 사대부 계층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현재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의 화인사회에서는 이미 노인을 존중하는 의미가 담긴 이 “耆老”라는 명칭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2 耆老의 의미 및 변천 

 중국 고대 전적 중 耆老란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서적은 國語와 周 禮이다. 國語ㆍ吳語에 “有父母耆老而無昆弟者以告.”【부모님이 연로하나 형제가 없는 자는 조사하여 보고하시오.】라는 구절이 있으며, 周禮⋅天官ㆍ 外饔에: “邦饗耆老、 孤子, 則掌其割亨之事!”【나라에서 노인이나 고아를 대 접할 때 (外饔에서) 고기를 썰고 삶는 일을 관장한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로 보아 적어도 전국시대에 이미 연합형 합성어인 “耆老”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耆老의 의미에 대해 禮記ㆍ曲禮上은 “六十曰耆, 指使. 七十曰老, 而 傳.”【나이 육십을 耆라 하며, (일을) 지시하고 시킨다. 칠십을 老라 하며 (家 事를 자식에게) 전한다.】이라 하여, “耆老”란 의미가 6,70세의 노인을 의미함 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說文解字에서는 “耆”에 대해 “老也. 從老省, 旨 聲.”【老의 의미이다. (자형은) 老의 생략형을 따르며 旨음이다.】라 하였고, “老”에 대해서는 “考也, 七十曰老. 從人毛匕, 言須髮變白也.”【考의 의미이다. 칠십세를 老라 한다. (자형은) 人、 毛、 匕를 따른다. 

 수염과 두발이 하얗게 변했음을 말한다.라 하였으니, 비록 “耆”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는 않았으나, 70세를 가리키는 “老”와 같은 의미로 보았으니, 耆老를 6,70세 의 노인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판단된다. 이 두 문헌의 기록 으로 보아, 耆老란 명칭이 진한대에 들어와 6,70세에 접어든 노인을 의미 하 는 말로 그 내포가 확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 기록은 우리에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설명해 주거나 추론을 가능하게 해준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몇몇 전적과 합하여 볼 때, 적어도 진한시대에 와서 耆老라는 명칭이 ‘老人’이란 의미로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耆老에 대한 봉양(즉, “養耆老”)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안이었다. 즉, 단순히 노인에 대한 봉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孝道觀을 배양시키고자 하는(“致孝”) 중요한 정치적 교화목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耆老들은 지방학교(즉, “庠”)에서 교육적 효과가 기준에 미달된 자들에게 鄕射禮와 鄕飮酒禮를 비롯한 예법을 직접 체험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것을 “養耆老”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로들에게 “교육자”라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까지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에 耆老란 명칭은 신분에 관계없이 일반적인 “노인”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특정한 계층에만 한정되어 사용되었고 더 나아가 사회적 신분계층에 의해 “國老”와 “庶老”로 구분되어 왔다. 다음 기록을 보자: 有虞氏養國老於上庠, 養庶老於下庠...周人養國老於東膠, 養庶老於虞庠. 

【순임금 시절에는 上庠(태학)에서 國老를 봉양하고 下庠(소학)에서 庶老를 봉양하였으며... 주나라에는 東膠(태학)에서 國老를 봉양하고 虞庠(소학)에서 庶老를 봉양하였다.】 위 문장은 위에서 언급한 “養耆老”의 의미가 “養國老”와 “養庶老”로 구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鄭玄은 “上庠”과 “東膠”를 태학, “下庠”과 “虞庠”을 소학이라 주를 달았으며, 熊安生은 “國老”란 경대부 중에서 치사한 사람, “庶老”란 사 중에서 치사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위의 경문과 이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순임금 시절부터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耆老는 國老와 庶老로 구분되어 학교에서 이들에 대한 봉양을 담당하였다. 둘째, 國老는 경대부 중에서 치사한 사람을 의미하고, 庶老는 사 중에서 치사한 사람을 의미한다. 셋째, 國老에 대한 봉양은 태학이 맡고, 庶老에 대한 봉양은 소학이 맡았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國老는 태학의 교육자였고 庶老는 소학의 교육자였다. 

 그러나 봉건제가 무너지고 군국제가 시행된 한대부터 경대부와 사계 층에 한정되어 사용되던 노인의 외연이 ‘향인 중 현자’로까지 확대되어온 경향이 보인다. 상술한 예기와 왕제의 기록 “노인 모두가 학당에 나아온다.”에 대해 정현은 “노인은, 치사 및 향중의 노현자를 의미한다.”라고 주석하였고, 이 주석에 대해 공응달은 “향중의 노현, 즉 향인 중 벼슬은 하지 않지만 연로하고 덕행이 있는 자이다.”라고 해설하였으며, 황감 역시 “庶老는 서인 중 관직에 있었던 사람을 포함한다.”라고 해석하였다.  

 이 기록들에서 보면 시대의 변천에 따라 노인의 의미가 ‘사 이상의 신분으로 관직에 있었던 노인’이라는 신분적으로 매우 국한된 의미에서 ‘지방에 사는 덕이 높고 현명한 노인이나 서인 출신 중 관직에 종사했던 노인’까지를 포괄하는 의미로 확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당송대에 이르러 노인의 외연은 더욱 확대되어 60, 70세를 넘은 지방의 모든 노인까지 포함함으로써 신분과 특정 나이 범위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여러 전적에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로 <전당문권 삼백십>에 보이는 “천하 노인”이라는 구절과 <책부원귀 권팔십>의 “대사 천하 제주 노인”이라는 문구가 이를 입증한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耆老’라는 명칭이 신분과 나이라는 두 측면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범위가 확장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신분적으로는 본래 ‘경대부 및 벼슬에서 물러난 노인’이라는 매우 한정된 의미에서 시작하여 봉건제가 사라진 한 대와 남북조 시대에 ‘관직에서 물러난 일반 사대부 및 존경받는 지방의 노인’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당송대에 이르러서는 ‘6, 70세가 지난 일반적인 노인’까지 포함하여 현재의 ‘노인’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나이의 측면에서 보면, 본래 특정한 연령층 없이 ‘연로한 노인’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적어도 진한 시대에 와서 ‘60’과 ‘70’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정되었고, 후대로 갈수록 이 확정된 개념이 기준으로 작용하여 ‘6, 70세가 지난 모든 연령대의 노인’으로 확장되었다. 

 

2.3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耆老“

 

 주지하다시피, 敬老 혹은 尊老 사상은는 고대 중국인의 주요 의식 형식 중 하나로서, 敬老 혹은 尊老 사상으로 표현되며, 이는 오랜 전통의 일부이다. <예기>와 <제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옛날 유우씨는 덕을 귀하게 여기고 노인을 숭상하였고, 하후씨는 작위를 귀하게 여기며 노인을 숭상하였고, 은나라 사람들은 부를 귀하게 여기며 노인을 숭상하였으며, 주나라 사람들은 친족을 귀하게 여기며 노인을 숭상하였다." 이 문장은 고대 중국의 정치 및 사회에서 경로사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각 시대의 국가적 통치 이념이나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지만, 노인에 대한 숭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도덕적 모범이 되고 지위가 높아져 사회적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즉, 德, 爵, 齒 이 세 가지는 서로 독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밀접히 연결되어 하나의 개념을 형성한다. 이로 인해 이 세 가지 개념은 고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중하고 중시하는 의식 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맹자의 “삼달존” 사상은 이러한 개념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耆老"라는 명칭은 본질적으로 "德" 혹은 "爵"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존재가 되어왔다. 필자는 이에 대해 경전과 역사서에 기록된 耆老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통시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입증하고자 한다. 여러 역사서의 자료를 분석해보면, 耆老가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두 가지로 귀납될 수 있다. 

 첫째, 나이가 들수록 덕망과 학식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耆老가 존경의 대상이 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음 문장을 보자: 魯哀公이 공자를 애도하여 말하기를: “천이 이 덕망 높은 노인을 (세상에) 남기지 않으시어 내 지위를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오호라 애통하도다, 尼父여!” 위 문장은 魯哀公이 공자를 耆老라 칭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는 기록이다. 그 당시 이미 공자는 조국 노나라는 물론 각 제후국들 사이에서 가장 덕망이 높고 학식이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이 때문에 비록 정치적으로 중용되지는 않았지만 哀公을 비롯한 당시 위정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공자를 耆老라 칭했다고 하니, 耆老란 명칭이 덕망과 학식이 뛰어나서 존경을 받는 노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揚雄에 대한 기록도 이에 해당한다.

 노인이 오랫동안 낮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인정되어) 대부로 승진하게 되었으니, 권세나 개인적 이득에 무관심하였던 것이 이와 같았다. 반고가 보기에 양웅은 덕망과 학식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권세나 개인적 이득을 경시함으로 인해 오랫동안 낮은 지위에 처해 있다가 왕망의 신조가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대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반고가 왕망의 신조에서 대부가 된 양웅의 불충적 오명을 불식시키고 그의 정치적 지위를 미화시켰다는 의혹을 야기할 수 있으나, 문장 자체의 의미로 보자면, '노인'이라는 명칭이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노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였음을 잘 알게 해준다.

 

 

2.3.1 성호 이익의 노인십요老人十拗’

 

 노년의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성호 이익 본인을 노인에 비유하여 시를 지었던 이익의 '老人十拗'를 통해 노인의 심정을 짐작해 보자 

 “노인의 열 가지 좌절[拗]이란,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에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에는 눈물이 흐르며, 30년 전 일은 모두 기억되어도 눈앞에 일은 문득 잊어버리며,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은 없이 모두 이 사이[牙縫]에 끼며,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지는 것이니, 이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명담이다. 내가 장난삼아 다음같이 보충해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면 오히려 분별할 수 있는데, 눈을 크게 가까이 보면 도리어 희미하며, 지척咫尺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데 고요한 밤에는 항상 비바람 소리만 들리며, 배고 픈 생각은 자주 있으나, 밥상을 대하면 먹지 못하네.” ( 人事文 老人十拗, ‘者白日頓睡夜間不交睫哭則無淚笑則泣下三十年前事總記得 眼前事轉頭㤀了喫肉肚裡無總在牙縫裡面白反黑髮黑反白此太平老人袖中錦也余戯為之補曰㣲睇逺眺 則猶辨而大開目近視反迷咫尺人語難別而靜夜常聞風雨聲頻頻有飢意對案却不能食) 

이 시에 표현된 노인의 좌절은 쇠약해진 신체적 특징을 잘 담고 있다. 이러한 증상은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인 老眼을 비롯하여 노인성 난청과 耳鳴, 식욕부진, 기억감퇴 등이 담겨있다.

