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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담론
  • 김병철
  • 등록 2026-07-22 11:50:02
  • 수정 2026-07-22 12:16:00
  • -캉귈렘의 정상성과 병리학을 중심으로



 

캉귈렘은 ‘정상성(normalité)’개념이 우선적으로 근·현대 생명과학 과 의학이 객관적으로 산출한 평균(moyenne)으로 정의되지만, 실제 로는 주관적으로 결정되는 규범(norme)이란 사실을 밝혔다. 그에 따 르면 ‘비정상(anomalie)’개념은 정상성(평균)과의 차이를 지시하는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반하여, ‘병리 (pathologique)’개념은 지향되어야 할 이상적 가치, 즉 건강한 생리적 상태(정상성, 평균)를 전제하는 규범적 개념이다. 

비정 상적인 것은 단지 다른 것일 뿐이지만, 병리적인 것은 좋지 않은 상태라는 가치 판단과 더불어서 이 상태를 교정하고 회피해야 한다 는 당위성도 포함하는 개념이란 것이다.이 좋지 않고 벗어나야 할 상태를 총칭하는 ‘질병(maladie)’개념은 불편과 고통을 야기하고 궁 극적으로 죽음을 초래하며, 이에 반해서 ‘건강(santé)’개념은 의학이 늘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이지만 ‘질병’개념과는 다르게 명확히 규정하기가 어렵고 단지 질병이 없는 상태라는 부재 증명을 통해서 만 정의가 가능한 이론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비정상’은 흔히 가치 판단이 개입된 규범적 의미로 이해되고, ‘병리’는 가치중립적인 기술적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는 것이다.그에 따르면 ‘비정상’과 ‘병리’의 어원적 구분은 의철학적 반성의 초기에 이론적 차원에서만 가능하고, 실재하는 현실의 생명과학과 의학에서는 완전 히 가치중립적이고 기술적인 개념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체와 인간의 ‘정상성’개념을 네 개의 기본 특징, 즉 ‘관계성(relativité)’, ‘적응성(adaptabilité)’,‘규범성(normativité)’,‘주관성(subjectivité)’으로 규정물론 생명 체가 물질로부터 발현되고 항상 물질에 근거해 있으므로, 생명체에 도 실체주의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할 특징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 을 캉귈렘은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그는 우리가 다른 존재와 분명 히 구별되는 생명(vie)의 특수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특수성은 생명 자체의 물질성(matérialité)을 토대로 수립된 것이기 때문에, 물질과학(science de la matière)의 도움 없이는 생명 자체를 온전히 이 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생명의 물질성이 생명 체를 비생명체와 구별해 주는 결정적인 차이, 즉 생명의 본질은 아 니라는 점을 강조했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캉귈렘은 자주 18세기 프랑스 생기론(vitalisme)의 계승자로 평가되기도 한다.생명계(biosphère)의 모든 존재자 는 관계를 통해서만 제대로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생명체의 정상성은 환경에 대한 관계성(qualitéde la relation)이며, 이 정상성은 생명체로 하여금 그 후손들의 개체적 변이를 통해서 새로운 환경에 대해 새로운 유형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생명체의 정상성 은 한 생명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체를 넘어서 주어진 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보편적 생명이 죽음과 맺고 있는 관계를 표현 한다. 

캉귈렘에 따르면 비샤는 보편적인 생명 일반을 생명체의 각 부분, 즉 장기(organe), 조직(tissu), 세포(cellule) 등 생명 체의 모든 구성요소로 분산시켜서 생명이 생명체의 특정한 부분에 귀속되어 있다는 통념을 결정적으로 타파했다.클로드 베르나르는 비샤가 정립한 생명의 편재성(omniprésencede la vie)이란 이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의 본질이 생명체의 특정한 부분의 물리화학 적 성질을 분석해서는 결코 완전히 규명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 는 생명의 원리가 생명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유기적인 조화, 즉 장기, 조직, 세포 등이 동일한 층위에서 수평적으로 맺는 관계나 상 위 또는 하위 층위와 맺는 수직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올바로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생명체 안의 이러한 관계성을 ‘내부환경’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클로드 베르나르는 ‘내부환경’이란 전체론적(holiste)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실험의학(médecineexpérimentale)’이념이 독단적으로 강화할 수도 있었던 물리화학적 환원주의를 견제했다.의미에서 생명체의 관계성은 생명체의 정상성 을 정의하는 일차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다윈이 자신의 ‘적응’개념을 정의하고 설명하면서 능력의 차원보다는 결과의 차원에 더 주목했고 또한 이러한 차원을 더 강조 했다는 점을 캉귈렘보다 먼저 분명하게 지적한 인물은 베르그손이 다. 특히 베르그손이 창조적 진화(L’Évolutioncréatrice, 1907)에서 다양한 진화론의 ‘적응’개념에 대해 수행한 엄밀한 분석과 비판 은 캉귈렘이 생명체의 ‘정상성’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 결정적 인 영향을 주었다. 

