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년 전 약간의 친분이 있었던 安秀吉 서울大 명예교수로부터 이 책을 傳해 받은 바 있었다. 安교수는 공학자이지만 민족사와 언어학 연구에 造詣가 깊었다. 창작자로서의 어휘 확장에 참고가 될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一讀을 권유받은 것이었지만 당시에 遺憾스럽게도 필자는 熱讀에 들어가지 못하고 安교수가 他界한 지금에 와서 다시 펼쳐보고 있는 중이다. 이제 더 이상 창작에 응용할 기회도 적은 마당에 무슨 所用이 될까 하지만 근래 쓴 몇 편의 논설에서 언급한 日帝時代 만주 ‘독립운동’의 眞相을 살펴보고 싶은 것이었다. 물론 같은 ‘滿洲人’으로서의 ‘독립운동’에 對한 칭송일변도이긴 하겠지만 기록적 實相을 파악하기에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연변의 조선어는 더욱 풍부한 느낌이 있다. 물론 실질적으로 북한어와 거의 같겠지만 북한어 열독에 따르는 정치적인 부담감(?)이 없기 때문에 ‘편안히’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비롯된 한자배제 한글전용 이데올로기의 言語掌握은 시간차가 있을 뿐이지 남북한이 동일하니 어차피 필자의 입맛이 맞는 언어제도는 아니다. 그러나 늦게야 인위적인 英語公用 압력에 의해 퇴화된 남한의 한국어에 비해 延邊語(또는 북한어)는 순수하게 토속어나 고유어를 살려내고 있어 더 풍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래 들어 당연하면서도 평범한 것에 또 다른 눈길을 주게 된다. 저자는 두 권에 걸친 풍부한 敍事 저작물을 발표하면서 이것을 ‘장편기행문’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표제를 붙여 발표하였다. 한국에서라면 十中八九, 이토록 노력을 들여 발표하는 본인의 저작물에 무슨 문학적 억지를 붙여 발표할 것이다. ‘장편소설’이나 혹은 정 면구스러우면 ‘장편 실화기행소설’이라고 하며 저자는 ‘창작 경력’을 장식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창작소설도 발표했던 만큼 소설에 對한 어떤 콤플렉스 같은 것은 없어서 일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풍토에서는 너도 나도 기왕이면 억지로라도 ‘다홍치마’를 덧입고 싶어 하는 만큼 어찌해서라도 소설이라는 표제를 붙였을 것이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간다. 소설 창작 경력이 없다면 소설가 따위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 소설발표 경력이 있다면 소설창작 경력을 늘리기 위해서 말이다.
저자가 굳이 소설이라는 억지 다홍치마를 씌우지 않고 기행문이라는 표제를 당당히 붙인 것에는 저자가 비록 많은 양의 소설창작경력이 있지는 않았더라도 소설에 對한 정확한 理解가 있었던 데 있다고 본다. 實話의 기록은 우리 인간역사에 가장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인간이 직접 보고들은 사실만으로는 각 사건에 얽힌 근본 機制(메카니즘)를 추적하지 못한다. 이럴 때 비록 정확성은 높지 않더라도 인간의 視聽覺情報 그 以上의 관점을 동원하여 小神으로서 또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 글이나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서 소설이란 것이 무슨 高尙한… 넘보기 힘든 聖域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인터넷에서 청소년이 제 나름대로 꾸며 올린 이야기도 現實獨立的 自體體系를 가지고 있다면 또 다른 세계의 창조이며 소설인 것이다. 다만 手記라든가 紀行文이라든가 해도 얼마든지 훌륭하고 길이 남을 작품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소설이라는 표제를 다는 왜곡된 풍조의 비판은 오래전부터 평론계에 膾炙된 것이다. 정치평론가이며 前장관으로서 훌륭한 사회과학 저작물도 냈던 유시민씨가 굳이 ‘현실에 없는 것을 창작해내는’ ‘작가’로 불리길 바라는 것도 그런 현상중의 하나이다.
‘虛構의 창작자’가 그리 잘나가고 脚光받는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허구 창작자를 自處 하는 시대… 그 근원은 무엇일까. 이 世上이 너무도 답답하여 모두들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을 한번쯤 꿈꾸기 때문이 아닐까.