 

 

3.기로소 설치와 입소 자격  

 조선 시대에 시행한 기로소(耆老所)는 경로정신을 상징하는 제도였다. 관리가 관직 이력에서 영예로운 일은 노인이 되어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几杖; 안석(案席)과 지팡이)을 하사받는 것이다. 관리가 기로소에 들어가면 궤장과 기로연을 하사받았다. 기로소는 고례(古禮)에는 없던 법으로, 『경국대전』에 치사한 신하에게 궤장 하사법이 기록되어 있다. 궤장은 보통 찬성(贊成; 종1품)을 지내지 않으면 얻지 못하지만, 특별히 효행(孝行)으로 얻기도 했다. 태조 3년(1394)에 기로소를 임시로 설치하였고, 1400년(태종 즉위년)에 제도화하였으며, 세종 10년(1428)에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칭하였다. 

  주(周)나라에서 연덕(年德)이 높은 신하를 예우하던 제도로 연로(年老)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을 임금이 부형(父兄)의 예로써 대접하던 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재상이 치사하고 기로소

에 들어가면, 평생 녹봉을 지급하고 정기적으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여년(餘年)을 즐길 수 있게 한 것이다. 성종조에 반포한 『경국대전』에 봉조하와 기로소에 관하여, 기로는 임금 탄일(誕日), 정조(正朝), 동지(冬至), 국가 경사일, 임금 행차 때 평상복으로 숙배(肅拜)하게 하고, 국가 대사에 임금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다. 기로소 입사 자격은 벼슬(爵), 나이(齒), 덕(德)을 갖추어야 했다. 이 세 가지를 삼달존(三達尊)이라고 했다.(『맹자』 <공손추하>) 문과 급제자로 품계가 정2품(爵) 이상이고 나이가 70세(齒) 이상인 관리가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다. 

 기로소는 치사(致仕)한 사람이 들어간다. 60세는 기(耆)이며 일을 지시하는 나이이며, 70세는 노(老)이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나이라고 했다. 60세가 넘으면서 노인 대접을 받고 70세가 되면 퇴직한다는 뜻이다. 당상관 정2품 이상의 관원으로서 나이 70세가 된 자는 치사(致仕)하기를 허락받고 ‘봉조하(奉朝賀)’라고 일컬었으며, 임금이 궤장(机杖)을 하사했다. 정원은 15명이었다. 우로전(優老典: 노인 대우 벼슬)으로 선발되는 일종의 문관 원로원이다. 기로를 존경하는 예로서, 공경(公卿) 이하는 기로문(耆老門) 밖에서 모두 말에서 내리도록 했다. 음관이나 무관은 자격이 없었고, 문관도 과거에 입격한 경력이 없으면 입소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자격이 갖추어도 또 하나의 조건인 덕이 문제 되면 기로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이, 관직 경력, 학덕을 겸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기로소에 든 인물이 많지는 않았다. 70세가 되면 치사한 원로를 존경하는 의미가 크다. 70세가 되지 않더라도 사직을 청하면 대부분 허락한다고 했다.(『증보문헌비고』, 직관, 치사) 그러나 궤장 제도는 상반되는 뜻이 있다. 때로는 70세가 넘어도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기도 했다. 때로는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치사를 허락하지 않고 궤장을 하사하여 임금이 내린 안석(案席)과 지팡이에 편하게 의지하면서 국정 운영에 계속 참여하기를 바라는 뜻도 있었다. 황희(黃喜, 1363~1452)와 정창손(鄭昌孫, 1402~1487) 등 80세가 넘어도 실직(實職)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기로소에 들어가면 종신토록 녹봉을 받았다. 세종 11년에 유관이 우의정으로 치사하자 제4과의 녹봉을 종신토록 지급하도록 명했다. 당상관으로 치사한 자에게는 궤장을 하사하고 그 관사와 그 고을에서 달마다 술과 고기를 보내주게 하였다. 사궤장연은 기로연과 같이 치루었다. 임금이 궤장을 내릴 때는 선온을 내리고 일등악을 사악하였다. 『오례의』에 기영연을 매년 봄가을에 거행한다고 하였는데, 왕이 직접 기영회에 행차하여 보축에 서명하기도 하였고, 봄가을 연회에 선온과 사악을 내리는 것이 규례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에 흉사나 흉년이 드는 해에는 폐지하였다. 또한 소속 기로가 사망하면 기로소에서 제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사궤장 시행이 중지되었다가, 1623년에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77세에 궤장을 하사받는 것을 계기로 다시 시행되었다. 1676년(숙종 2)에 허목은 문과 출신이 아니었지만, 허적(許積, 1610~1680)이 문관 출신이 아니라도 삼공(三公)을 지낸 대신(大臣)이면 기로소에 들어감이 문제 없다고 주장하여 82세에 기로소에 들었다. 숙종 9년(1683)에 영부사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치사하자 숙종은 송시열에게 술과 고기, 달마다 관의 곡식을 주도록 하였다. 영종 21년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병상(李秉常)이 치사하자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치사한 정경(正卿)에게 달마다 쌀과 콩을 보내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3.1 기로소(耆老所)의 기능(機能) 

 

 조선시대(朝鮮時代) 기로소(耆老所)는 연로한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1765년(영조 41)부터 독립관서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왕도 참여했으므로 ≪대전회통≫에는 관부서열 1위로 법제화하였다. 기로의 모임은 중국의 당·송시대 부터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신종 (神宗)·희종(熙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낸 최당(崔讜) 등이 치사(致仕)한 뒤 유유자적을 목적으로 기영회(耆英會)를 조직하였다. 이에 조선시대 태조도 그 의 나이 60세가 되던 1394년(태조 3)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가 서쪽 누각 벽 위에 이름을 올리고, 그때부터 왕도 함께 참여하였다. 

 

 임금의 나이가, 정2품으로 70세 나이에 등록할 수 있는 기로신들에 비하면 낮은 나이지만, 기로소에 입소한 태조임금의 나이를 전례로 하여, 왕의 나이 60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왕은 태조 60세, 숙종 59세, 영조는 51세(망 60세), 고종 51세(망 60세)로 하여 기로소에 등록하고 입소하였다. 기로신으로 등록되는 공신들에게는 경로(敬老)와 예우(禮遇)의 뜻으로 이름을 어필로 기록한 뒤 전토와 노비·염분 등을 하사하였다.

 

 

3.2 조선 시대 임금의 기로소 입사 

 

 대개 기로소에 들어가는 노신(老臣)은 70세 이상이고 임금은 나이가 적었다. 기로소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과 이들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설치된 관서로서, 국왕은 이들을 빈(賓)으로 모시고 양로하는 은혜를 베풀어야 할 주인이었다. 임금이 나이가 젊으면, 연소(年少)한 왕이 노성(老成)한 기로에게 빈이나 스승의 예로 대할 수 있다. 그리고 대개 임금은 기로소에 들어가지 않았다. 태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는 50세를 넘겼지만 기로소에 들어가지 않았다.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4명의 왕이 스스로 기로소에 입사했다. 태조는 60세(1394, 태조 , 숙종은 59세(1719, 숙종), 영조는 51세(1744, 영조 20), 고종은 51세(1902, 고종 39)에 기로소에 입소했다. 숙종은 59세 되는 해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2월 11일에 기로소에 들어가는 행사를 거행하고 4월 18일에 기로신(耆老臣) 10인에게 기로연을 베풀었다. 숙종이 기로사에 들어갈 때 절일(節日)에 내린 식물(食物) 및 매달 약값, 토세(土税), 어선(魚鮮)을 나누어 주었고, 낙죽(酪粥), 전약(煎藥), 제호탕(醍醐湯) 등을 내렸다.

 

 영조는 51세에 60세를 바라보는 망육(望六; 60을 바라보는 나이)이라면서 스스로 기로소에 입소한 뒤, 국사를 사도세자(1735~1762)에게 맡겼다. 영조는 1736년(영조 12)에 기로소에 처음 방문하여 입사 의지를 표명하였고, 1744년(영조 20)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744년 9월~10월에 의례를 시행했다. 영조의 기로소 입사 의례는 선왕인 태조와 숙종의 계승 의지를 

표명하고, 이를 통해 태조와 숙종의 계승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기로소 입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시행된 것이다. 조의 기로소 입소에 대해 도제조 이신명(李頣命:숙종 45년)은 태조가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간 것은 전하는 말은 있지만 당대의 분명한 기록이 없다는 것, 훗날 심희수(沈喜壽)와 김육(金堉)이 작성한 기로소 선생안의 서문이나 『선원보략(璿源寶略)』에는 관련 기록이 있다는 것, 태조의 이름을 제명(題名)한 기로소 서루(西樓)에 사등롱(紗燈籠)을 설치했다는 말이 전해진다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다. 이신명이 태조가 기로소에 제명한 것은 당시 기로신들이 잠저(潛邸) 시절의 옛 친구였으므로 국왕의 위세와 존엄을 낮춘 것이라고 해석했다. 위의 내용처럼 태조의 기로소 입소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태조의 기로소 입소는 구전(口傳)이 전달되면서 역사적 근거를 남겼고 또한 후대 신하들에 의해서 그 사실은 『선원보략』에 의하여 증명함이 태조의 기로소 입소와 그 업적이 보존케 되었고, 역사 사료로 남겨졌다. 