능력으로서의 ‘적응’개념: 베르그손이 강조한 ‘적응’개념의 의 미로서, 생명체가 생명 일반의 요구를 외부환경과 내부환경의 제한 과 절충하여 특정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지칭한다.최대한 간단하게 정의하면 “건강은 특정한 환경의 배반을 감내할 수 있는 여지”이고, “반대로 질병의 본질은 특정한 환경의 배반을 감내할 수 있는 여지의 저하”이다.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건강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고, 아픈 사람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다.그는 잠정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다고 인정될 수 있다.  

캉귈렘 에 따르면 환자가 아픈 이유는 단지 특정한 환경에 부합하는 특정한 규범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이때 환자는 규범의 부재로 인해서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규범적일 수 없기 때문에 병리적인 것이다.요컨대 병리적이란 개념은 결과론적으로 적응을 하지 못 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약화되었다는 의미 도 함축한다는 것이다.질병은 '규범의 부재'가 아니다일반적으로 의학에서는 질병을 정상적인 상태(규범)에서 벗어나 아무런 규칙이 없는 '무질서나 부재'의 상태로 봅간주한다. 하지만 캉길렘은 환자 역시 자신만의 고유한 규칙(규범)을 가지고 살아가는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단지 그 규칙이 현재의 외부 환경과 마찰을 빚고 있을 뿐이다. 

아 픈 사람은 특정한 존재 조건에만 딱 맞추어 규범화된 사람이고, 규 범화할 수 있는 능력, 즉 다른 조건에서 다른 규범을 수립할 수 있 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인 것이다.인간이 건강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 건강하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상응하는 새로운 규범을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이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는, 즉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인간의 생물학적 규범이 다른 종의 규범과는 다르게 순전히 생물학적 차원에서만 규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베르그손 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1932)에서 인간종과 다른 종의 적응력을 비교하면서 인간종이 멸종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창의적으로 적응력을 발휘했기 때문 이라고 주장했다. 

캉귈렘은 베르그손의 이러한 견해를 강화하여 인 간종의 생물학적 정상성이 사회적 규범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좌우된 다는 사실을 밝혔다. 캉길렘의 사상과 연결하면, 인간에게 질병이나 병리적인 상태는 단순히 육체적인 기능 저하만을 뜻하지 않는다.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삶의 규칙(규범)을 창조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약화된 상태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인간의 건강은 '기술적 환경' 속에서 정의된다 동물의 정상성은 순수한 자연환경 속에서 결정되지만, 인간의 정상성은 자신이 구축한 치밀한 기술적·사회적 환경 안에서 결정된다.현대인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도구)를 다루지 못하거나 사회적 인프라에서 소외된다면, 신체는 멀쩡하더라도 삶의 규범을 상실한 병리적 상태(적응 능력의 약화)에 놓일 수 있 다.즉, 인간에게 온전한 '건강'이란 생물학적 육체를 넘어 자신이 만든 기술 문명과 도구를 자유롭게 다루며 환경을 지배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캉귈렘은 인간종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자연선택을 받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르그손이 이미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인간종은 환경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종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새로운 환경 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강화되고 전문화된 종이다.인간은 순수한 '자연' 속에서 살지 않고, 자신이 만든 '기술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제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생물학적 DNA의 우수함뿐만 아니라, 사회적 협동 능력과 기술적 창의성이며 캉길렘과 베르그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생명이 지닌 본질적인 위대함과 자유를 간파했다. 

인간종은 다른 종과 다르게 생물학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인간 개체 의 보존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규범을 수립하기도 하고, 반대로 특정 한 사회적 규범에 의해서 생물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인간 개체를 도 태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정상성은 단순히 생물학 적 적응성만으로는 완전하게 규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정상 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통념과 관습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현상들은 인간에게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가는 과학적 수치나 생물학적 적응도만으로 결코 결론 내릴 수 없음을 증명한다. 인간의 몸과 삶은 언제나 그 시대의 사회적 통념, 관습, 가치관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건강과 의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한 깊은 고찰이 병행되어야 한다. 

캉귈렘의 의철학적 반성을 수용한다면 이제 그 자체로 정상적이 거나 병리적인 사실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비정상이나 변이는 그 자체로 병리적이지 않으며, 단지 생명의 가능한 여러 규 범 중의 하나라고 간주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특정한 규범이 생명의 안정성, 생식력, 변이성에 있어서 과거의 다른 규범들 에 비해서 열등하다면, 이러한 경우에만 이 특정한 규범은 병리적이 라고 규정될 수 있다.전통 의학이나 통계적 의학에서는 평균에서 벗어난 '변이(Variation)'나 '비정상'을 그 자체로 치료해야 할 질병이나 결함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캉길렘은 변이를 생명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시도하는 '수많은 가능성(규범) 중 하나'로 파악한다. 다르게 생긴 것, 다르게 기능하는 것 그 자체는 병이 아니라 생명의 다양성일 이다. 

결국 캉길렘은 "의학적 사실이 정상과 병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가 삶을 이어 나가는 '가치 평가'가 정상과 병리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어떤 상태가 병리적인가 아닌가는 의사의 진단 장비가 아니라, 그 상태를 살아가는 환자 개인이 환경 속에서 느끼는 한계와 위축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문제는 정상적인 것이란 개념이 과학의 이름으로 가치중 립적인 사실을 단순히 지칭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정상적 인 것으로 표방되는 특정한 이상과 목표, 즉 특정한 가치를 전파하 거나 심지어는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상적인 것은 가치중립적인 사실을 통해서 특정한 가치를 주장하는 위선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는 ‘정상적’이란 개 념과 ‘규범적’이란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불분명하며, 일상 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전문적인 과학용어에서조차도 정상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은 자주 혼동되거나 혼용되어 사용된다. 

 정상적인 것이란 개념은 모두가 비정상적인 언행을 했을 때 이를 정당화하 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고, 반대로 특정한 개체의 개체성을 부정하고 보편적 가치로의 회귀를 강요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 다. 예를 들어서 고지방 음식이 흔해진 현대 사회에서 비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하며 대중의 다수가 비만이란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의 비만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반대로 비만인 특정인을 정상 성으로 포장된 건강의 관점에서 비난하고 다이어트를 강요하기도 한다. 

 캉귈렘의 제자인 푸코도 의학 분야의 이러한 특수성에 공감했다. 푸코는 의학이 사실의 차원에서 치료법과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과 학적 지식의 집대성에 만족하지 않고, 당위의 차원으로 전개하여 ‘건강한 사람(homme en santé)’을 이상적인 목표로 수립하고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건강한 사람’이란 개념은 사실의 차원에서 규 정될 수 있는 단순히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homme non malade)’을 의미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생물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모범적인 사람(homme modèle)’의 의미까지 포괄하고 있다. 

의학은 '사실'을 넘어 '당위'를 가르친다. 일반적인 과학은 "사실이 어떠한가(Is)"만을 규명한다. 하지만 의학은 독특하게도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Ought to be)"라는 당위와 가치의 영역으로 침범한다. 의학은 단순히 질병을 고치는 기술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인 '건강한 사람'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사회 전체에 강요한다는 것이 푸코의 지적이다.의학이 정의하는 '건강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검사 수치가 정상이고 육체적 통증이 없는 사실의 영역을 의미한다면, 건강한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생산성을 갖추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통제에 잘 따르는 당위의 영역을 의미한다. 즉, 의학은 생물학적 정상성을 빌미로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된다.결국 의학이 말하는 '건강'이란 생물학적 활력을 넘어, 사회의 관습과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모범적인 인간(Homme modèle)'을 의미하게 된다. 과거에는 단순히 게으르거나 반항적인 성격으로 여겨졌던 행동들이 현대에 와서 '질병이나 장애'로 분류되어 치료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의학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어,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치료'라는 이름으로 교정하고 통제한다. 