 세조 2년(1456년) 3월 3일(壬申)에 기로신들이 보제원에서 잔치를 베풀었고, 왕이 주악을 내려주었다. 또한 박원형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니, 모였던 자들이 모두 감읍하였다. 기로회에 승지(承旨)를 보낸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선온(宣醞)은 왕이 마시고 신하에게 하사했던 ‘향온주(香醞酒)’이다. 어사주(御賜酒) 향온주는 궁에서 임금이 마시고 또 신하에게 하사하기 위해 따로 만든 술로 선온이라고 했다. 어의가 처방을 내려 빚은 술로 양온서라는 관청에서 철저한 관리하에 녹두를 누룩으로 만들어 빚어진 술이며 맛이 깨끗하고 향기로운 술이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세조는 기로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하들을 위해 술과 음식과 음악을 하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숙종 45년(1719년)은 숙종이 59세가 되는 해로서 이를 기념하여 이해 2월 12일 기로소에 입소했다.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임금을 축하했다. 숙종은 이를 기념하여 4품 이상의 조신(朝臣) 중에서 70세 이상인 자와 5품 이하에서 사서인(士庶人)까지 80세 된 자에게 가자(加資)하는 은전(恩典)을 내렸다. 왕은 4월에 먼저 기로신하 10명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한편 숙종은 선대 태조 임금께서 기로소 입소한 근거 자료를 찾지 못해 기로소 행사를 거절했지만, 종실들의 상소와 신하인 심희수 및 김육의 글과 『선원보락』의 기록을 근거로 한 신하들의 상소에 숙종의 기로소 입소가 결정되었고 기사의계첩(耆社契帖)을 남겼다. <기로사계첩> 계첩서 “ 친히 은잔 한 벌을 하사하셨다. 은잔의 가운데에 금으로 ‘사기로소’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어서 다섯 잔을 잇달아 따르라 명하시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모든 기로신은 만취하였다. 연회가 끝나자 모든 기로신들은 급히 의자 앞으로 나아가 절을 올리며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숙종이 각각 술이 부족하지 않은지 하문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대답하였다. 이후 숙종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셨다.强痾陞殿羣官集 作樂行醪十老臻

鐫字金盃光似玉 揷花烏帽鬢如銀 斯筵本出尊高意 滿酌何妨到手頻(나도 모르게 내 나이 60에 이르러 친히 기로모임에 참석하여 옛 법을 준수했네. 병을 무릎 쓰고 전에 오르니 여러 신하들이 모이고 풍악이 울리고 술을 돌리니 기로신이 10명에 이르는구나. 잔에 금으로 새긴 글자는 옥과 같이 빛나고 사모에 꽃을 꽂은 귀밑머리는 은빛처럼 희구나. 이 자리는 기로신의 높은 뜻을 존경하고자 하는 자리 만취하고자 하는데 어찌하여 술잔이 오가는 것을 방해하는 

가?) 위 글 기사계첩 서문에는 숙종은 기로신들에게 “사기로소(賜耆老所)” 네 글자가 새겨진 은배를 하사하였다. 기로신들은 다섯 번째 술잔은 임금에게 하사받은 은잔을 사용했다. 그날 기로신들을 위하여 숙종은 시를 남겼고, 시에는 귀밑머리 은빛이고 오사모에는 꽃을 꽂았다. 라고 묘사하여 연회 장의 기로신들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 20년(1744년)은 영조의 보령이 51세(望 六旬)가 된 해로서 태조와 숙종의 전례에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고 이어 진연(進宴)을 거행했다. 대왕대비 인원왕후의 58회 생일이 그해 9월 29일인데 이를 기념하는 진연을 함께 거행하자는 신하들의 상소에 여러 번 사양하다가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영조는 진연 비용을 진홀청에서 1천곡을 지출하자는 김재로의 의견을 반대하고 800곡으로 줄이라고 말하고, “팔진미가 있더라도 먹는 것은 입에 맞는 음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9월 9일에 드디어 영조는 기로소에 입소하여 궤장(几 杖)을 받았으며, 9월 10일에는 경덕궁 숭정전에 나아가 왕세자와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이날 왕은 기로소 대신들을 경덕궁 경현당에서 인견하고 음식을 베풀었으며, 은병(銀甁) 한 벌을 기로소에 하사했다. 그리고 관리, 사서인(士庶 人) 중에서 80세 이상 된 자에게 모두 벼슬을 가자(加資)했다.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그려진 기사경회첩의 네 번째 장면인 <사락 선귀사도(賜樂膳歸社圖)>는 영조가 내린 은잔(銀盞)을 받들고 돌아가는 기로신들의 행렬을 그린 그림이다. 기로신들은 처용무동과 악공을 앞세우고 호랑이 가죽이 깔린 교자(轎子) 가마를 타고 있다. 소를 몰고 지나가던 인물, 머리에 짐을 지고 있는 아낙네 등 행렬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풍속화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다섯 번째 장면인 <본소사연도>는 기로소에서 계속된 기로연 장면을 그린 것으로, 처용무동의 공연, 악대의 편성, 무동의 참여 등 연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건물 안에 촛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까지 연회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기로연의 진연을 절약하여 행할 것을 명하고, 그 또한 검소하고 간소하게 할 것을 주장한 것으로 보아, 몸소 근검을 실천한 것으로 보여진다. 

고종 광무 6년(1902년) 고종의 성수 51세와 임금재위 40년을 경축하는 의미로 기로소에 들 것을 청했다. “5백년 동안에 네 번밖에 없는 일이니 이를 경축하는 연회를 열게 해 달라.”고 완평군 이승응(李昇應)이 청했다. 고종은 관례를 따라 기로소 입소를 허락했으나 연회는 거절했다. 황태자는 4월 13일(음력 3. 6) 진연을 열게 해달라고 다시 상소하여 진연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고종은 “연회는 음식을 차리고 놀고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너의 효성이 간절하여 마지 이 못해 허락은 하지만, 모든 절차를 간략하게 하여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달라.”고 하면서 또 다시 간소함을 강조했다.  

 황제는 이날 “내가 51세와 어극(御極) 40년을 경축하는 것은 백성들과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한 것이므로 지금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기로소에서 경운궁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백성들의 고통을 말하게 하여 올리라”고 지시 했다. 백성의 상언을 듣겠다는 것이다. 고종은 기로소 입소를 마친 다음날 백관들의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내렸으며, 기로소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하였고, 노인들에게 품계를 주어 우대할 것을 지시했다. 여기서도 음악과 네 가지 정재(呈才)가 공연되었다. ‘한영 우(조선왕조의궤 773:2010)’ 또한 이날을 기념하여 황제·황태자 어진도사와 《〔고종·순종〕어진도사도감의궤》가 제작되었고 『고종임인진연의궤』도 제작되었다. 고락(苦樂)을 백성과 함께 하고자 했으며, 고종은 조선왕조에 기로소에 참석한 네 번째 왕이며 마지막 왕이 되었음을 알 수 있고, 잔치를 간소하게 함을 주장하였다.

 

3.2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屏)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屏)은 임인(壬寅)년(1902, 광무 6)에 고종이 기로소(耆老所: 70세 이상, 정2품 이상 문관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에 들어가는 의식 및 이를 기념하는 진 연(進宴) 모습을 담은 병풍이다. 1902년은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 어극 (御極) 40년이 되는 해이자, 고종황제가 51세로 기로소에 들어간 해였다. 이를 경축하기 위해 황태자가 올린 1902년의 진연은 음력 4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4월의 진연은 한 달 앞서 3월에 있었던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는 연향이었고, 11월의 진연은 고종의 어극 40년차를 축하하는 연향이었다.  

 고종이 쓴 기로소 어첩 서문 일부를 명기 한다. 

“ 조정에 연로한 신하들이 많고 백성들 중에도 장수하는 늙은이가 많은 것은, 실로 하늘과 조상이 이 나라에 자손만대토록 영원히 보존될 복을 내려준 덕분이다. 이 자리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똑같이 함께 즐기므로 온 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이 의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은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일은 비단 선대의 훌륭한 일을 계승하게 되어 기쁘고 다행스러울 뿐만이 아니다. 백성들을 교화하는 도리로는 늙은이를 공경하여 우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늙은이를 편안하게 하면 백성들이 편안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면 나라가 안정된다. 고황제께서는 자손만대로 하여금 백성들과 화합하는 것을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근본으로 삼게 하셨으니, 그 크고 원대한 계책이 이와 같으셨다. 그런데도 나 소자가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

 

3.4 기로회와 양로례의 차이 

 양로례는 학문과 덕행이 있는 연로자를 초대하여 주식(酒食)을 대접하고 그 학덕을 공경하는 예를 행하는 의식이다. 성균관에서 노인의 학덕을 배우는 방도로 여겼다. 세종은 양로연을 행함에 양로례를 세워서, 경향(京鄕)에서 매년 봄 가을 석전 뒤에 70, 80 이상의 노인을 모아 귀천을 관계하지 말고 향연(饗宴)하도록 하였다. 이로서 성상(聖上)의 양로하는 은혜를 넓히도록 할 것이며, 또 그들로부터 좋은 말을 구하여 정치에 시행하도록 하면 인륜이 두터워질 것이고, 풍속도 바르게 될 것이며, 천도가 순하게 되고 음양이 고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식을 ‘배로’(拜老)라고 했다. ‘배로’란 한(漢), 주(周) 때 학궁(學宮; 국학)에서 노인을 봉양하던 의식으로, “주나라에서는 인생 50세면 향리에서 봉양하고, 60세면 나라에서 봉양하고, 70세면 학궁에서 공양한다.”고 하였다. 

 

주(周)나라 서백(西伯)이 양로를 잘하였다고 하였고, 후한 때 광무제가 벽옹(辟雍; 국학)에 거둥하여 양로례를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왕들은 대체로 정기적으로 성균관에 거둥하여 시학과 양로를 행하는 배로 의식을 거행했다. 양로례를 행하는 곳은 궁궐이 아니라 반드시 학궁에서 거행했다. 학궁은 예의(禮義)를 강명(講明)하는 곳이기 때문에, 단순히 노인 봉양이 음식 공궤(供饋)에 있지 않고 국왕이 예의를 높이는 뜻을 백성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허목(許穆, 1595~1682)은 요순(堯舜), 은주(殷周) 4대가 모두 노인 봉양을 학궁에서 한 까닭은 학궁이 효(孝), 인(仁), 예(禮), 의(義)를 강명(講明)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기로소도 그러한 뜻이 있다고 보았는데, 삼왕(三王) 때에 좋은 말[善言]을 구하고 돈후한 덕을 기록하는 성종은 자주 양로례를 행했다. 

 성종은 즉위 3년 2월에 성균관에 나아가 석전을 올리어 선성에 제사하고, 명륜당에서 문신 2품 이상과 성균관원을 인견하고, 경서를 문답하고 논하며, 술과 명주를 내렸다. 성종은 성종 7년 3월에 석전을 올리고, 명륜당에서 책문으로 선비를 뽑았으며, 가을에는 명륜당 북쪽에 존경각을 새로 짓도록 명했다. 성종 8 년(1477)에 성종이 성균관에 행행하여 문선왕에게 석전을 올리고, 이어 대사례를 거행했다. 성종은 성종 9년(1478) 4월에 성균관에서 양로례를 행했다. 행사 순서는 성종이 면복을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작헌한 다음, 명륜당으로 가서 음식을 권하는 예를 행하였다. 예에 모시는 신하와 유생이 모두 2800여 명이었다.  

 성종이 노인들에게 말을 청하니, 노인들이 차례로 대답하였다. 성종 9년 8월에도 성균관에 나아가 석전을 올리고, 사단에서 대사례를 행하고, 과거를 보아 선비를 뽑았으며, 양로례를 행하여 양로걸언하여 좋은 말을 청하고,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강론하는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 다음 해인 성종 10년 4월에도 성균관에 나아가 석전을 올리고 양로례를 행했다. 이처럼 왕이 성균관에 나아가 석전을 올리고 기로연이나 대사례를 행하고 과거를 보기도 하는 것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성종은 공자와 원로들에게 예를 올리는 성대한 행사를 행하여 스승을 높이고 도의 를 숭상하는 뜻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을 감동하게 하고자 의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문(孔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성종 9년 2월에 성종이 성균관에 이르자, 지평 이세광(李世匡)과 정언 성담년(成聃年)이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세조조에 출가(出家)하여 산사(山寺)로 들어간 공문의 죄인이니, 이 예에 참석시켜서는 안 되니 내쫓으라고 요청하여, 김수온은 예에 참석하지 못했다.

 

3.5 중국의 양로례養老禮 

 중국의 양로례는 후한 효명제 때 시행되었다. 영평永平 2년 10월 원일에 피옹辟雍에서 나 아가 삼로오경三老五更을 예로 들어 양로례養老禮를 행한 것이다. 당시 삼로오경三老五更은  

사도와 태부, 태학 강사와 이미 삼공을 지낸 자의 명단을 올려 그 중 덕행이 뛰어나고 나이가 많은 자를 삼로로 삼고 그 다음가는 경 한 사람을 오경으로 삼아서 정해졌다. 이에 따라 이공이 삼로로, 환영은 오경이 되었다. 당시 의식에서는 녹명과 팔일을 갖추고 뜰에서는 만무 등이 연출되고 있었다. 삼로오경에게는 영작과 식읍, 녹 등을 내렸고 천하의 삼로에게도 술과 고기를 나눠주었다. 

 

 한편 북제北齊가 중춘영진仲春令辰을 취하여 진양로례陳養老禮를 갖추었고 장소는 국학 學이었다. 대상은 삼로오경三老五更과 국로國老, 서로國老, 庶老에 이르렀다. '수서' 예의에서도 진양로례陳養老禮를 갖추었는데, 그 시기는 중춘량진仲春令辰이며 장소는 국학國學이었다. 대상은 삼로오경과 국로, 서로 등이었다. 당에서는 중추 길진에 황제가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고 태학에서 삼로오경, 국로, 서로를 대상으로 양로의례를 베풀었다. 송에서도 양로는 태학에서 행하였으며 황제는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었다. 삼로오경과 국로, 서로를 불러 연회를 베풀고 사신은 삼로가 논하는 선언과 선행을 기록하였다. 양로 연이 끝난 익일에 삼로오경은 궐에 나아가 표를 올려 사은하는 것으로 예가 끝났다.

 

3.6 조선시대 궁중 양로연宮中 養老宴의 성립

 

 양로의 예는 시대에 따라 형식과 대상, 복식, 시기 등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양로의 예 혹은 노인사설의를 통해 군주가 경로의 모범을 연례 의식으로 보임으로써 인륜의 근본이 되는 효를 진작하고 예치와 덕치 등 교화를 이루어 왕도를 실현하려는 정신이었다. 유교사회를 지향하였던 조선사회에서 이 같은 상징성을 가진 양로연에 관한 관심은 컸었다. 양로연의 설행은 이미 태종 대에 논의가 있었던 듯하다. 세종 8년 7월 세종이 처자가 없는 나이 70세 이상 된 자를 수양하려는 뜻을 밝힌 데 대해 황희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였다. “양로의 법에 대해 태종은 일찍이 노인들을 한 곳에 모으 고 의식과 식사를 갖춰 봉양하려 했다.”라고 한 것이다. 

 다만 이때 노인들이 모이려 하지 않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면서 황희는 노인들에게 각기 의식과 식사를 내려 노인 자신 의 편리를 따르면 될 것이라는 견해를 올렸다. 양로연 실행 시도로 보기에는 어려운 면도 있으나 태종이 노인들을 한 곳에 모아 의식을 갖춰 봉양하려 했다는 점은 의식과 식사를 내리는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세종은 일단 황희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튿날 양로조건을 의정부와 제조가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 하여 이를 정한 바 있었다. 실제 양로연의 설행 의견은 앞장 서두에서 잠깐 언급한 바처럼 세종 2년 11월에 제기되었다. 창평군령 송부가 양로의 목적을 養三老五更·子孫死於國事則養其父祖· 養致仕之老·養庶人之老로 나누고, 하은주 시대 등의 의례를 소개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옛적에 나라에서 양로의 항목으로 네 가지가 있었으니, 삼로오경의 제도가 첫째요, 자손이 국사로 죽었으면 그의 부모를 기르는 것이 둘째요, 치사한 노인을 기르는 것이 셋째요, 서민 늙은이를 기르는 것이 넷째입니다. 유고씨 때에는 연례로 하였고, 하후씨 때에는 향례로 하였고, 은나라에서는 식례로 하였고, 주나라에서는 앞서의 예를 배워 이를 겸용하였는데, 1년 사이에 무릇 일곱 번이나 행하게 되었다 합니다.  

 마셔서 양기를 기르기는 봄과 여름에 하게 되고, 먹는 것으로 음기를 기르는 것은 가을과 겨울에 하게 되고, 대락을 합주할 때에는 반드시 양로하는 행사에까지 미치게 하므로, 봄에 태학에 들어가서 춤을 합하여 출 때에도 양로의 일을 행하고, 가을에는 태학에서 배운 것을 잘하고 못한 것으로 나누어 주면서 소리를 합하여 노래하게 할 때에도 양로의 행사를 하게 되며, 늦은 봄에 천자가 학교에 가서 볼 때면 또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도로서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청컨대, 유사를 시켜 양로의 예를 세워서 서울이나 지방에서 모두 매년 춘추 석전 뒤에 70, 80 이상의 노인을 모아서 귀하고 천한 것을 관계하지 말고 향연하도록 하여, 성상의 양로하는 은혜를 넓히도록 할 것이요, 또 그들로부터 좋은 말을 구하여 정치에 시행하도록 하면 인륜이 두터워질 것이며, 풍속도 바르게 될 것이요, 천도가 순하게 되고 음양이 고르게 될 것입니다. 

 양로연은 국초부터 나이 80세의 대소 관원 및 일반 사서인을 대상으로 베푼 경로 행사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매년 늦가을(음력 9월)에 양로연을 베푼다. 대소 관원과 관인 중에서 나이 80세 이상인 자는 연회에 참석한다. 부인에 대해서는 왕비가 내전에서 연회를 베푼다. 지방에서는 수령이 내외청에서 따로 연회석을 마련하여 잔치를 한다.(경국대전 권지3, 예전, 연향) 양로연은 용어처럼 노인을 위한 행사로, 그 대상이 80세 이상이며, 내연과 외연, 중앙과 지방에서 각기 베풀었다.  

 이외에 80세를 대상으로는 단순한 노인 봉양이 아니라 특별한 사회적 봉양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효자와 효부를 선정할 때에 노부모의 나이가 80세 이상인 자를 대상으로 했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거나 봉양할 자손이 없는 노인에게는 먹고 입을 것을 주도록 했으며, 병이 든 노인 중 70, 80세에게는 은택을 베풀도록 했다. 80세의 부모를 둔 아들의 체직을 허용했으며, 70세와 마찬가지로 자녀를 요역을 면제하여 복호의 대상으로 삼았다. 복호와 관련한 특징은 그 대상이 정2품에서 모든 노인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4. 기로연과 술  

 선온宣醞의 위상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宣醞은 국왕이 특별하게 술을 내리는 일이나 술 자체를 의미하였고, 宮醞이라고도 불리었다. 국왕은 특별히 위로, 축하, 우대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아 선온을 하사하였다. 經國大典과 國朝五禮儀에는 사신 및 외관에게 내리는 선온의 사례를 중심으로 선온의 위상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선온은 국왕이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길에서 선온을 전달하러 가는 사람을 만나면 고위 관료라도 말에서 내려 몸을 굽혀 예를 표해야 했다. 이처럼 공식적인 행사에서 선온을 내려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국왕이 특별히 내려주는 사례도 있었다. 장사를 겪은 신하를 위로하거나, 각종 서적 편찬이나 왕릉 조성, 축성 등이 완료되는 과정에서 그 공로를 치하할 때, 국왕 및 왕실 구성원이 병에서 쾌차했을 때 수고한 신하들에게 위로와 우대의 의미를 담아 선온을 내려주었다.

 

5. 기로연 회화를 통한 실제 참여 자들에 대한 이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로연회도의 일부.구글 이미지

기로연회도(耆老宴會圖) 또는 권대운 기로연회도(權大運 耆老宴會圖)는 조선 후기인 1690년(숙종 16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원래 8폭 병풍으로, 서울대학교 소장본에는 8폭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모임 참석자를 묘사한 중앙의 2폭이 소장되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 복권된 영의정 권대운이 같은 남인 세력인 좌의정 목내선, 예조판서 이관징(李觀徵, 1618~1695), 공조판서 오정위(吳挺緯, 1616~1692)를 자신의 저택에 초대해 재집권을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 장면이 〈기로연회도〉라는 그림에 남아있다. 

대신 4명의 아들들도 권대운의 손자 권중경과 함께 모임에 참석했다. 〈사로연회병서〉[1]에 따르면 위 사진의 인물들은 왼쪽부터 이옥, 목임일, 이관징, 목내선, 권대운, 오정위 순서이다. 불과 5년 뒤 남인이 다시 몰락하여 그림 속 인물들이 전부 관작을 잃고 유배형에 처해졌음을 생각하면, 권력의 무상함이 잘 드러나는 그림이기도 하다(구글 이미지)

 

 




 

기석설연지도(耆碩設宴之圖). 耆老會의 모습 

광해군 13년(1621)에 거행된 기로소의 연회 장면을 묘사한 규장각 소장 <기석 설연지도>(고축 1149-10)<그림 1>는 광해군대의 기로소 연회도로서 실물이 남아 있는 유일한 예이다. 그러나 현재는 상반부가 소실되고, 하반부도 서문과 좌목의 앞부분이 결실된 채 잔편 형태로 전해진다. 

연회의 성격과 의미는 좌목에 기록된 인물들이 광해군의 즉위와 폐모 살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주도했던 공신 세력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광해군대 왕권 유지의 역사적 만행에 대한 보상을 정치적 결속"을 도모하고 과시하기 위한 성격이 강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미술사적으로는 선조 18년 (1585)의 <宣祖朝 耆英會圖>를 충실히 계승한 작품으로, 조선 전기의 대관적인 소경산수 인물도 중심 기록화에서 중기의 전각과 행사 장면 중심의 인물 풍속화적 기록화로 변화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며, 이러한 단순화 경향이 한 단계 더 진행된 모습을 보여주는 예로 이해되었다. 