예를 들어서 한 흡연자가 사실의 차원에서 당장 어떠한 질환도 앓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당위의 차원에서 흡연은 생물학적으로 자신에게 위 험한 습관이고 사회적으로도 간접흡연의 폐해를 초래하는 모범적이 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사회적 규범과 법규를 통해서 금지되는 것이다.사실 캉귈렘도 “건강은 장기들의 침묵(silence) 속에 있는 생 명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눈에 띄지 않는(discrétion)생 명이기도 하다. 

현재 어떤 흡연자의 폐가 깨끗하고 아무런 통증이 없다면, 그는 생물학적으로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를 '건강한 사람' 혹은 '모범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미래의 발병 위험이라는 생물학적 위험과 간접흡연이라는 타인에 대한 피해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는 금연 구역 지정이나 담배세 인상 같은 법률과 제도를 동원하여 그의 행동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교정하려 한다. 이는 의학적 판단이 법과 제도의 힘을 빌려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캉길렘의 말은 건강의 다면성을 잘 표현한다. 그는 "건강은 장기들의 침묵 속에 있는 생명이다"라고 말하며 생물학적 건강을 정의했다. 이는 내 몸의 장기들이 아무런 통증이나 잡음을 내지 않고 조용히 제 기능을 하여 육체적 고통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동시에 그는 건강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눈에 띄지 않는 생명이기도 하다"라고 표현하며 사회적 건강을 짚었다. 프랑스어 'discrétion'은 신중함이나 남의 눈에 띄지 않음, 또는 사회를 방해하지 않음을 뜻한다. 즉, 개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사회의 관습과 규범 속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생명계가 가능한 형상들을 위계화하는 시도라면 선험적으로 성공한 형상과 실패한 형상을 구분하는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실패한 형상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또한 수많은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실패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전쟁과 정치에서 최종적인 승리란 없고 불안정한 상대적 우위와 균형만이 있는 것처럼, 생명계에서도 다른 시도들을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그 시도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떨어뜨리는 그러한 성공이란 없다. 모든 성공은 위태롭다. 왜냐하면 개체는 물론이거니와 종도 사멸하기 때문이다. 성공이란 연기된 실패이거나 성공이 유산으로 물려줄 실패일 뿐이다. 결국 생명체의 모든 형태는 ‘정상화된 기형monstresnormalisés)’이다. 

전통적인 생물학이나 기계론적 관점은 완벽하게 성공한 '정상적 형태'를 먼저 상정하고 여기서 벗어난 것들을 '실패작(기형, 질병)'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캉길렘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생명계에는 미리 정해진 성공의 도안이나 선험적 기준이 없다. 삶의 방식은 수없이 다양하므로 어떤 생명 형태든 그 자체로 환경과 마찰하며 살아가는 고유한 시도일 뿐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실패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계에는 상대적 우위만 존재한다. 어떤 종이 현재 번성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시도들을 압도하여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재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성공은 연기된 실패에 불과하다. 개체든 종이든 결국은 사멸과 멸종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성공은 영원한 승리가 아니라 단지 실패가 뒤로 미뤄진 상태이거나 다음 세대에 물려줄 또 다른 한계를 내포한 위태로운 상태이다. 

 정상화된 기형(Monstres normalisés)의 역설문단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어는 '정상화된 기형'이다. 기형은 본래 기존의 규칙과 규범을 깨부수고 나타난 이질적인 변이를 뜻한다. 모든 생명체는 과거의 기준에서 보면 일종의 기형이나 돌연변이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형적 형태가 우연히 현재의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고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사회는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즉, 인류가 지금 정상적이고 건강하다고 믿는 신체 구조나 생명 형태는 사실 과거의 수많은 기형적 시도들 중 현재 일시적으로 살아남아 정상화된 기형에 불과하다.캉길렘에 따르면 해부학적 기형을 판별하는 기준처럼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애매하다는 사실, 그리고 비정상을 차별적으로 대우한다는 현실이 가장 극명하게 확인되는 분야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이다. 

 해부학이나 일반 의학에서는 눈에 보이는 종양, 뼈의 골절, 세포의 변형 등 최소한의 물리적 증거라는 사실의 차원이 존재한다. 하지만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다르다. 마음의 병이나 행동의 이탈은 칼로 자르듯 경계를 나눌 수 없다. 예컨대 '정상적인 슬픔'과 '병리적인 우울증'의 경계, '독창적인 천재성'과 '정신분열적 망상'의 경계는 생물학적 수치로 완벽히 판별할 수 없으며 언제나 극도로 애매하고 모호하다. 