연회에 동원된 악기편성은 樂學軌範에 예시된 2~3等 賜樂의 악기편성과 유사하기 때문에 연회의 성격이 私宴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 두 그림은 아직 기본적인 사항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아 보다 심도 있는 보완적 고찰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연회의 성격과 맥락은 기존의 해석과 달리 脫광해 군이나 反광해군 성향의 원로대신들이 중심이 된 연회라고 반대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적지 않다. 또한 연회도가 제작되던 시기와 과정 및 상황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보완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규장각의 <기석설연지도>와 국사편찬 위원회의 <기로소연회도>는 동질성과 이질성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두 그림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인식되거나 분석되지 않았다. 나아가 두 그림이 애초 1621년의 연회에 참석한 뒤 연회도를 분급 받았던 참석자 중 누가 분급 받았던 것인가 하는 전승내력도 파악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추적해보는 작업도 필요하다. 

沈喜壽의 기로소 연회 서문과 찬시의 복원적 고찰 <耆碩設宴之圖>에 묘사된 광해군 13년(1621)의 기로소 연회에 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심희수가 쓴 서문과 찬시가 유일하다<그림 3, 4>. 이는 <기석설연지도>와 <기로소연회도> 안에 씌어 있고, 심희수의 손자 심유행(1606-?)이 인조 27년(1649) 경에 간행한 심희수의 일松집에도 '기영회시병서'로 수록되어 전한다.

그런데 문집본은 찬시 제1수와 관서, 좌목은 물론 서문의 일부 구절까지 삭제하여 수록했고, 글자도 몇 자는 고쳐 쓰거나 잘못 쓰여 있다. 그리고 규장각의 <기 석설연지도>는 서문과 좌

목의 앞부분 3~4행이 소실된 채 일부만 남아 있다. 이에 반해 국사편찬위원회의 흑백사진 본 <기로소연회도>는 좌목의 이름 일부만 먹으로 칠해져 있을 뿐, 대부분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문장이나 글자의 내용도 가장 좋은 책본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기로소연회도> 본을 저본으로 삼아 세 가지 본의 동이와 차이를 대조하여 서문과 찬시 및 좌목의 원형을 복원해 놓은 뒤, 이를 번역해 놓고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아래에 제시한 서문과 찬시는 최종 대교 결과이며, 3본의 동이와 차이에 관한 대교 내용은 각주에 밝혀 놓았다. 

耆英之有會,尚矣。唐宋高賢結社流名之後,延及我東方,風流諸彥,踵之。

美而傳芳者,厥有譜牒。逮于本朝,益恢張而侈大之,春秋令節,宴遊聯翩,不但在下自相娛樂,乃至君上亦與焉,其扶奬錫賚之典,靡所不備。觀於太祖大王留御諱親筆於本所西樓上,亦可驗矣。不幸各樣舊蹟,蕩然淪失於壬辰兵火,尹海平子固相公之序,略已及之矣。經亂三十年來,庶事草創,設會僅五六遭,而上年與今年冬,皆不以宴日上聞,蓋以軍興多事及邊警益急也,豈非大可惜者哉。然近歲社員之濟濟,前古所未有,吁亦異矣。今玅之會,瑞寧鄭相公在南鄕,判樞府韓相公,漢山趙相公,全城李相公,皆以病不預焉。無故在席者,正符香山諸老之數,老拙之年七十四,晉原柳相公年七十三,右議政漢川趙相公,知樞府申相公,年各七十一,領敦府蓬萊鄭相公,左議政朴相公,延原李相公,知敦府南相公,知樞府麗陽閔相公,年各七十,倣故事合算,總六百三十九籌,猗歟盛哉。但論資與齒,糠粃皆居前,亦是僭踰之可愧者也。人生於世,孰不欲壽與貴,而鮮有兼之者。何幸竝生明時,能兼人之所難兼者,而相與盍簪,優游於黃耇之場也。樽俎管絃,雖若不出於聖上之賜,而亦莫非聖恩所及,感激之深,烏可量也。至如氷壺相映於接膝之筵,鶴髪交輝於蘸甲之杯。纖歌繞於樑上,俱悅聰聵之耳,妙舞運於掌中,均諧醒醉之目。銀燭金爐,能壓夜寒之稜稜,瑤琴玉篴,剩奪地籟之蕭蕭。使傍人驟而觀之,未必不以為天仙之齊會,王母之並臨,不亦豪逸之甚乎。第以時屈擧嬴,興盡悲來,不能無無已太康之懼。且念艱虞日甚,難卜後會之遲速,況可望老拙之復得與會耶。言及于此,亦難免大耋之嗟。仍謂有司南相公曰,本所物力。綿薄,雖未效全盛時生綃廣軸之設,而獨不得紬布小簇子題名傳後之具乎。仍為之述懷記事,構拙七言近體三首,錄奉諸老相公案下,以冀和教,其亦不自量也已。詩曰:達尊遭遇盛於斯,善養周家德澤垂。經濟平生徵事業,風流晚節暢襟期。一陽將動金樽滿,九老同歡玉漏遲。只恨西陲方有警,綺筵不使聖明知。卿相於今幾老成,域躋仁壽世河清。廟堂正值詢黃髮,祠祿猶知貢赤誠。乘暇遊從非愛酒,逢場談笑豈忘兵。半燒銀燭先扶出,宮路愁聞玉篋聲。耆碩從前設宴頻,自天雲澤聖朝仁。恒宣法醖兼仙樂,別遣中官與近臣。此會適丁多難日,幾人重見太平春。鶴毛鮐背形容古,合著丹青妙入神。天啟元年辛酉冬至前一日(即初八日),韈線老拙青城沈喜壽謹稿。

 「기로소 연회의 서문과 찬시」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원로들의 모임인 耆英會는 유래가 오래되었다. 唐宋의 고상한 현인들이 모임을 만들어 아름다운 이름을 전한 이후, 동방의 우리나라에 전해져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 그 아름다운 자취를 따르고 꽃다운 이름을 전한 것이 여러 기록에 남아있다. 우리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더욱 번창하고 성대해 져, 봄가을의 좋은 계절에는 잔치를 열고 놀며 즐겼는데, 신하들끼리 서로 즐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임금께서도 함께 참여하시어 표창하고 하사해주신 은전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태조대왕께서 耆老所의 西樓 위에 御諱 親筆을 남기신 것을 보면, 역시 이를 징험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러 가지 옛자취가 임진년의 전쟁으로 모두 망실되어 버렸는데, 이는 해평인 윤근수(1537-1621) 상공의 기로소계벽 서문에 이미 대략 언급되어 있다. 난리를 겪은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모든 일이 다 처음 새로 하는 것이라 기로회를 연 것은 겨우 다섯 번에 불과했는데, 작년과 금년 겨울에는 모든 회 날짜를 임금께 보고해 올리지 못했다. 대개 전란으로 군무가 많고 북방 경계의 경비가 급박해졌기 때문이니, 어찌 심히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근래 기로소에 든 당상들이 전에 볼 수 없이 많아졌으니, 또한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모임에 瑞寧府院君鄭仁弘(1535-1623, 87세) 상공은 남쪽 지방에 있고, 판중추부사 한효순(1543-1621, 79세) 상공과 한산군 조진(1543-1625, 79세) 상공, 전성군 이준(1545-1624, 77세) 상공은 모두 병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무탈하여 직접 참석한 사람은 백거일(772-846)의 향산구노회의 노인 숫자와 꼭 부합하는데, 늙고 졸렬한 내 나이가 74세이고, 진원부院君 유근(1549-1627) 상공의 나이가 73세, 우의정 한천부院君 조정(1551-1636) 상공과 지중추부사 신연(1551-1623) 상공이 각각 71세, 영돈녕부사 봉래부院君 정창연(1552-1636) 상공과 좌의정 박홍거(1552-1624) 상공, 연원부院君 이광정(1552-1629) 상공, 지돈녕부사 남금(1552-1635) 상공, 지중추부사 여양군 민인백(1552-1626) 상공의 나이가 각각 70세인데, 고사에 따라 나이를 모두 합산하면 총 639세이니, 아아! 참으로 성대하도다! 다만 품계와 나이를 따져 무능한 내가 모든 사람의 앞에 있으니, 이 또한 외람되어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들 장수와 부귀를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이를 겸비한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밝은 시절에 나란히 태어나 사람들이 겸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겸하고, 친구들과 더불어 서로 기로연 자리에서 노니니, 이 얼마나 행운이란 말인가? 술과 안주와 음악이 비록 임금께서 하사해 주신 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또한 성은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깊은 감격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고결한 인품을 갖춘 분들과 서로 무릎을 맞댄 채 자리에 앉고, 가득 따른 술잔에는 백발이 서로 비치는데, 대들보를 휘감고 퍼지는 고운 노래는 귀 밝은 사람이나 어두운 사람이나 모두의 귀를 즐겁게 하고, 손바닥을 휘젓는 아름다운 춤은 취한 사람이나 깬 사람이나 모두의 눈을 즐겁게 한다. 화사한 은촛대와 금화로는 능히 으슬으슬한 한밤의 한기를 덜어주고, 아름다운 거문고와 옥피리 소리는 쓸쓸한 대지의 바람소리를 묻히게 하고도 남는다. 만약 주변 사람들이 와서 보게 한다면, 하늘의 仙女가 일제히 모이고, 西王母도 아울러 왕림한 듯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을 터이니, 이 또한 얼마나 호방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다만, 시대가 어려운데 사치스러운 일을 벌려, 흥이 다하자 슬픈 기분이 드니, 너무 편안하게 지내서는 아니 된다는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나라의 근심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생각하면, 다음 모임이 언제일지조차 기약하기 어려우니, 하물며 이렇게 늙고 졸렬한 내가 어찌 다시 모임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말이 이에 미치자, 또한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는 탄식을 면할 수 없다. 그리하여 耆老 所 有司를 맡고 있는 南瑾 상공에게 말하였다. “우리 기로소의 물력이 미약하고 보잘 것 없어, 비록 전성기 때처럼 생사로 넓은 족자를 만들던 것을 본받을 수야 없겠지만, 어찌 명주로 작은 족자를 만들어 이름을 적어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것조차 불가능하기야 하겠습니까?” 이에 이를 위해 정서를 기술하고 일을 기록하여 칠언 근체시 3수를 지어 여러 기로 상공들에게 적어 올리며 차운시를 화답해 주기 바라니, 이 또한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부끄러운 짓일 뿐이다. 시로 말한다.

 귀인들의 만남이 이처럼 성대하니 노인을 잘 모신 것은 나라의 은택입니다. 평생의 세상 구제는 사업으로 증명되고 만년의 풍류는 흉금을 탁 트이게 합니다. 동짓날을 앞두고 술 동이를 

가득 채워 아홉 노인이 함께 즐기니 시간이 더디 가네요. 