 기준은 가장 애매하지만 그 기준을 적용하여 내리는 낙인과 차별은 그 어떤 분야보다 강력하고 현실적이다. 정신의학에서 '비정상(정신질환자)'으로 분류되는 순간 개인이 가진 사회적 자격과 권리는 심각하게 제한된다. 수용소나 병원에 강제로 격리되거나,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고, 경제 활동에서 배제되는 등 '차별적 대우'가 가장 정당하고 합법적인 형태로 자행되는 곳이 바로 정신의학의 영역이다. 

 이 분야들이 앞서 푸코가 지적한 '모범적인 인간(Homme modèle)'을 찍어내는 전형적인 당위의 기구이기 때문이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넘어 사회가 원하는 '말 잘 듣고 생산성 있는 시민의 표준'을 제시한다. 이 표준(사회적 통념과 관습)에서 벗어나는 내면이나 행동을 보이면 그것을 생명의 다양한 시도로 보지 않고 '치료와 교정의 대상'으로 삼아 통제한다. 캉길렘이 말한 '정상화된 기형'의 유연함을 인정하지 않고 강제로 인간을 정상화(Normalisation)하려는 폭력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무대인 것이다.

심리학과 정신의학에서 정상과 광기(folie)의 구분은 다른 분야의 그 어 떠한 구분보다도 애매하며, 이 때문에 광기와 천재성(génie)을 근본 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기준도 사실상 없다고 한다. 생명체의 생 물학적 적응성이 작용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은 다양 한 규범을 수립하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를 향유하는 데, 이 자유는 종종 천재적인 결과를 도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광기 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캉길렘이 생명체의 본질을 새로운 환경에 맞춰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능력인 '규범성'으로 보았듯, 인간의 정신 역시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의 규칙을 수립하고 수정하는 '자유'를 본질로 한다. 천재성은 이 자유를 통해 기존 사회가 생각하지 못한 위대한 예술, 철학, 과학적 규범을 창조해 낸 결과이다. 반면 광기는 똑같은 자유를 발휘했으나 그 결과물이 현재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과 너무 동떨어져 소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 결과이다. 즉, 천재와 광인은 모두 기존의 평범한 정상성이라는 평균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정신적 규범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캉길렘은 광기와 천재성을 근본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객관적·과학적 기준이 사실상 없다고 선언한다. 어떤 정신적 변이가 '천재성'으로 찬양받을지, 아니면 '광기'로 낙인찍혀 격리될지는 생물학적 뇌의 수치가 결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그 시대의 사회적 규범과 통념이 그 독창성을 수용하고 승인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문화적 권력의 문제이다. 당대에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다가 사후에 천재로 추앙받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현대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정상과 광기의 애매한 경계를 칼로 자르듯 나누고 광기를 치료하려는 행위는 심각한 모순을 낳는다. 광기를 지워버리기 위해 인간의 정신을 획일화된 표준 속에 가두는 순간, 인간 정신의 가장 고유한 특성이자 천재성의 원천인 '다양한 규범을 수립할 수 있는 자유' 자체가 억압되기 때문이다.특히 기형은 생명의 우연성이 발현된 결과라기보다는 생명체의 권리가 구현된 결과이다. 생명은 결코 자신의 구조 설계나 존재 원리를 스스로 거스르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생명계에서 우연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근본 원리를 준수한다. 캉길렘은 기형이 형태학적 비정상(anomalie morphologique) 또는 단순히 해부학적 차이(différence anatomique)로 규정되어야 하듯이, 질병도 생리학적 비정상(anomalie physiologique)으로 정의되어야 하며 질병의 긍정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전통 의학은 질병을 정상적인 생리 상태가 망가지거나 파괴된 ‘오류’로 본다. 하지만 캉길렘은 질병을 ‘생리학적 비정상’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어 아노말리(Anomalie)는 라틴어의 ‘규칙 없음(An-normal)’이 아니라, 그리스어의 ‘다름, 고르지 않음(An-omalos)’에서 유래했다. 즉, 질병은 규칙이 파괴된 무질서 상태가 아니다. 정상 상태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또 다른 생리적 규칙’을 가진 상태일 뿐이다.  

질병의 긍정적 가치를 인정하라는 것은 아픈 상태를 찬양하라는 뜻이 아니다. 환자의 신체가 질병이라는 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능동적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의미이다. 예컨대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열이 나는 것은 신체가 망가진 증거라는 부정적 사실이 아니다. 바이러스와 싸워 이기기 위해 신체가 스스로 온도를 높이는 생명체의 능동적인 방어 수단이자 새로운 규범이라는 긍정적 가치이다. 즉, 질병은 생명이 환경의 위협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이러한  주장은 의사 중심의 현대 의학에 거대한 경종을 울린다. 의사가 진단 장비의 수치만 보고 환자를 비정상이자 병자로 규정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중요한 것은 그 생리학적 다름이라는 비정상 속에서도 환자가 자신만의 규칙을 세워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가이다. 캉길렘에게 의학이란 기계적으로 정상 수치를 회복시키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가 새로운 생리적 규칙을 통해 다시 건강이라는 유연한 적응력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철학적 실천이 된다. 

질병은 생명체의 긍정적인 혁신의 경험이며, 더 이상 감소하거나 배가 되는 어떠한 사실이 아니다. 병리적 상태의 세부 내용은 양적인 차이를 제외하고는 결코 건강한 상태의 세부 내용으로 환원될 수 없다. 질병은 건강의 양적인 차원의 변화가 아니다. 질병은 생명의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인 것이다. 

프랑스의 의학자 브루세(Broussais)와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질병이란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 단순히 과도해지거나 부족해진 양적인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혈압이 너무 높거나 인슐린이 너무 적은 것처럼 수치의 변동이 곧 병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오늘날 현대 의학의 기초이기도 하다. 하지만 캉길렘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병리적 상태는 단순히 숫자가 늘어나거나 줄어든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 

 캉길렘에게 질병은 정상 상태의 연장선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가 변화된 환경이나 위기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구축한 완전히 새롭고 이질적인 체계이자 질서이다. 예를 들어 당뇨병 환자의 신체는 단순히 포도당 수치가 높은 정상인이 아니다. 높은 혈당 수치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몸의 대사 과정과 장기들이 새로운 균형을 이루며 작동하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생명 현상이다. 즉, 질병에 걸린 신체는 그 자체로 고유한 규칙과 논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하나의 독립된 우주와 같다. 

 질병을 생명의 '긍정적인 혁신의 경험'이라고 부른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다. 생명체는 고정된 기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환경과 투쟁하는 존재이다. 질병은 생명체가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했을 때 생존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생리적 구조를 완전히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대항하는 적응의 혁신이다. 즉, 질병은 생명이 지닌 강력한 창조성과 회복 탄력성이 발휘된 결과물이다.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제 모든 생명체의 기본적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 병리이다. 

 이제는 병리를 정상이 방해되거나 정상을 벗어난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병리를 기준으로 정상이 병리의 약화된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 달리 말해서 특정한 종에서 출현한 기형의 일부가 존속될 수 있고 이 기형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서 이 종의 존속에 기여할 수 있듯이, 질병도 생명체를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만들지만 이렇게 변화된 비정상적 상태가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이 생명체의 생존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보통 우리는 ‘정상’이 먼저 존재하고 ‘병리’가 그것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캉길렘은 오히려 ‘병리(기형·질병)’가 먼저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고, ‘정상’은 그 병리가 안정화되거나 약화된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관점은 정상이 먼저 존재하고 질병이 그것을 방해한다고 보았으나, 캉길렘은 병리적 시도가 먼저 일어나고 그것이 안정화되어 정상으로 정착한다고 본다. 생명의 역사에서 진화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언제나 기존의 틀을 깨는 비정상인 기형과 질병이다. 따라서 정상 상태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순수한 원본이 아니라, 과거에 발생했던 격렬한 병리적 투쟁과 변화가 일시적으로 진정되고 약화되어 자리를 잡은 상태일 뿐이다. 