다만 서쪽 국경에 경보가 울려 한스러우니 화사한 잔치 자리는 임금께 알리지 말라. (2) 公卿 중에 지금까지 몇 분이나 나이가 지긋한가 천수를 다하며 장수한 이 세상에 드물구나. 조정에서는 마침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퇴직한 관리들도 오히려 충심을 다 바치네. 틈을 내어 어울려 노는 것은 술을 좋아해서가 아니니 연회에서 만나 담소한들 어찌 군무를 잊겠는가? 은촛대가 반쯤 타서 먼저 부축 받아 나오니 궁궐 지나며 옥피리 소리를 근심스레 듣네. (3) 원로대신들 종전에는 자주 연회를 열었으니 어진 나라 성군께서 내린 은택이었네. 항상 어주와 선악을 하사하고 따로 내시와 근신들까지 보냈었지. 이번 모임은 마침 다난한 날에 맞으니 몇 분이나 태평한 봄날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흰 머리털, 얼룩진 등, 모습이 고아하니 마땅히 신묘한 경지에 든 솜씨로 그림을 그려야 하리. 천계 원년 신유(1621) 동지 하루 전 11월 8일에 재주 없는 졸렬한 늙은이 청성인 심희수가 삼가 쓰다.

 

 

賜几杖宴兼耆老會圖 1623 

인조(仁祖) 초에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이 국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 받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宴會)에서 만든 시첩(詩貼)을 후대에 책자의 형태로 필사한 사본이다. 2009년 10월 16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충현박물관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623년(인조 원년) 9월 6일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국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이를 기념하는 축하연에 참석한 윤방(尹昉) · 신흠(申欽) 등 22명이 지은 축시와 후에 축시를 보내준 이수관 등 11명의 시를 함께 필사하여 첩(貼)으로 만들었다가 이를 다시 책자의 형태로 필사한 사본이다. 원본 시첩(詩貼) 「사궤장연겸기로회도(賜几杖宴兼耆老會圖)」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623년(인조 원년)에 편찬된 1권 1책의 필사본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48.0㎝, 가로 35.5㎝이고 재료는 장지(壯紙)이며, 선장본(線裝本) 홍사오침(紅絲五針)으로 장정되었다. 표제는 ‘계해사궤장연첩(癸亥賜几杖宴貼)’으로 되어 있고, 내제(內題)는 ‘천계삼년구월초육일 영의정이원익 사궤장기로연시(天啓三年九月 初六日 領議政 李元翼賜几杖耆老宴詩)’로 되어 있다. 

첫 장에는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의 시 서문이 있고, 이어 그의 오언배율(五言排律) 십운시(十韻詩)와 여기에 차운(次韻)한 참석자들의 시 21편과 연회 후에 보내온 시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들은 모두 오리 이원익의 덕행을 칭송하고 궤장을 하사받은 영예를 축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조선시대에는 치사(致仕: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남) 후에도 계속 봉직하는 원로 신하들에게 궤(几)와 지팡이를 내려주는 전통이 있었으나 중기 이후에는 잘 시행하지 않았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후 국왕은 오래 동안 물러나 있던 이원익을 불러 영의정에 임명한 후 그 해 8월에 

궤장을 내렸고, 9월 6일에 기로소(耆老所)에서 연례 기로연(耆老宴)을 겸하여 사궤장 축하연을 열었다. 이 책은 이때의 참석자들과 후에 보내 온 축하시를 편집한 것이다.이 책은 원본 「사궤장연겸기로회도」에서 연회도가 빠진 사본이기는 하나, 궤장연시첩의 전래본이 많지 않고 또 본서도 당시에 편찬된 것으로서 원본을 보완하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사궤장겸기로회지도(賜几杖兼耆老會之圖) 구글 이미지

이 그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원익이 1623년(인조 1)에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연을 베풀었던 일을 기념하여 제작된 화첩에 수록된 것이다. 사궤장제는 품계가 일품에 이르고 70세 이상 된 자가 관직에서 물러나려 할 때, 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계속 관직에 머물게 하려는 제도로서, 노대신에게는 최고의 영예였다. 조선시대에는 사궤장제 시행 시 왕이 교서와 함께 술, 음식, 악공을 하사하고 국가행사로 연회를 베풀어주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원익은 기신으로서 기로연을 베풀었다.

화면 상단에는 '賜几杖兼耆老會之圖'라는 전서체 제목이 쓰여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이원익의 집 뜰에서 열린 기로연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중앙에 설치된 삼산형 차일 아래에는 궤장이 놓여 있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나뉘어 앉은 기신들은 음식을 먹으며 처용무를 관람하고 있다. 이원익은 가운데로 나와 한 기신으로부터 술잔을 받고 있으며, 차일 밖에는 시중 드는 사람들과 악공들이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늘 익녕군(益寧君) '치'의 4세손이며, 함천부수(咸川副守)를 지낸 억재(億載)의 아들이다. 15세에 4학 중 하나인 동학(東學)에 들어가 수학했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정자·저작 겸 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해감사이던 이이(李珥)의 천거로 1575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왔다. 그뒤 교리·수찬·지평·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불화로 승정원이 탄핵을 받자 자신만이 파면을 면할 수 없다고 하여 5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민생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후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 판서,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1593년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한 공으로 숭정대부가 되었으며, 1595년에는 우의정 겸 4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에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로 다녀와 영의정이 되었으며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했다. 1600년에는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돌아보았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인목대비 폐위론이 제기되자 강력하게 반대 상소를 올려 홍천을 거쳐 여주로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반대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왕의 호위를,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로 세자의 호위를 맡았으며, 서울로 와서는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고령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사직하여 낙향한 후에는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했으며, 병제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6번제(六番制)와 대동법을 실시하는 데 공헌했다.

 

 사궤장연첩(賜机杖宴帖)

조선시대(1623년/인조 1년) / 비단에 채색 (絹本彩色) 62.5×48.8cm /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기석설연지도(耆碩設宴之圖). 耆老會의 모습(구글 이미지)

조선 현종 9년(1668) 보물 /소 재 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 (상갈동, 경기도박물관)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 (李景奭 几杖 및 賜几杖 宴會圖 畵帖)구글 이미지 

98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나이가 많은 기로(耆老)를 대우하고 대신들을 공경하는 뜻에서, 나이가 많고 학문이 높으며 덕이 많은 사람에게 궤장을 내려 편안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궤장을 하사할 때에는 반드시 잔치를 해서 삼공(三公)과 육경(六卿), 의정부의 동서반(東西班), 한성판윤, 예조의 참판 및 참의, 낭원(郎員)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하사 때의 관계 교서(敎書)는 예문관에서 작성하고 주서(注書)가 낭독하였다. 

궤장은 공조의 공장(工匠)이 제작하여 승지가 전달하였는데, 궤장을 받은 사람은 그 다음날에 감사하다는 사은문(謝恩文)을 써서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 그림은 바로 그러한 장면이 세 부분으로 그려져 있는데, 지영궤장도(祗迎几杖圖)는 임금이 내리는 궤장을 맞아들이는 장면,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는 임금이 내린 교서를 낭독하는 장면, 내외선온도(內外宣醞圖)는 궁중에서 보낸 악사와 무희들이 연주하고 춤추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세 장면은 모두 근경에 산수를 그리고, 중경에는 연회하는 모습, 그리고 원경은 청록산수로 표현되었다. 인물들의 동작은 질서가 있고 고정되어 있으며, 건물은 계화(界畵)형식으로 그려져 있다.색채는 호화로운 당채(唐彩)를 써서 거의 탈색되지 않았다.

 

권대운 기로연회도 

서울대학교박물관에는 <권대운 기로연회도> 8폭 병풍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삼학사도>와 <사연도>를 병풍과 비교해 보면, 각각 병풍의 제4, 5폭과 크기와 묘사 내용, 표현이 거의 일치 /국립박물관에 두폭의 그려진 병풍그림이 서울대에는 8폭의 그림으로 그려져 보관 중이다.구글 이미지

 


조선시대에는 계모임을 그린 계회도가 발달하였다. 문인 관료사회에서는 함께 과거에 합격한 동기나 같은 근무처 선후배와 계를 꾸려 동료의식을 두텁게 다지는 일이 중요했다. 조선 초기의 계회도는 산수화에 가까웠으며, 모임 장소의 풍광을 산수화로 표현하고 참석자는 작게 그렸다. 그림 아래에는 참석자의 이름과 벼슬을 쓴 좌목을 두어 모임의 성격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권대운 기로연회도> 병풍의 제8폭은 좌목이므로, 이 그림이 계회도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9명의 남성들은 영의정 권대운을 필두로 모두 사모관대에 도홍색 단령을 갖춘 관리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도홍색은 복숭아 빛이라는 의미로, 현대에는 여성적 색채로 인식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성 복식의 색으로도 사랑받았다. 도홍색 단령은 관리들의 일상 근무복이었으며, 흉배를 붙인 어두운 녹색이나 남색 단령은 조례 등 공식 행사에서 입는 정장이었다. 이 연회는 국가의 공적 행사가 아니었기에 참석자들이 도홍색 단령을 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신선에 빗댄 아취 있는 모임 

이들이 모인 권대운의 저택은 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택 지붕 너머 청록산수로 그려

진 산허리의 일부가 남산이라는 배경을 암시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병풍에는 계곡과 기암괴석이 이어지고 학이 노닐고 있어 세속에서 벗어난 별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저택을 감싼 소나무와 대나무는 공간의 격조를 높이고 있었다. 

못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고, 석축 둘레에는 옥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높고 넓은 기와집 대청마루에는 푸른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돗자리가 깔려 있었으며, 연회 자리 뒤에는 수묵으로 그린 산수화 병풍이 둘러쳐져 있었다. 술을 따르는 탁자에는 중국의 고대 청동기와 채색자기가 놓여 있었다. 권대운의 저택이 실제로 이러한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사인물화에 등장하는 고전적인 모티브를 빌려 아름답게 꾸며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옥은 모임을 기념하여 「사로연회병서」라는 글을 남겼다. 글에 따르면 권대운은 당나라 때 백거이가 연 이도회나 북송 때 문언박이 주관하고 사마광이 기록으로 남긴 진솔회와 같은 역사 속 유명한 기로회를 본받아 이 모임을 마련했다.모임의 이름은 ‘종남사로회’, 곧 종남산 네 노인의 모임이라 불렀다. 남산의 별명이 종남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남산은 원래 중국 시안 근교에 있는 산이다. 왕유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노래한 명승이며, 종리권과 여동빈 등 신선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저택의 배경을 환상적으로 묘사한 것은 이 모임을 중국 역대의 기로회에 비기는 회화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시중을 드는 여인들은 중국 당나라 때의 복식을 입고 있다. 갸름한 얼굴에 날카로운 이목구비, 마른 몸매는 명대의 화가 구영(仇英, 1494?~1552)이 전형화한 고전적 미인 그림에 가깝다. 관람자는 이러한 여성 표현을 보며 선녀들이 시중드는 신선이나 당ㆍ송 때 사대부들의 격조 높은 모임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권대운 기로연회도>의 술을 나르는 여인들은 당나라 시대의 고전적인 복식을 입고 있어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탁자 위에 놓인 고동기는 연회의 높은 격조와 아취를 강조하고 있다.(구글 이미지)


남지기로회도 (南池耆老會圖) 1629 구글이미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1호인 개인소장품과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한 그림도 도화서의 다른 화원이 그린 임모본(글씨나 그림 등을 보고 옮겨 쓰거나 그린 그림) 등으로 추정된다. 숭례문이나 남지의 위치와 옛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남지 터가 접한 칠패길은 종로의 ‘시전’, 동대문 ‘배오개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으로 꼽힌 ‘칠패시장’으로 가는 길이다. 남대문, 염천교, 중림동 일대이다. 