 당장 눈앞에 닥친 기형과 질병은 생명체에게 고통과 위기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중장기적인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 비정상적 상태는 생명체가 이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생존의 가능성’을 여는 혁신적인 계기가 된다. 예컨대 인류의 조상 중 일부가 털이 빠지고 직립보행을 하게 된 것은 당대의 기준인 유인원에서 보면 명백한 해부학적 기형이자 생리적 질병인 취약함이었다. 하지만 이 변화된 비정상적 상태가 결과적으로 도구 사용과 지성 발달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인류의 존속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생명체의 모든 형태는 ‘정상화된 기형’이다"라는 선언의 구체적 작동 원리는 질병과 기형이 생존을 위한 창조적 시도임을 보여주며, 이는 분석 중인 텍스트의 사상적 루프를 완성한다. 푸코의 생체권력, 캉길렘의 생명 규범성, 기계론적 의학 비판을 거쳐 정상이 병리의 약화된 상태라는 최종적 전회까지의 철학적 논거가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지금껏 다듬은 평서문 조각들을 바탕으로 학술적 완성도를 높이거나 전체 글을 종합하는 최종 텍스트 작성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생명체의 정상성은 규범적이므로 보편적이고 영원불변하는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규범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체에서만 발견되며, 이러한 규범조차도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환경에서만 발견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고 일회적인 규범은 다양하고 복잡한 과거를 축적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규범은 역사적일 수밖에 없으며, 규범성을 특징으로 하는 생명체의 정상성은 오직 역사를 통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규범은 특정한 개체가 체험하는 주관적 경험이다. 생명체의 규범은 특정한 시점, 특정한 환경, 특정한 개체라는 조건에 더해서 이 개체의 주관적 체험이라는 조건이 추가되어야만 실재한다고 인정될 수 있다. 이처럼 생명체의 정상성은 규범적일 뿐만 아니라 주관적이며, 이 특징으로 인해서 생명체의 정상성은 과학화, 즉 객관화가 근본적으로 쉽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캉길렘은 시간적(역사적), 논리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차원 모두에서 병리학이 생리학에 선행하며, 병리학의 객관화나 반대로 생리학의 주관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주장했다. 

 캉길렘은 의학을 통계나 수치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에 마침표를 찍으며, "병리학(질병의 체험)이 생리학(객관적 과학)보다 모든 차원에서 앞선다"는 위대한 선언을 던진다. 캉길렘은 정상성과 규범이 교과서나 진단 장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이 실재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시점, 특정한 환경, 특정한 개체라는 객관적 조건에 더해, 그 개체가 몸으로 겪어내는 ‘주관적 체험’이라는 결정적 조건이 필요하다. 아무리 의사가 데이터상으로 정상임을 진단해도 환자 본인이 삶의 제약을 느끼고 고통을 체험한다면 그것은 병리적인 상태이다. 즉, 건강과 질병의 최종 판정관은 과학적 장비가 아니라 생명체의 주관적 실존이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몸을 객관화하고 과학화하여 숫자로 통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생명의 정상성이 이토록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기반한다면, 이를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으로 묶는 과학화(Scientifisation)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을 평균 수치에 맞추려는 시도는 생명체의 고유한 주관적 역사를 거스르는 폭력이 될 수 있다.캉길렘은 병리학이 생리학보다 선행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네 가지 차원으로 설명된다. 

시간적(역사적) 선행: 인간은 평소에 정상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몸이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체 구조와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의학을 시작했다. 

논리적 선행: '정상'이라는 개념은 '비정상(질병)'이라는 결핍과 고통을 겪어본 후에야 비로소 그 반대급부로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인식론적 선행: 의학적 지식은 정상 상태를 관찰해서 쌓인 것이 아니라 질병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 

존재론적 선행: 생명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가만히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병리적 위기에 직면하고 이를 돌파해 나가는 투쟁의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캉길렘에 따르면 생명과학에서는 파토스(pathos)가 로고스(logos)를 좌우하기 때문에 파토스(병리학)가 로고스(생리학)를 소환한다. 달리 말해서 생명체의 규범은 그것이 위반되었을 때만 비로소 확인되므로, 생명체의 생리적 기능은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인 병리적 상태를 통해서만 밝혀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자연과학은 순수한 호기심과 이성(Logos)에서 출발하여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하지만 생명과학과 의학은 다르다. 인간은 몸이 건강하고 평온할 때는 생명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오직 몸이 아프고 괴로우며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즉 파토스(Pathos)라는 고통과 규범의 위반을 겪을 때 비로소 질문을 던지며 지성(Logos)을 작동시킨다. 즉, 고통이라는 실존적 사건이 과학적 연구를 촉발하는 원동력이다. 