여기서 ‘칠패’(七牌)는 지명이 아니라 도성을 수비하는 금위영 소속의 일곱 번째 순찰구역을 맡은 7패 부대가 주둔하던 곳에서 따왔다. 칠패길이라는 지명은 겨우 살아남았다. 도로명주소법 개정 때 부동산 가격 상승을 노린 일부 주민이 ‘세종대로○○길’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남지 터가 있는 봉래동은 일제 잔재 지명이다. 이곳은 원래 한성부 서부 반석방이었고, 연꽃이 피는 연못이 있다고 하여 ‘연지계’라 했다. ‘봉래’라는 지명은 1894년 청일전쟁 직전 청군에게 떼죽음을 당할 뻔했던 일본 거류민이 일본군의 극적인 승리로 위기를 모면하자, 마치 지옥에서 신선이 사는 봉래산으로 올라간 기분이라는 뜻에서 자신들이 살던 마을을 ‘봉래정’이라고 이른 데서 기원한다. 유감스럽게도 광복 후 반석동이나 연지동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지 못했다. 

마포에 부린 전국에서 올라온 어류와 곡물을 팔던 칠패시장의 전통을 이은 ‘중림시장’이 있는 중림동 또한 조선시대 유서 깊은 지명인 ‘약전중동’과 ‘한림동’에서 ‘가운데 중(中)’자와 ‘수풀 림(林)’자를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정체불명의 합성 지명이다. 푯돌과 지명이 떠돌고 있다.

 

629년 숭례문 밖 홍은효의 집 앞 남지(南池)에서 베풀어진 기로연 장면을 그린 '남지기로회도(구글 이미지)

<南池耆老會圖>,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5호, 1629년, 絹本彩色, 115.5×71.2cm, 석당박물관 소장 

 석당박물관 수장의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는 인조조(仁祖朝) 고령관리들의 사적인 계원 12명의 모임을 그린 그림으로, 길이가 115.5cm에 이르니 조선시대 회화로는 대작인 셈이다. 상단에 회화식 전서(篆書)로 제명을 쓰고 그림 아래로 장유(張維, 1587-1638)의 서문(序文), 좌우로는 이경직(李景稷, 1577-1640)의 기문(記文), 아래로는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좌목(座目)으로 구성되어있다. 

구글 이미지




장유의 서문 중 이 모임 전에 미리 화공에게 명하여 이 연회를 그리게 하였다[旣而諸公命工摹以粉繪]는 것이나 이경직의 기문 중 이귀가 그림을 그려 간직하고자 하는 뜻에 모두가 찬동하였다[豈可使玆會泯而無傳也 宜令圖繪之 以續古事 左右曰諾]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12폭을 그려 참석자들이 하나씩 나누어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부친과 부친 친구들의 복록을 자화자찬하는 것을 피하고자 이 모임과 무관한 당대의 대문장가 장유에게 서문을 의뢰하였고,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사실을 그대로 기록케 하는 기문은 기로회의 중심인물인 이유간(李惟侃, 1550-1634)의 아들로 벼슬이 제일 높고 글과 글씨에 뛰어났던 이경직에게 짓게 하였으며, 그의 동생이자 당대 명필이었던 이경석이 글씨를 쓰게 하였다. 

화면 중앙에 차지한 기로회의 풍경은 부모에 대한 효심, 그리고 격식과 풍류를 갖춘 연회였음이 짐작케 한다. 연운(煙雲)에 감싸인 건물 안에는 기로들과 시녀, 배종한 자제들이 연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긴 세월 머금은 버드나무와 만개한 연지(蓮池)를 배치하였다. 기로회원들의 얼굴은 담홍색의 홍조를 띠어 술기운이 완연하고 담소와 웃음을 머금은 듯 생동감 있고도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림은 도화서화원의 솜씨이나 계원이 나눠 가지는 그림 12벌에 모두 글씨를 쓴 이경석의 효심도 가늠된다. 

장유의 서문 끝에는 칠언율시가 있는데, 그의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권31에도 실린 「題耆老諸公南池賞蓮會圖」 의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白鬢紅頰共聯翩 / 十二人成九百年 / 洛社幾拚河朔飮 / 官池自有曲江蓮 /  

香風入座龍涎暖 /淥酒傾筒象鼻偏 / 鶴背飇輪大廖廓 / 不如長作地行仙  

흰 귀 밑 머리 노인들이 빰은 붉은데 행동은 날렵하며 

열 한 분이 구백세를 이루었네.  

洛社 의 河朔飮 을 어찌 셀 수 있으리오.

南池는 저절로 曲江 3)의 연꽃이 되고 

향기로운 바람은 龍涎香 4)인 듯 자리에 가득하고  

코끼리 모양의 술통에 코를 기울여 술을 따르누나. 

학의 등을 탄 신선으로 허공에 혼자 있을 바에는 

오래도록 땅을 딛고 선 地行仙 으로 사는 것이 더 좋으리.

 


 <남지기로회도>가 제작되었던 17세기 초반은 정묘호란 직후 물력의 낭비와 사치풍조를 경계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부모의 장수를 기원하는 기로회는 오히려 활발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남지기로회는 어릴 적부터 교유하던 친분위주의 사적 모임이었다. <남지기로회도>에는 당송고사(唐宋古事)의 고전적 처사상(處事像)으로 추앙되었던 백거이(白居易)나 문언박(文彦博), 사마광(司馬光) 등의 기로회를 본받고 그들이 지향했던 처사적 기상을 추체험(追體驗)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풍류의식은 물론 같은 시기 국가에 봉사한 연대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부모의 강녕(康寧)을 기리고자 했던 자손들의 축수와 염원을 읽을 수 있다. 

 

耆英會圖 1669 사적기로회/보물 구글 이미지


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기영회란 만 70세 이상의 2품 이상 원로 사대부로 구성된 모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모임 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기영회도이다. 계회도(契會圖)라고도 한다. 이 「기영회도」는 16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이 기영회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들인 홍섬(洪暹, 15041585),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정유길(鄭惟吉, 15151588), 원혼(元混, 15051588), 정종영(鄭宗榮, 15131589), 박대립(朴大立, 15121584), 임열(任說, 1512~1584) 등 7명의 조정 원로대신들이 참석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기영회도’라고 제목을 적고, 가운데에는 건물 대청에서 열리는 연회장면을 그렸으며, 맨 아래 부분에는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 자, 호, 본관, 품계와 관직 등을 앉은 순서대로 차례로 적고, 시문과 같은 글도 적어 놓았다. 건물 대청과 위아래가 시원하게 넓혀진 휘장 아래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대청에는 7인이 잔칫상을 받고 있고 가운데 꽃병을 중심으로 악단의 음악에 맞추어 관기들이 춤을 추고 또 다른 관기들은 음식 준비에 열중이다. 건물 주위 마당에는 듬성듬성 하인들이 자유로운 모습으로 잔치를 바라보고 있으며, 화면 아래에는 굳게 닫혀 있는 중문과 담장이 위아래의 공간을 나누고 있다. 

이처럼 건물의 공간에 잔치 장면을 담은 방식은 1550년경에 제작된 「호조낭관계회도(戶曹郎官契會圖)」 이후 16~17세기에 유행한 기영회 및 계회도 형식이다. 「호조낭관계회도」에서는 산수의 배경이 상당히 차지하고 있으나, 이 기영회도에서는 건물 안의 장면을 중점적으로 표현하는 차이를 보인다.이 기영회도는 인물이나 건물의 표현에서 16세기 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록화로서의 의의 못지않게 이 시기 채색인물화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평가할 만하다


사궤장연회도첩 선독교서도 구글 이미지

 

사궤장연회도첩 내외선온도

중종은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서연관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그림에 따르면 대금류의 횡적 한 명, 해금 혹은 비파류의 현악기 한 명, 거문고 혹은 가야금과 비슷한 현악기 한 명의 연주자가 보인다. 악공은 모두 홍포(紅袍)에 대(帶)를 두르고 있는데, 오른쪽 끝에 횡적을 부는 인물과 나머지 네 명의 모자가 다른 점이 특이하다. 

『사궤장연회도첩』은 행사 절차에 따라 궤장을 맞이하는 지영궤장도(祗迎几杖圖), 교서(敎書)를 낭독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 연회를 베푸는 내외선온도(內外宣醞圖)의 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면인 지영궤장도에서 박을 잡은 집박 악사(執拍樂師)는 녹포(綠袍)를 입고 그 뒤를 따르는 악공들은 홍포를 입었다. 악기로는 횡적·종적·당비파· 장구·북·방향 등이 나타난다. 둘째 장면인 선독교서도를 보면, 악대 앞줄에는 집박 악사를 중심으로 방향과 관악기가 좌우 대칭으로 나타나고, 뒷줄에는 장구를 중심으로 당비파·북·대금·거문고가 배치되어 있다. 셋째 장면인 내외선온도에는 가운데에서 여기(女妓)들이 처용무(處容舞)를 공연하고 있고, 오른쪽으로 악대가 위치해 있다. 악기는 둘째 장면에서의 당비파와 대금이 각각 

대금과 장구로 대치되었다. 

영조는 1744년(영조 20) 종친부(宗親府) 건물 내에서 종친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그림에는 녹포를 입고 박을 잡은 집박 악공이 보이고 홍포를 입은 악공 11명과 비파·북·해금·횡적·종적 등의 악기가 표현되어 있다.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조직한 계회는 대부분 연회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계회도의 대표적인 작품은 1612년(광해군 4) 송도부(松都府)에 근무하는 네 명의 관원이 모두 장원 급제한 일을 기념하여 계회를 열고, 이를 그림으로 그린 사장원송도동료계회도(四壯元松都同僚契會圖)이다. 송도의 태평관(泰平館)에서 벌어진 연회에는 계단 위에 악공 다섯 명이 앉아서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로는 장구, 대금, 피리 혹은 퉁소류의 종적, 교방고가 보인다.


<선조조기영회도> 

1585년경에 그린 기영회도이다. 기로소로 보이는 건물 안에 잔치의 주인공들이 각 상을 받은 채 앉아 있고, 중앙에는 여기 두 명이 춤을 추고 있으며, 뜰 아래에서는 악사복을 입은 남자 악동들이 연주하고 있다.

1691년(숙종 17) 숙종이 70세 이상의 노모를 모신 신료에게 쌀과 비단을 내려준 일을 기념하는 연회를 그린 경수연도(慶壽宴圖)에는 첫째 건물과 둘째 건물 밖에 16명으로 구성된 악대가 보인다. 집박 악사는 홍포를 입고, 다른 악공들은 녹포를 입었는데, 뒷줄 왼쪽 끝의 악공도 홍포를 입었다. 집박 악사 옆에는 편경이 있으며, 그 밖에 북·장구·해금·당비파·관악기·거문고 등의 연주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1724년(경종 4) 5월 2일 여섯 명의 기로 신료가 베푼 모임을 그린 『갑진기사연회첩(甲辰耆社宴會帖)』에는 덧마루가 깔린 뜰에서 처용무와 포구락(抛毬樂)이 공연되고 있다. 두 곳으로 나누어 앉은 여기들이 보이고, 오른쪽 하단에 앉은 여기 두 명이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집박 악사는 여기들을 향해 서 있다. 평상복 차림의 연주자는 모두 아홉 명으로 북이 왼쪽 끝에 있 고, 대금 2, 피리 혹은 퉁소류의 종적 1, 당비파 1, 해금 2, 장구 2 등의 악기가 보인다. 

 

기사경회첩 (耆社慶會帖) 

1744년(영조 20)에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契帖)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은 1744년 9월에 영조가 51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기로소에서 주관하여 제작한 계첩이다. 조선시대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관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국가 원로 우대 기관이었다. 왕은 60세 이상이 되면 태조의 고사를 따라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숙종 · 영조 · 고종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기사경회첩』의 기본 체제는 1719년(숙종 45)에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제작된 『기사계첩(耆社契帖)』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계첩은 영조의 어첩 자서, 기로소에 들어간 날 영조가 쓴 어제(御製) 어필, 어제에 차운한 기로신의 시, 경희궁 경현당에서 선온할 때 영조가 지은 어제, 어제에 화답한 기로신의 연구(聯句), 좌목(座目), 행사도 5장면, 기로신들의 초상화, 각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의 명단, 이성룡(李聖龍)의 발문, 계첩 제작에 참여한 실무자 명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사도 5점은 9월 9일 영조가 몸소 기로소에 행차하여 어첩에 글씨를 쓰는 장면을 그린 「영수각 친림도(靈壽閣親臨圖)」, 이튿날인 10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숭정전 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같은날 저녁 경현당에서 기로신들에게 선온한 장면을 그린 「경현당 선온도(景賢堂宣醞圖)」, 그리고 10월 7일 숭정전에서 치러진 진연을 마치고 영조가 내린 음식과 음악을 앞세우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기로신들의 행렬을 그린 「사악선 귀사도(賜樂饍歸社圖)」, 기로소에 도착한 기로신들이 벌인 연회를 그린 「본소 사연도(本所賜宴圖)」 등이다. 초상화는 기로신들의 반신상으로 이의현(李宜顯, 76세), 지중추부사 신사철(申思喆, 74세), 행부사직 윤양래(尹陽來, 72세), 김유경(金有慶, 76세), 이진기(李震箕, 92세), 정수기(鄭壽期, 81세), 이하원(李夏源, 81세), 이성룡(73세), 조원명(趙遠命, 70세), 조석명(趙錫命, 71세) 등 10명의 초상이 관직순으로 장첩되어 있다. 

대부분의 궁중 기록화에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기사경회첩』

의 맨 마지막 장에는 계첩 제작을 감독한 관리[監造官] 고정삼(高挺參), 글씨를 쓴 서사관(書寫官) 장수대(張壽大), 그림을 그린 장득만(張得萬), 장경주(張敬周), 정홍래(鄭弘來), 조창희(趙昌禧) 등 화원 4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고정삼과 장득만은 숙종 대의 『기사계첩』에도 같은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정홍래를 제외한 3명은 모두 어진도사(御眞圖寫)의 경력을 가진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다. 

『기사경회첩』은 기로소와 관련된 궁중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제작 일시가 뚜렷하고 제작 실무자 명단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18세기 전반 궁중 기록화 및 초상화의 기준작이 될 만한 작품이다.

 

본소사연도(本所賜宴圖) 

영조가 기로소 부속 건물인 기영관(耆英館) 대청에서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선온(宣醞)하는 광경이 그려진 그림. 액자 형태. 견본채색(絹本彩色). 화폭(세로 43.5, 가로 67). 중앙에 무동, 악대 등이 그려짐. 좌측 상단에 '本所賜宴圖'이 쓰여 있음.

1744년 영조의 기로소(耆老所) 입사를 기념하여 친히 연회를 베풀고 그것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들로 만들어진 '기사경회첩' 중 한 그림과 동일. 

1744년(영조 20)에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契帖)구글 이미지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은 1744년 9월에 영조가 51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기로소에서 주관하여 제작한 계첩이다. 조선시대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관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국가 원로 우대 기관이었다. 왕은 60세 이상이 되면 태조의 고사를 따라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숙종 · 영조 · 고종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기사경회첩』의 기본 체제는 1719년(숙종 45)에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제작된 『기사계첩(耆社契帖)』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계첩은 영조의 어첩 자서, 기로소에 들어간 날 영조가 쓴 어제(御製) 어필, 어제에 차운한 기로신의 시, 경희궁 경현당에서 선온할 때 영조가 지은 어제, 어제에 화답한 기로신의 연구(聯句), 좌목(座目), 행사도 5장면, 기로신들의 초상화, 각 행사에 참여한 기로신의 명단, 이성룡(李聖龍)의 발문, 계첩 제작에 참여한 실무자 명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사도 5점은 9월 9일 영조가 몸소 기로소에 행차하여 어첩에 글씨를 쓰는 장면을 그린 「영수각 친림도(靈壽閣親臨圖)」, 이튿날인 10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숭정전 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같은날 저녁 경현당에서 기로신들에게 선온한 장면을 그린 「경현당 선온도(景賢堂宣醞圖)」, 그리고 10월 7일 숭정전에서 치러진 진연을 마치고 영조가 내린 음식과 음악을 앞세우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기로신들의 행렬을 그린 「사악선 귀사도(賜樂饍歸社圖)」, 기로소에 도착한 기로신들이 벌인 연회를 그린 「본소 사연도(本所賜宴圖)」 등이다. 초상화는 기로신들의 반신상으로 이의현(李宜顯, 76세), 지중추부사 신사철(申思喆, 74세), 행부사직 윤양래(尹陽來, 72세), 김유경(金有慶, 76세), 이진기(李震箕, 92세), 정수기(鄭壽期, 81세), 이하원(李夏源, 81세), 이성룡(73세), 조원명(趙遠命, 70세), 조석명(趙錫命, 71세) 등 10명의 초상이 관직순으로 장첩되어 있다.

대부분의 궁중 기록화에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기사경회첩』의 맨 마지막 장에는 계첩 제작을 감독한 관리[監造官] 고정삼(高挺參), 글씨를 쓴 서사관(書寫官) 장수대(張壽大), 그림을 그린 장득만(張得萬), 장경주(張敬周), 정홍래(鄭弘來), 조창희(趙昌禧) 등 화원 4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고정삼과 장득만은 숙종 대의 『기사계첩』에도 같은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정홍래를 제외한 3명은 모두 어진도사(御眞圖寫)의 경력을 가진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다. 

『기사경회첩』은 기로소와 관련된 궁중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제작 일시가 뚜렷하고 제작 실무자 명단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18세기 전반 궁중 기록화 및 초상화의 기준작이 될 만한 작품이다. 

<종친부 사연도, 1744, 서울대학교 박물관> 구글 이미지


종친부 사연도(宗親府 賜宴圖)는 1744년(영조 20년)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입사를 기념한 진연을 마치고, 종친들에게 특별히 술과 음식을 내려준 사연(賜宴)장면을 그린 그림 

종친부 사연도(宗親府 賜宴圖)는 종친부의 옛 건물을 복원할 때 참고된 자료지만, 그림 속의 종친부 건물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그림은 종친부 건물 앞에서 큰 장막을 치고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무대 한가운데에서 궁중 무희들이 춤추고 있으며, 아래쪽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궁중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잔치에 초대된 종친(宗親)은 오른쪽에 10명, 왼쪽에 28명이 두 줄로 앉아 있어 총 38명임을 알 수 있다. 

그림에는 음식상이 보이는데, 음식만 올려놓은 상이 있는가 하면 음식과 함께 높게 꽃 장식을 한 상(床)도 있다. 이는 종친(宗親)들의 지위에 따라 대우가 달랐기 때문이다. 몇몇 상 앞에서는 궁녀들이 공손히 무릎을 꿇고 음식을 권하고 있다. 장막 안에는 큰 촛대 6개가 켜져 있고, 마당에는 큰 횃불이 보인다. 이를 통해 잔치가 밤중에 열린 것을 짐작할 수 있다.그림은 3단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위쪽에는 제목, 중간에는 그림, 맨 아래쪽에는 잔치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는 여러 사람이 참가하는 행사를 그린 옛 그림의 일반적인 형식이다. 제목과 그림 사이에 있는 글은 영조(英祖) 임금이 잔치에 덧붙여 한 말을 기록한 것으로, 현대어로 풀이하면 "오늘 내 상에 오른 음식과 남은 음식을 특별히 종친부(宗親府)에 내릴 것이니 모두 모여 즐기도록 하여라."라는 의미이다. 

그림 속 음식은 모두 궁중에서 만들어서 보낸 것인데, 더 자세하게 그려졌다면 궁중 음식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후에 종친부(宗親府)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이 그림을 참고한 이유는 전각의 위치와 대문, 담장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이처럼 궁중과 관련된 행사를 그린 그림은 '궁중 행사도(宮中行事圖)'라고 하며, 국가와 왕실의 경축할 만한 행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기록화이다. 이 그림은 궁중 생활을 사실적으로 전한다는 점에서 서민들의 생활을 그린 풍속화(風俗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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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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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min2026-06-18 07:30:2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네요. 2-3회로 나누어 올리시면 더 좋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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