생명체의 규범은 그것이 위반되었을 때만 비로소 확인된다. 평소 숨을 쉴 때는 폐와 기관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폐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식에 걸려 숨이 막히는 고통을 겪을 때야 비로소 호흡계의 존재와 그 규범을 확인하고 연구하게 된다. 즉, 정상의 메커니즘을 밝혀주는 렌즈는 역설적이게도 비정상이다. 고장 난 시계를 통해서만 시계 내부의 톱니바퀴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결국 생명과학에서 병리학은 생리학의 단순한 응용 분야가 아니라 생리학을 가능하게 만든 어머니이다. 고통(파토스)이 없었다면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이론(로고스)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앞서 나왔던 "시간적, 논리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차원에서 병리학이 생리학에 선행한다"는 주장의 철학적 근거가 완벽하게 규명된다. 

요컨대 생명과학에서는 병리학이 생리학보다 시간적(역사적), 논리적, 인식론적,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 그런데 문제는 병리적 상태가 근본적으로 주관적 상태라는 점이다. 많은 경우에 병리적 상태를 자각하고 스스로를 환자로 규정하는 것은 의사 이전에 환자 자신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의학은 정상 상태를 연구하다가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라, 질병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질병이라는 규범의 위반 문제가 발생해야 비로소 정상이라는 규범의 작동 메커니즘을 깨닫고 생리학을 연구할 수 있다.생명은 고정된 기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병리적 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실존적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은 생명체의 기본적 상태도 아니고 정의 되기도 어려운 정상적 상태를 복원하려 한다 이렇게 정상적 상태 를 수립하거나 복원하는 대표적인 기술이 임상의학(clinique)에서의 치료학(thérapeutique)이다. 

임상의학은 환자의 주관적인 병리적 체험 을 객관화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으며, 인간종의 평균적 상태를 이상 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추구하는 규범적 기술이다. 그런데 임상의학 은 이러한 규범적 특징으로 인해서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의사가 병리적 상태라고 규정한 규범에서 환자가 스스로 정상 적 상태라고 정의하는 다른 규범으로 이행했을 때, 즉 환자가 질병 에서 완쾌되었을 때, 그 기준이 사실상 환자의 주관적 만족이고 이 만족감은 의사가 근거해 있는 의학의 객관적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환자의 몸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검사하고 수치화하더라도, 치료의 최종 목적인 ‘완쾌(치유)’의 순간은 결국 의사의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환자의 주관적 만족에 의해 결정된다.현대 임상의학은 단순히 환자의 주관적 고통을 혈액 검사나 MRI 등의 객관적 데이터로 바꾸는 과학적 작업에 머물지 않는다. 의학은 인간종의 통계적 평균값을 완벽하고 이상적인 목표인 정상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모든 환자의 몸을 그 표준에 맞춰 교정하려는 규범적 기술(Normative technology)로 작동한다. 의학은 환자에게 이 평균 수치에 도달해야 건강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캉길렘은 임상의학이 지닌 객관주의적 태도가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치유와 완쾌의 정의 때문이다. 치유의 본질은 의사가 규정한 병리적 수치에서 환자가 스스로 이제 살 만하다고 느끼는 새로운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암 수치가 조금 남아있거나 혈압이 기준치보다 조금 높더라도 환자가 일상생활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삶의 자유를 누리는 주관적 만족이 선행된다면 그것이 바로 완쾌이다. 반대로 의사가 검사 결과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선언해도 환자가 여전히 기력이 없고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치유된 것이 아니다. 

 지식의 패배와 실존의 승리: 객관의 경계를 넘어서결국 완쾌의 최종 기준인 ‘환자의 주관적 만족감’은 의사가 신봉하는 ‘의학의 객관적 지식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의학은 질병을 진단할 때는 객관적인 과학의 힘을 빌리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질병이 끝나는 순간(치유)에는 환자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비과학적(?) 영역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결국 완쾌의 최종 기준인 환자의 주관적 만족감은 의사가 신봉하는 의학의 객관적 지식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의학은 질병을 진단할 때는 객관적인 과학의 힘을 빌리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질병이 끝나는 순간인 치유에는 환자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비과학적 영역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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